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02화 (102/204)
  • 102화

    주말 저녁.

    지훈과 나는 금홍이 일하는 카페로 갔다.

    아르바이트를 끝낸 금홍이 자리로 왔다.

    ‘팀 이상’의 재회였다.

    “이렇게 일적으로 모인 것도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맨날 톡으로만 번역본 드렸는데.”

    “갑자기 금홍샘이랑 일 얘기 하려니까 좀 어색하기도 하고?”

    지훈이 낄낄거렸다.

    우리 모두 <그 집>의 초고를 들고 왔다.

    두 사람 다 얼마나 봤는지 종이가 너덜너덜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자, 일은 간단해요. 우리의 목적은 글의 의도에 맞는 초벌 번역을 만드는 것.”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위해서는… 금홍샘이 제 소설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야 가능하겠죠. 저는 글의 의도를 말할 테고, 지훈이는 그 의도가 글에 제대로 표현이 되었는지, 또 어떤 의미가 더 생성되었는지 파악할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금홍은 펜을 들었다.

    그녀는 우리의 말을 듣고, 번역의 길을 잡을 것이다.

    다음 번역자가 길을 헤매지 않을 수도 있도록.

    물론… ‘다음 번역자’의 존재가 아직 미지수지만.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내 말에 금홍과 지훈이 펜을 들었다.

    “1장부터 들어갑시다. 한 소녀가 입양되는 장면. ‘수지는 그 집을 올려다보았다. 지붕에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갔다. 검은 새였다. 수지는 꿈에서 새를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검은 새 떼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쪼아 댔다. 부모님이 괴한에게 살해당했단 사실을 알았던 날의 꿈이었다.’”

    “이 부분에 들어가야 할 긴장과 불안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차원이겠죠?”

    “어. 맞아. 그래서 이 부분은 불안한 느낌은 주되, 서술 자체는 안정적으로 해 준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겠지?

    난 슬쩍 금홍을 봤다.

    금홍은 벌써 첫 단락의 몇 단어를 체크했다.

    “어떤 단어를 체크한 거예요?”

    “안정적인 서술 사이에서 불안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단어요. ‘검은 새’가 그 예인데… 이대로 번역을 맡기면 ‘까마귀’라고 번역할 확률이 있어요. 명사를 쓰는 것보단 그 색채를 강조하는 게 분위기가 사니까, 여기서는 Black Bird를 유지하라고 체크한 거죠.”

    “오오… 그렇구나.”

    지훈이 감탄했다.

    “감탄할 것도 없어요. 기본 중에 기본이에요.”

    느낌이 좋다.

    착착 진행이 될 수 있겠는데?

    “…다음 문단. ‘“어서 와라!”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푸드덕! 새가 날아갔다. 수지는 임시 보호사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집에서 나온 키가 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굉장히 빠르고 일관된 속도로. 안경, 약간 벗겨진 머리, 촌스럽지만 깔끔한 옷, 약간 비뚤어진 어깨. 저 사람이 내 새아빠인가? 흠칫하고 수지는 놀랐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자신. 어떻게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죽은 아빠를 두고. 수지는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안심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지의 친부모는 매우 가난했고, 어떻게 보면 이 입양은 그녀에게 행운이었다.’”

    “아, 전 이 부분 좋아요. 얘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보여 주면서… 솔직한 감상을 내놓잖아요. 새아빠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하면서 이 서술의 주도권을 확 잡아 버려요, 이 여자애.”

    “중요한 건 얘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잘 보여 줘야 한다는 점이야. 대단히 많은 심리가 복합적으로 드러나거든. 긴장과 만족감,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안도감까지. 그런데 이 저변에 숨어있는 감정이 하나 있어. 뭔지 알겠어?”

    “공포감이죠.”

    “맞아. 수지는 자신이 공포를 느낀다는 걸 몰라. 하지만 서술을 따라가면 무의식적으로 공포를 느끼는 상황이라는 걸 알 수 있지. 바로, 새 아빠가 다가오는 장면이야.”

    “그 집에서 나온 키가 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굉장히 빠르고 일관된 속도로. 여기 말이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지훈은 보는 눈이 밝다.

