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05화 (105/204)
  • 105화

    한 가지 부담인 점.

    D―TV의 ‘철학 스터디’가 생중계라는 거다.

    토론은 라이브로 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나.

    아무튼 화요일 새벽부터 토론을 하게 생겼다.

    내가 별로 준비할 건 없었다.

    토론을 위해 새삼 공부를 하는 것도 웃긴 일이고.

    사실 내 신경은 모두 피터 한에게 쏠려 있었다.

    오늘 아침.

    금홍은 피터 한의 연구실로 갔다.

    연구실 앞에 놓인 <그 집>의 원고.

    그리고… 피터 한에게는 아무 연락도 없다.

    지훈은 이 일로 적잖이 열이 받았다.

    더 좋은 번역자를 찾고 말겠다며, 온갖 곳을 뒤졌다.

    금홍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충격인 모양이었다.

    …다른 번역자를 찾아야 하는 걸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큼의 적임자는 없다.

    고민 끝에 나는 집을 나섰다.

    저녁 일곱 시.

    지금쯤이면 학교가 조용할 시간.

    나는 피터 한을 만나기 위해 대한외대로 향했다.

    금홍과 지훈에겐 말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단둘이 담판을 짓고 싶었다.

    대한외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연구실 건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 층의 컴컴한 복도.

    내 발소리만 저벅저벅 울렸다.

    복도 맨 끝의 연구실에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왔다.

    역시, 연구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혜경 샘?”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누군가 날 불렀다.

    놀라 고개를 돌렸다.

    “금홍 샘? 여긴 무슨 일로….”

    “아… 피터 교수님께서 부르셔서요….”

    금홍이만?

    “…번역 때문에요?”

    “모르겠어요. 갑자기 와 보라 하셔서 온 거긴 한데요.”

    번역 일이겠군.

    그런데 왜 내가 아니라 금홍이를 불렀을까.

    “그럼 먼저 들어가세요. 학생 면담이 먼저니까.”

    “번역 일이면 교수님께 여쭤볼게요. 같이 들어가도 되겠냐고.”

    금홍은 연구실 문에 노크를 했다.

    어제와 달리 문은 바로 벌컥 열렸다.

    여쭤볼 것도 없었다.

    피터 한은 금홍의 뒤에 있는 나를 바로 발견했으니까.

    “혼자 오라 했었을 텐데요?”

    그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 이 앞에서 만났어요.”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말씀 나누시죠.”

    나는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피터 한은 나와 금홍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돌아 들어갔다.

    “들어와요. 두 사람 다.”

    우리는 그렇게 어물쩍 연구실로 들어갔다.

    내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교수.

    낯선 연구실의 풍경.

    왠지 다시 인수대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군.

    “앉아요.”

    그는 우리에게 소파를 권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금홍도 긴장이 되는지 손을 꽉 맞잡고 있었다.

    “이금홍 학생은 번역 언제부터 했어요?”

    “…일 년 정도 했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고의 메모는 혼자 읽고 한 거예요?”

    “아뇨. 작가님이랑 평론가님 계실 때, 함께한 거예요.”

    “포인트 체크가 정확한 편이던데. 영문과 출신인가?”

    “…문창과 출신입니다.”

    금홍은 좀 주저하며 말했다.

    금홍의 대학원 생활이 어땠는지 알 것 같았다.

    문창과를 거쳐 통번역을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녀도 나름대로 괴짜 취급을 받고 있었겠지.

    그의 눈이 날 향했다.

    “이상 작가님은… 사실 이걸 물어보려고 이금홍 학생을 부른 거긴 한데, 본인이 직접 왔으니 별수 있나.”

    그렇게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국적이 미국이에요?”

    “아니요.”

    “미국 살아 본 적 있어요?”

    “전혀요.”

    그는 날 빤히 보았다.

    “그럼 어떻게….”

    하고 또 머뭇거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미국적인 감성을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식 공포를.”

    “인터뷰를 했거든요.”

    “그게 인터뷰로 알 수 있는 차원의 문제인가?”

    “이금홍 선생님에게 적당한 인터뷰이를 소개받았고, 필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답을 얻었죠. 이게 다입니다.”

