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03화 (103/204)
  • 103화

    ‘철학 스터디’에 나가는 건 일단 보류.

    일단 틸 버켈에 대해 좀 알아야겠다.

    인터넷은 별 도움이 안 됐다.

    그가 세상의 온갖 것을 혐오하는 괴짜란 이야기뿐.

    문제는 그런 비판에 논리가 없다는 거다.

    기껏해야 그런 제목의 책을 냈다는 사실 정도.

    이건 뭐.

    ‘괴짜 소설가’로서 친근감이 느껴질 지경이다.

    그래도 어찌 됐건 그는 저명한 현대 철학자다.

    괜한 시비를 걸기 위에 날 찾은 건 아닐 터.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결국 나는 한국대 도서관을 찾았다.

    그리고 틸 버켈의 저서를 모두 빌려서 열람실로 갔다.

    그가 평생 쓴 책은 모두 일곱 권.

    번역된 저서는 고작 세 권.

    한국에서 현대 철학은 썩 인기가 없기 때문이겠지.

    책들의 제목은….

    <예술무용론>, <종교무용론>, <사상무용론>.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제목들.

    이런 제목을 지으니 ‘혐오론자’라고 불릴 수밖에.

    나는 <예술무용론>을 펼쳤다.

    책날개에 인쇄된 틸 버켈의 사진.

    흰 수염이 무성한 남자.

    미간의 주름과 꾹 다문 입매.

    앉은 자리에서 <예술무용론>을 모두 읽었다.

    쉬운 책은 아니었다.

    특히 번역이 너무 엉망진창이라 몇 번이나 멈추었다.

    하지만… 분명 읽어 둘 만한 내용이었다.

    기술과학이 주도하는 현대 사회.

    그에 맞게 예술의 개념과 가치도 재정립되어야 한다.

    세상의 그 어떤 개념도 영원하지 않으니.

    현대 예술을 ‘감동’이라는 키워드로 가두지 말라.

    ‘예술은 감동을 주는 것’.

    이 말 역시 낭만주의가 만들어 낸 산물이니까.

    즉, 예술에 대한 가치 평가는 18세기에 머물러 있다.

    기계들은 점점 인간을 흉내 낸다.

    예술가 역시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

    충분히 감동적인 작품을 생산해 내는 기계.

    그런 기계가 존재하면 예술가는 사라지는가?

    기계가 예술가의 생존을 위협하기 전에,

    예술의 개념과 가치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나는 책을 덮었다.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생각이었다.

    아니, 아플 정도로 정확한 지적이었다.

    나 역시 현대와 미래 사회의 전망에 관심이 많다.

    특히 기계, 과학, 디지털리즘….

    시를 통해 여러 번 구현하기도 했고.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등>을 보고 날 불렀는지.

    <등>은 표면적으로는 낭만적인 작품이다.

    한 화가가 자신의 인생을 던져 예술을 만든다는 ‘감동’.

    그것이 눈에 보이는 스토리 라인이니까.

    하지만 그 안에 깔린 건… ‘예술가’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책 표지의 틸 버켈도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 어쩔 거지?

    <등>의 낭만성이 미래에도 통할 것 같아?

    라고 그가 내게 묻는 듯했다.

    고민 끝에, 지훈에게 톡을 보냈다.

    ― 하겠다고 전해 줘. 철학 스터디.

    ― 네? 하지만… 얻는 게 있을까요?

    ― 첫째, 아주 흥미로워. 구미가 당겨. 그리고 둘째….

    이걸 무시할 수 없지.

    ― 이 토론을 잘 해내면, 독일에서 <등>이 제대로 쐐기를 박을 수 있어.

    * * *

    ‘팀 이상’의 두 번째 모임.

    오늘은 나와 지훈이 대한외대로 갔다.

    구내식당 옆에 딸린 교내 스터디 룸.

    방학 중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학교에서 만나니 예전 생각나네요.”

    금홍이 말했다.

    “그러게요. 조교 했을 때 이런 데서 농땡이 많이 피웠는데.”

    내 말에 지훈이 킬킬거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까 우리 셋 모두 다른 학교 다니고 있네요.”

    “그러게?”

    나는 새삼 놀랐다.

    그래 봤자 고작 일 년인데.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그럼, 일단 회의를 좀 볼까요?”

    “후우… 그래요.”

    금홍이 긴장되는 얼굴로 원고를 펼쳤다.

    “형, 3장 마지막 부분 들어가면 되겠죠?”