    “상상해 봤어요. 아이의 시선에서 커다란 어른이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빠른 것도 빠른 거지만, 그 속도가 일관된다면….”

    “경험해 보지 못한 기이한 압도감이 느껴질 거야. 그리고 이 일관된 속도. 비인간적인 속도가 이 집안의 엄격한 규율을 암시하는 부분이기도 해.”

    우리가 말을 하면 할수록.

    금홍의 노트가 빼곡하게 채워져 갔다.

    “자, 그럼 다음 장면. ‘“너구나. 긴장하고 있는 이 녀석.” 남자는 장난스레 수지에게 말을 걸었다. 수지는 보호사의 뒤로 숨고 싶었다. 그러나 부끄러워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열두 살이었다. 부끄러워하는 열두 살. 별로 호감 가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수지입니다.” 수지의 인사에 남자가 멈칫하더니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안녕, 수지. 저 집으로 아빠와 함께 들어가자.”’”

    “와~ 소리로 들으니까 더 좋은데요? 금홍 샘, 긴장감 느껴져요?”

    “…엄청요.”

    금홍이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한 문장 한 문장에 포인트가 다 들어있어요. 초벌 번역을 할 때, 다 체크해서 넘길 거예요. 하나도 빼먹지 못하게.”

    “부탁드려요. 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자면… 여기서 가장 큰 긴장감을 주는 포인트는 남자의 태도 변화예요. 부끄러워하는 아이인 줄 알았을 때는 마치 한 마리 강아지를 대하듯 하죠. 하지만 이 수지란 아이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금방 눈치채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소개를 하잖아요. 나는 이 집안에 적응할 의사가 있다. 이걸 밝힌 거나 마찬가지인 부분이에요. 수지의 입장에선 생존을 위해서 한 인사겠지만. 그때 이 남자는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춰요. 그리고 자신을 ‘아빠’라고 칭하죠. 받아들인 거예요. 합격한 거죠. 이 가족의 일원으로.”

    “형, 합격했다는 표현 좀 좋은 것 같아요. 생물학적 가족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거지만, 입양을 한다는 건 어떤 심사를 거친다는 뜻이잖아요. 입양을 받을 가족들의 기준으로, 입양을 올 아이를 판단하는 거죠. 저는 이 장면 그래서 굉장히 중요하게 봤어요. 난 널 가족으로 인정해. 결국 이 말인데… 되게 이상하잖아요. 가족으로 인정하는 게 어딨어요. 가족은 그냥 가족이지. 그걸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권력 관계를 나타내는 거니까.”

    ‘팀 이상’ 회의는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물론 <그 집>의 모든 부분에 이렇게 긴 회의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발단 부분을 지나 전개 부분으로 넘어갔을 땐.

    문장 안에 숨의 의미보단 이야기가 중심이 됐으니까.

    수지라는 소녀가 집안에서 행하는 실험들.

    그 실험에 반응하는 가족의 표정과 행동.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중요했다.

    ‘팀 이상’의 작업이 그렇게 무르익어 갈 때였다.

    “저기, 금홍아.”

    카페의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금홍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문 닫을 시간인데….”

    “벌써?”

    금홍이 시계를 봤다.

    아홉 시 오십 분.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그러게요. 언제 열 시가 됐대? 형,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남은 원고의 분량을 봤다.

    딱 반을 진행했다.

    “그래요. 남은 건 다음에 이어서 하죠. 금홍 선생님은 바로 초벌 번역 진행해 주세요.”

    “맡겨 주세요.”

    금홍이 씩 웃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원고는 붉은 글씨가 가득했다.

    오랜만에 진행한 ‘팀 이상’의 회의.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초벌 번역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역시… 다음 번역자다.

    * * *

    금홍은 고민이 많았다.

    자신이 초벌 번역을 하는 건 괜찮았다.

    밤을 새워도 재밌는 게 번역이었다.

    문제는… 이 초벌 번역을 넘겨 줄 사람이었다.

    금홍은 오늘 아침에도 지훈에게 톡을 했다.

    ― 아직 못 구했죠? 번역자.

    ― ㅠㅠㅠㅠㅠ… 샘이 그냥 해 주시면 안 돼요?

    ― 제가 할 수 있으면 했죠ㅠㅠ

    ― 학교에는 없을까요? 학생이라도….