    “…당신에 대한 기사를 읽어 본 적이 있어요. 천재라 떠받드는 기사들.”

    “….”

    “<내외인>이 그 정도 글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말끝을 흐렸다.

    기분이 좋은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미국적 취향을 가진 그에게는 난해하게만 느껴질지도.

    “<그 집>은 좋았어요. 장르 소설을 끝까지 읽은 적도 처음이었고. 포인트를 잡아 놓은 걸 보니 더 그럴듯했고.”

    “번역을 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나는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 소파에 몸을 깊숙이 앉혔다.

    “그래야겠어요. 안 하려 했는데, 안 하고는 못 배기기 만들고 놓고 갔잖아요.”

    원고를 문 앞에 두고 간 일을 말하는 거다.

    그걸 끝까지 본 건 자신의 선택 같은데….

    부탁하는 입장이니, 난 비위를 맞춰 주기로 했다.

    “교수님 같은 분이 맡아 주신다니 겨우 안심이 되네요.”

    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싫지는 않은 얼굴이다.

    “그런 깊이 있는 스릴러 문학, 어중이떠중이들이 번역을 맡았다간 완전히 망쳐 버리고 마니까요. 별수 있나요.”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공모에 낸다고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그럼 공모 일정에 맞춰야겠군. 언제까지 해 드리면 될까요?”

    “3월까지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어디 공모입니까?”

    음… 이건 좀 싫어할 것 같긴 하지만.

    “‘누들’ 출판사입니다.”

    “누들?! 그 잘난 척하는 힙스…!”

    그는 겨우 말을 삼켰다.

    싫어할 만했다.

    피터 한은 엘리트 순문학주의자.

    누들 출판사는 장르 소설계에서도 독특한 축에 드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만.”

    “…잘난 척하는 힙스터들 같아서요. 이름도 너무 튀려고 작정한 게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공모전으로만 책을 낸다는 것도 좀 오만한 태도고.”

    금홍이 살짝 웃음을 참았다.

    피터 한이 하는 말들, 그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잘난 척하고, 튀어 보이고, 다소 오만한 데가 있으니.

    이런 게 자기혐오인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피터 한이야말로 누들이 원하는 영어의 느낌을 제대로 낼 수 있겠다고.

    “뭐, 작가님께서 어디에 공모를 낼 건지 그건 제 알 바가 아니고… 진행해 보죠, 번역.”

    “스케줄은 괜찮으십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삐딱한 말.

    하지만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집>을 위해 시간을 내주겠단 말이었다.

    * * *

    종로의 시각예술문화센터.

    나는 김미소 작가와 이곳을 찾았다.

    오늘 이곳에서… <등>의 낭독회가 열린다.

    사실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나 출판사에서 주최한 것도 아니고,

    화가협회에서 취미조로 하는 모임인데.

    하지만 모레 있을 ‘철학 스터디’를 생각하면….

    한 번쯤은 낭독을 들어 놓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소리로 들으면 글로 볼 때 느낄 수 없던 것들이 느껴지곤 하니까.

    해서, 김미소 작가와 함께 가는 조건으로 시간을 낸 것이다.

    낭독회라고 해서 거창한 건 없었다.

    그저 화가들이 모여 책을 읽는 자리일 뿐.

    요란한 환영식과 인사를 안 해도 된다는 것.

    그건 좀 마음에 들었다.

    나와 김미소 작가는 객석에 나란히 앉았다.

    화가들의 나잇대는 다양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부터,

    누가 봐도 원로로 보이는 노인까지.

    마치 내가 파리에서 한 것처럼,

    그들은 <등>을 한 단락씩 읽었다.

    내 소설이어서 그런지 지루할 줄 알았는데….

    소설 내용이 새삼 귀에 들어왔다.

    “…남자는 그림을 그렸다. 주로 바닷가 앞에서. 바다를 딱히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그가 항구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뭍에서 보면, 그는 두툼한 등을 내보인 채 종일 바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것은 바다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이건 대체 뭐야? 함께 숙소를 쓰던 이가 물었다. 바다지. 하지만 남자의 캔버스엔 얼굴 없는 여자의 흐릿한 인영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바다야? 여자잖아. 남자는 말했다. 바다를 보고 떠오른 걸 그렸을 뿐이야. 그리고 사람들이 이걸 보고 바다를 떠올리면, 난 성공한 거지. 남자는 그것이야말로 그림을 그리는 가장 좋은 훈련이라고 했다.”