    “응. 수지가 이 집의 룰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야. 읽어 볼게. ‘수지는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접시를 깼던 일. 괜찮다고 했다. 합격. 접시를 치우기 위해 창고에 혼자 들어간 일. 혼이 났다. 불합격. 좋지 않은 성적표를 가져온 일. 합격. 양 오빠의 성적을 몰래 본 일. 불합격. 텅 빈 집에서 몰래 파티를 연 일. 합격. 술에 취해 오빠의 방 침대에서 자 버린 일. 불합격. 오빠의 책상 위의 물건을 함부로 만진 일. 불합격. 부모에게 오빠에 대해 묻는 일… 불합격. 수지는 거기까지 생각했다. 답은 나와 있었다. 오빠에 대해 궁금해하지 말 것.’”

    “여기서 중요한 건… 언어의 리듬이네요.”

    “그렇지. 금홍 샘이 신경을 좀 써 주셔야 해요. 앞부분 전개의 클라이맥스나 마찬가지니까요. 되도록 짧은 단문으로 이루어진 문장들인데… 이 느낌을 살릴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번역을 하면 문장이 길어져요. 이 부분은 의식해서 짧게 치든가… 아니면 각 문장의 길이를 의도적으로 맞춰서 리듬감을 줘야 할 것 같아요. 체크해 둘게요.”

    금홍이 붉은 펜으로 빠르게 노트를 했다.

    자, 그럼 그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수지는 결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어떤 태도로 이 집안의 룰을 받아들일지를. 이 문제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더 파헤쳐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천성을 따라서. 하지만 수지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실험은 끝이었다.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오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목적도 분명했다. 이 집안의 딸로 인정받는 것. 이제 수지 자신의 호기심만 잘 억제하는 일만 남았다. 그날 이후, 수지의 생활은 편안해졌다. 그녀는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을 해 버렸다. 그리고 좀처럼 그 집을 찾지 않았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어려운 부분은 아닌데, 심리 흐름을 잘 짚어야겠어요.”

    “응. 특히… 마지막 네 문장을 잘 이해해야 해. 수지의 생활은 편해졌다고 했지만, 이건 반쪽짜리 진심이거든. 그 증거가 바로 뒤에 나와.”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을 했다고요. 그리고 그 집을 찾지도 않았고.”

    “이 문장의 연결고리가… 좀 불안하게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금홍 샘.”

    “불안하게요?”

    “네. 사실은 가족이 비밀을 지니고 있다는 걸 불편해하면서도, 편하다고 말하잖아요. 이건 수지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심리거든요. 난 괜찮아, 난 편해, 이 집의 비밀은 몰라도 돼. 이런 식으로요. 하지만 바로 뒤에, 그 거짓말이 들통나게 되는 거예요. 그 집을 도망치듯 하는 그녀의 행동을 통해서. 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이런 거네요. 수지는 자신의 마음을 들킨 줄 모르지만, 독자들은 알 수 있도록.”

    “맞아요, 그거예요. 인물은 모르는데 독자들은 아는 거… 거기서 서스펜스가 탄생하거든요.”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요. 체크.”

    회의는 술술 진행되어 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원고의 삼 분의 이 정도를 살펴봤을 때였다.

    “쉬었다 합시다.”

    지훈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녀석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벌써 세 시간째 앉아 있었어요. 마실 거라도 좀 사 올게요. 좀이 쑤시네….”

    “난 커피. 따뜻한 걸로.”

    “전 아이스 커피.”

    바로 주문을 넣는 우리 둘.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스터디 룸을 나갔다.

    “이런 회의, 지루하지 않으세요?”

    “아뇨. 진짜 재밌어요. 하고 있으면, 저도 소설이 쓰고 싶어져요.”

    “지금이라도 시작해 보세요. 안 늦었는데.”

    “지금 하는 것도 벅차요. 아, 혜경 샘, 독일에서 무슨 방송 나가신다면서요?”

    …송지훈.

    어째 점점 입이 싸지는 것 같은데?

    “네. <등>을 가지고 얘길 좀 할 것 같아요.”

    “정말 대단해요. 예술철학 관련한 거라면서요. 통번역과에 독일어 번역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쪽은 철학이 워낙 강세라서 웬만큼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철학 토론 같은 건 나가지도 못한대요.”

    “난 철학은 잘 몰라요. 그냥, <등>에 대해서 뭔가를 물으면 대답할 용의가 있는 거죠.”

    금홍은 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혜경 샘, 인터뷰도 잘 안 하시지 않아요? 갑자기 왜 출연을 결정하신 거예요?”

