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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104화 (104/204)

104화

피터 한의 사무실은 교수 연구실 건물 꼭대기 층.

그 층에서도 가장 외진 곳.

마음먹지 않으면 오기도 힘든 위치.

그 앞에서 우리 셋은 서 있었다.

연구실 안에서 낮게 들려오는 팝송.

문 사이로 비치는 불빛.

안에 있는 건 확실하다.

“후우… 그럼 노트할게요?”

“네.”

나는 대답했다.

지훈이 옆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똑똑―

금홍이 조심스레 노크를 했다.

아무 반응이 없다.

똑! 똑!

한 번 더 강하게 노크를 했다.

그제야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가 멈췄다.

탁― 탁―

슬리퍼를 끄는 소리.

탁.

문 앞에 와서 서는 소리.

그러나 문은 묵묵부답.

망설이고 있는 거다. 문 열기를.

“피터 한 교수님?”

참다못한 내가 외쳤다.

“으아… 난 몰라.”

금홍이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이러는 걸까.

기대가 될 지경이다.

달칵― 하고 문이 조금 열렸다.

문틈으로 보이는… 생각보다 젊은 남자.

삼십대 초반? 많아 봤자 중반.

한국계 혼혈이지만 백인의 느낌이 강했다.

게다가 어딘지 짜증스럽고 날카로운 인상.

“학생과 면담은 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박또박한 한국어로 말했다.

너무 발음이 또렷해서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면담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만.”

“학생이 아니라면 더욱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아, 문을 두드린 건 학생이긴 합니다만.”

나는 금홍을 가리켰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피터 한은 딱 그런 얼굴로 날 보았다.

그때, 금홍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고개를 까딱 숙였다.

그래도 학생은 알아보는 모양이다.

“수업 때 봅시다. 이금홍 학생.”

이름도 알고 있는 것 같고.

학교에 전혀 관심이 없는 건 아니군.

그는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난 그 새를 놓칠세라 얼른 말했다.

“번역 의뢰를 좀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뢰는 개인적으로만 받는다고 하셔서요.”

“…당신이 누군데요?”

“한국의 소설가입니다. 필명은 이상이라고 합니다.”

“아, 당신. 압니다.”

다행히도, 내 이름이 그의 관심을 끈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안으로 들여보내 준 건 아니지만.

“유로문학상을 받은 작가죠? <내외인>은 저도 읽었습니다. 나쁘지 않은 작품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난해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작가의 마음이긴 하지만.”

가감 없는 평가.

난해하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그도 독서 취향이 유럽보단 미국쪽이군.

…더 마음에 드는데?

“제 작품을 읽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네. 하지만 제가 번역을 해 드리기엔, 작가님 작품은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번역가는 출판사 쪽으로 연락을 하세요. 미국 현지에 번역가들이 수두룩하니까.”

“출판사를 통해 번역을 맡길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 알 바는 아니죠. 돌아가세요.”

그가 다시 한번 문을 닫으려 했다.

난 또 재빨리 외쳤다.

“투고를 하려 합니다. 무기명으로요.”

그는 날 빤히 봤다.

대체 이놈은 뭐야? 하는 눈으로.

“유로문학상의 이름값에 기대지 않고 미국에서 첫 작품을 발표하고 싶어서요.”

“…괜한 짓을 하네요.”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구미가 당기는 표정이었다.

이런 타입의 사람.

본 적 있다.

읽고 싶은 글만 읽고, 쓰고 싶은 글만 쓰는.

전형적인 걸 싫어하고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오진우 시 평론가와 같은 부류 아닌가.

이즈음 되니,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다.

작품을 보여 주는 게 빠르지.

“금홍 샘.”

“네?”

“금홍 샘 원고 좀 빌려주시겠어요?”

피터 한 교수가 날카롭게 말했다.

“전 원고를 보겠다고 말 안 했는데요.”

말만 안 했지, 문을 아직 안 닫았잖아.

물론 지금 여기서 가장 당황한 건 금홍이었다.

“…제 원고를요?”

“네. 아, 이금홍 학생이 작품의 초벌 번역자입니다. 원고의 메모를 보시면 진행 상황이 파악되실 겁니다.”

“초벌 번역자까지 있는 원고를 맡아 달라는 겁니까?”