    저 장면.

    예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쓴 부분이다.

    글이건 그림이건, 세상을 그대로 복제하는 건 예술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예술가의 감정을 전달하는 일.

    난 그것을 예술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부부는 어느 카페에서 재회를 했다. 여자는 거지나 다름없는 남편의 행색에 눈물을 글썽였다. 여자는 시켜 주는 음식을 허겁지겁 입으로 밀어 넣는 남편의 행동에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가 사 준 음식을 다 먹었다. 그리고 바로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난 이게 가 봐야겠어. 몇 분 동안 실랑이가 이어졌다. 여자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라 요구했고, 남자는 거절했다. 여자는 오랫동안 별러왔던 말을 내뱉었다. 이 정도 상처를 주면 남자가 약해질 것이고, 그 틈을 타 그를 회유해서 집으로 끌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당신 그 쓸데없는 짓 언제까지 할 셈이야? 여자의 생각대로, 남자가 되물었다. 쓸데없는 짓? 여자는 한 번 더 몰아쳤다. 그래. 그 무용한 짓 말이야. 그러자 남자가 웃었다. 웃는다는 건 생각지 못한 일이었기에, 여자는 당황했다. 무용해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내가 하는 짓이 무용한 게 아니라는 거야. 내가 무용한 거지. 무용해지는 것도 나름대로 영광이군.”

    예술과 예술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 부분이다.

    두 존재는 하나가 되길 추구한다.

    그것을 성공한 이를, 천재라 부르는 거고.

    그것만을 생각하는 이를 광인이라 부른다.

    “…남자는 그 동네에서 사라졌다. 변화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남자가 묵은 여관이 문을 닫은 것이었다. 특별난 이유는 없었다. 재정난과 주인의 노쇠한 몸 때문이었다. 주인은 죽을 날만을 향하여 살아가는 병약한 노인이었는데, 그즈음에는 앞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방들을 점검한 후, 여관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그렇게 닫힌 문 안, 어느 벽에 남자가 뭔가를 그렸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얼마 후 여관은 허물리고 말았다. 그러나 남자의 그림이 그려진 벽의 조각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눈이 있는 자들이라면, 줍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 조각들이 모두 모일 일은 영원히 없었다.”

    예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한 부분.

    다소 상징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사람들이 가져간 조각들이란, 예술가가 사라진 시대에 남겨진 예술품들이다.

    그건 그저 미완성된 파편들일 뿐.

    조각들만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생기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등>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역시 와 보길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잊고 있던 창작 의도를 되짚어 볼 수 있었으니.

    <등>의 낭독회가 끝나고,

    잠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내게도 마이크가 왔지만, 인사는 극구 사양했다.

    저들의 행사를 편하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잠시 후, 김미소 작가가 이모분을 모시고 다가왔다.

    “작가님. 저희 이모예요. 작가님의 열혈 팬.”

    “어머, 작가님. 만나서 영광입니다.”

    “…제가 더 영광이죠. 낭독 잘 들었습니다.”

    “책이 워낙 훌륭하니까요. 화가들 사이에선 얘기가 정말 많이 나오고 있거든요. 같은 예술계라서 그런가… 저희의 로망이라 해야 하나, 욕망이라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이 강렬하게 표현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평이야 고맙고 뿌듯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슬금슬금 몰려드는 사람들이었다.

    순식간에 <등>에 대한 이야기꽃이 만개했다.

    나는 어색한 웃음만을 지으며, 김미소 작가에게 살려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하… 저희는 저희 쪽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어요. 이모.”

    그렇게 김미소 작가가 날 슬쩍 빼 주려던 참이었다.

    김미소 작가의 이모분이 손뼉을 가볍게 쳤다.

    “나 좀 봐.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잊을 뻔했네.”

    “네?”

    “저 안에서 잠깐만 얘길 좀 나누고 가겠어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