    “음… 그런 자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얘기들이 있을 것 같아서요. 작품에 대해 철학적으로 깊이 파고들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런 면에서, 독일에 <등>이 진출한 게 다행이지.

    소설을 보고 철학자가 먼저 달려드는 나라는… 세상에 독일 뿐일 거다.

    “그렇구나. 아… 저기, 번역자는 구하셨어요?”

    번역자.

    말만 들어도 한숨부터 나온다.

    “하아… 아뇨. 안 그래도 걱정이에요. 지훈이랑 계속 찾아보는데도….”

    답답한 마음에 펜만 빙빙 돌렸다.

    아무리 뒤져 봐도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금홍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저기… 적당한 사람이 한 분 있긴 한데요.”

    그때였다.

    지훈이 스터디 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 그게 누군데요?!”

    내 말에 지훈도 후다닥 들어오며 외쳤다.

    “누, 누구? 누구 있어요? 번역자 찾았어요?”

    “아… 저희 원어민 교수님이요. 한국계 혼혈인 피터 한이라고….”

    “형! 피터 한! 저 알아요. 이번에 번역자 알아보면서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 번역자 다 찾아봤거든요. 피터 한, 문학 번역으로 유명해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있었다고?

    “야,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아, 그게… 그쪽한테 일단 슬쩍 운은 띄웠거든요. 형 이름 안 밝히고, 혹시 번역 받아 주시냐고. 그랬는데… 거절당했어요.”

    금홍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글을 번역하고 싶진 않다나요. 그리고 당분간 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지훈이 슬쩍 눈치를 봤다.

    보아하니 저것도 꽤 순화한 모양인데.

    “샘, 그 교수님 어때요?”

    나는 금홍에게 물었다.

    금홍은 말을 좀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훌륭한 분이시긴 해요. 문학 번역계에서도 유명하고. 사실 이 학교도 안 오려고 하셨는데 대한외대에서 돈 엄청 드리고 모셔 왔단 소리가 있어요. 학생들과 면담도 일절 없고, 개인적인 대화도 안 하세요. 그런데 수업은 정말 좋아요. 원어민만 알 수 있는 현지의 언어를 정확한 쓰임새와 용법에 맞게 알려 주시거든요.”

    번역 능력이 탁월하고.

    “성격은요?”

    “음… 다른 것보다, 마음에 드는 글만 번역을 해 주시기로 유명해요. 대형 출판사를 통해서 받는 건 거의 안 하시고요, 본인이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작가의 글만 개인적으로 받아서 번역을 하세요.”

    줏대도 있고.

    “학교에서 어떤 파벌 안에 드신 것도 없고요?”

    “네. 그런 거 혐오하시는 거로 유명해요. 미국에서도 학교 파벌 거부하고 퇴직한 걸 대한외대에서 붙잡은 걸로 알거든요. 뭐… 소문이긴 하지만 교수님들 회의에도 안 나오신대요. 학교 행정은 알아서들 하시라는 거죠.”

    정치질에도 관심이 없다니.

    …완벽하다.

    “아, 그런데 그 교수님… 순문학만 번역하세요. 장르 문학은 애초에 상대를 안 하신다고 해야 하나.”

    …그건 부딪쳐 봐야 할 문제고.

    “지훈아.”

    “네.”

    “유니콘 찾았다.”

    “헐. 진심이에요?”

    지훈이 되물었다.

    금홍은 무슨 소리를 하나 하는 얼굴이었다.

    “금홍 샘. 그 교수님 지금 계세요?”

    “아… 네. 항상 연구실에 계시긴 해요. 설마 가 보시게요? 안 받아 주실 텐데.”

    “외부인을 굳이 받아 줄 필욘 없죠. 하지만 학생이라면 얘기가 다르잖아요. 학생은 교수가 연구실에 있는 이상 만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까.”

    나는 금홍을 보고 씩 웃었다.

    금홍은 적잖이 당황했다.

    “저, 저도 가요?”

    “당연하죠. 초벌 번역자를 두고 어딜 가요.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지금부터 피터 한 교수님 연구실로 갑시다.”

    나는 재빠르게 짐을 챙겼다.

    번역자를 찾는 일.

    원고를 투고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

    이미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 봤다.

    남은 건 이 방법뿐.

    되든 안 되든 부딪쳐 보는 거다.

    “지훈아, 짐 챙겨라.”

    “옙.”

    우리는 후다닥 가방을 쌌다.

    그리고 금홍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 어어…?”

    금홍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이내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모르겠다. 따라와요, 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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