피터 한이 불쾌한 듯 물었다.

그래도 초벌 번역자가 학생이란 건 책잡지 않는군.

그런 권위의식이 없거나, 혹은 평소에 금홍을 좋게 봤겠지.

초벌 번역자가 있다는 게 싫을 순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 속일 수야 없지 않은가.

금홍은 가방에서 원고를 꺼냈다.

메모가 잔뜩인 원고.

금홍이 원고를 내밀며 말했다.

“초벌 번역을 한 게 제 컴퓨터에 있으니, 원하신다면 그것도 보내 드릴 수 있어요, 교수님.”

“됐습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는 원고를 받았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원고와 메모를 훑어보았다.

“…흠.”

그는 슬쩍 문가에 기대 섰다.

원고에 눈을 떼지 않은 채.

“이걸 미국 공모전에 내겠다고요?”

“네.”

그는 나를 또 흘긋 봤다.

나는 더 늦기 전에 말했다.

“그런데 좀 더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순문학은 아닙니다.”

그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사람 참,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이 격렬하다.

그가 잘 읽던 원고를 탁 하고 덮었다.

“그럼 이게 대체 뭔데요?”

“스릴러 소설입니다. 장르문학이죠.”

“…가세요. 진짜로.”

그는 금홍에게 원고를 내밀었다.

금홍이 엉겁결에 그걸 받자마자,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으… 성격….”

내내 가만히 있던 지훈이 한 마디 중얼거렸다.

“…봤죠? 장르 소설 안 좋아하세요. 수업 시간에도 공공연하게 말씀하시는 정돈데….”

“하지만 원고는 분명 재밌게 보고 있었죠?”

“그건… 그렇죠?”

“금홍 샘. 그 원고 몇 시간만 빌릴게요.”

“네?”

“그래도 되죠?”

“…아, 네.”

금홍은 순순히 원고를 주었다.

나는 그걸 연구실 앞에 내려놓았다.

“형, 뭐 하는 거예요?”

똑똑.

나는 다시 노크를 했다.

역시,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나는 안에서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원고를 두고 가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이금홍 학생이 찾으러 올 거예요. 그때까지만 두겠습니다.”

“뭐라고요? 형, 미쳤어요? 누가 가져가면 어쩌려고?”

지훈이 속삭이듯 따졌다.

금홍도 놀란 건 마찬가지.

하지만 장담한다.

내일 오전까지 이 원고가 여기 계속 있을 리가.

나는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그들을 데리고 걸었다.

중앙계단이 있는 곳까지.

그리고 계단 초입에 몸을 숨긴 채 기다렸다.

“…괜찮을까요?”

금홍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적어도 원고가 분실되게 둘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성격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그리고 분명 아까 관심을 보였으니까요.”

우리가 원고를 가져가 버렸으면 모를까.

문밖에 바로 있는 원고를 못 본 척 할 수 있을 리가.

잠시 후.

“혀, 형. 문 열렸어요.”

지훈이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살짝 빼서 복도를 보았다.

복도 저 끝 연구실.

문이 조금 열렸다.

피터 한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마른 손을 뻗어 원고만 쏙 가지고 들어갔다.

지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로 된 걸까요?”

“지켜 봐야지. 일단.”

그가 <그 집>을 다 볼 때까지는.

내가 글을 제대로 썼다면….

그리고 금홍이 번역의 포인트를 잘 잡았다면….

피터 한의 마음에도 들 거다.

스케줄 걱정은 할 필요도 없다.

저런 스타일의 사람은… 원고가 마음에 든다면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 테니.

* * *

피터 한 교수와의 요란한 만남 후.

우리는 근처 백반집에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금홍은 피식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그 교수님, 말 걸기 어려운 분이거든요. 그런데 문틈 사이로 원고만 쏙 가져간 게 떠올라서… 좀 귀엽지 않아요?”

지훈이 뭐 씹은 얼굴을 한다.

“별게 다 귀엽네요.”

“왜? 나름 매력있던데. 저, 피터 한 교수랑 비슷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거든요.”

“누구요?”

“있어요. 오진우 평론가라고.”

오진우의 이름이 나오자, 지훈도 낄낄 댔다.

“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이미지가 비슷하네요?”

“그렇지? 오진우 평론가, 시에는 목숨 걸었지만 사람한테는 일절 관심 없거든.”

“하긴. 피터 한 교수님도 그런 편이에요. 잘보여야 한다는 부담 없어서 좋긴 하죠.”

금홍이 말했다.

지훈은 밥을 뜨다 말고 투덜댔다.

“그래도, 진짜 몰래 투고하는 것만 아니면 떵떵거리면서 번역자 찾는 건데 이게 뭔 고생이에요.”

“나는 지망생 때 생각나고 좋던데.”

“지망생이요? 어휴, 난 절대 못 돌아가. 형은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그 시절이 그리운가 봐요.”

따지고 보면… 내가 한 고생은 아니니까.

지망생의 설움은 혜경이 겪었지.

주위의 무시와 교수의 핍박….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그런 것들에 시달렸으니.

“일 년 사이에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 그렇지?”

“거의 삼백육십 도 바뀐 수준이죠. 인생이 달라진 수준.”

“지훈 샘… 삼백육십 도면 제자리 아니에요?”

금홍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지훈이 얼굴이 벌게졌다.

“…문과라서 그래요.”

“문과가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 아무튼…! 식사하세요.”

우웅―

그때, 톡이 하나 들어왔다.

김미소 작가였다.

― 후배님, 저희 이모가 화가라고 했잖아요.

― 네. 그러셨죠.

― 이번 주 일요일에 미술가협회에서 <등>으로 낭독회를 하는데, 샘도 구경 오실래요?

응? <등>으로 낭독회를?

― 미술가협회에서 낭독회도 해요?

― 화가의 소울을 울린다나… 암튼 작가님 오시면 자리 하나 마련해 드리고요.

― 저 가면 불편해하실 것 같은데요.

사실 불편한 건 나지만.

― 음… 그래도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세요.

― 그래요, 그럼. 연락 드릴게요.

화가들도 참….

어지간히도 <등>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톡을 끝내고, 다시 숟가락을 들려 할 때였다.

우웅― 우웅―

이번엔 전화로구나.

“샘 인기 좋으시네요.”

금홍이 놀리듯 말했다.

“밥을 못 먹겠네… 죄송해요. 통화 좀 하고 올게요.”

번호를 보니까 국제전화다.

아무래도 독일 쪽 같다.

백반집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뮌 출판사의 통역사 다이앤 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상 작가님. 저 뮌 출판사의 다이앤 박입니다.

“네.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로 전화까지 주셨습니까?”

― 다름이 아니라 D―TV 쪽에서 ‘철학 스터디’에 관련한 몇 가지 전달 사항을 전해 드릴 수 있느냐는 부탁을 받아서요. 그쪽엔 한국인 통역사가 없어서 제가 대신 알려드리려 전화드렸는데, 통화 괜찮으신가요?

“아, 네. 너무 길지만 않으면 괜찮습니다.”

다이앤 박은 방송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라이브 방송.

방송일은 다음 주 화요일.

토론 시간을 삼십 분 안쪽.

기타 알아야 할 것들.

모두 상식선의 요구들이었다.

남은 건 가장 중요한… 주제.

― 토론 주제는 ‘미래에도 예술가는 필요한가’입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이런 주제가 나올 줄 알았지.

“누가 정한 주제인가요?”

― ‘철학 스터디’의 제작진이 정한 주제예요. 작가님의 책과 틸 버켈의 저서를 모두 본 사람들이니, 진행엔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정보를 전달한 다이앤 박은 잠시 멈칫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혹시 더 해 주실 말씀이 있을까요?”

― 음… 다른 건 아니고 틸 버켈에 대한 겁니다. 그는 뭐랄까요 좀… 무자비하게 토론을 하는 걸로 유명해요.

“무자비한 토론이라면….”

― 예의가 없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독일인들도 그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많이 갈리죠.

문득, 그의 사진 속 미간의 주름이 떠올랐다.

그 주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냉철한 말투에 고집이 센 철학자.

지금까지 그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군.

다이앤은 바로 그 점을 걱정하는 거고.

― 그럼… 토론 준비 잘 하시길 바랍니다.

“아는 만큼만 말할 생각입니다. 또 제가 아는 건….”

― ….

“<등>에다가 이미 다 썼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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