    ― 통역 쪽에는 미국 친구들이 있긴 한데 문학은 잘 모를 거예요.

    ― 일 났네, 진짜ㅠ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긴 해요. 금홍 샘도 좀 알아봐 주세요.

    ― 네ㅠㅠㅠ

    “휴우… 특강이나 가야겠다.”

    통번역 대학원은 공부량이 많았다.

    매 방학마다 특강이 열릴 정도로….

    금홍은 짐을 챙겨 기숙사를 나섰다.

    그래도 걱정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건 책임감일까 죄책감일까….’

    왠지 자신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 같은 기분.

    이상에게 처음으로 번역자 얘기를 꺼냈을 때.

    그가 미국으로 보낼 원고를 준비하는 줄도 몰랐다.

    언젠가 영미권 시장을 노리겠거니 해서 한 말인데.

    바로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확 그냥 내가 해버려…? 아니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게다가 공모전 투고 원고… 무조건 원어민이 해야 해.’

    “이금홍!”

    누군가가 뒤에서 금홍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김서한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서한 오빠.”

    “수업 가냐? 같이 가자.”

    “그래….”

    “왜 그렇게 죽상이야?”

    “아냐….”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이상이 공모전에 글을 내는 건 비밀이니까.

    ‘서한 오빠는 거의 원어민이니 부탁을… 아냐, 오빠는 문학 번역 경험이 너무 적어. 혜경 샘 글도 별로 취향이 아니라 했고.’

    두 사람은 대학원 건물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금홍의 머릿속엔 온통 번역자 문제밖에 없었다.

    ‘…혹시 모르니 슬쩍 물어볼까?’

    “저기, 오빠.”

    “어?”

    “혹시 주변에… 한국에 사는 미국인이지만, 문학 번역에 능틍하고 또… 소통도 잘 될 만한 사람이 있을까? 입도 무겁고.”

    서한이 금홍을 빤히 봤다.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눈으로.

    금홍은 자기가 말해 놓고도 민망스러웠다.

    “없겠지? 하하….”

    “저기 가네.”

    “어?”

    “네가 찾는 사람, 저기 가잖아.”

    서한이 턱짓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삼십 대 초반의 미국인.

    한국계 혼혈이지만 백인과 다를 바 없는 얼굴.

    말 한마디 붙이기 힘든 대단히 날카로운 인상.

    한 손에 든 <고급 번역론> 책.

    “오빠, 저 사람은….”

    금홍이 기가 막혀서 말했다.

    “우리 교수님이잖아.”

    그의 이름은 피터 한.

    지금 그들이 들어가는 특강의 교수였다.

    서한은 ‘그게 뭐 어때서?’란 표정이었다.

    “네 말대로 아냐? 한국 사는 미국인. 문학 번역 전문가. 한국말도 잘하고. 성격이 글러 먹어서 주위에 사람도 없을 테니 입도 자연히 무거울 테고. 안 그래?”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저 교수님은 성격이 너무 더럽잖아.

    라고, 금홍은 말하려다가 말았다.

    저만한 적임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뭐 해? 들어가야지.”

    “아, 어.”

    두 사람이 강의실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마침 피터 교수가 물병을 들고 강의실을 휙 나섰다.

    ‘기회다!’

    금홍이 얼른 가서 말을 붙였다.

    “저기, 교수님.”

    그러나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쌩 가 버렸다.

    수업 시간 외 대화 금지.

    그게 그의 원칙이기 때문이었다.

    서한이 불쌍하단 눈으로 금홍을 바라보았다.

    금홍은 얼굴이 빨개져선 속으로 투덜거렸다.

    ‘으으… 맞아. 이런 인간이었지.’

    * * *

    ‘팀 이상’의 회의.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번역도 번역이지만, 최종 퇴고를 앞두고 내용 점검을 하기에 딱이다.

    그렇게 작업실에서 <그 집>을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뒤에 앉아 있던 지훈이 나를 불렀다.

    “형.”

    “왜?”

    “방송 출연 하실래요?”

    “아니.”

    “독일 방송인데.”

    “안 해.”

    “원격으로 하는 화상 토론.”

    “괜찮아.”

    “하고 싶으실 텐데.”

    “안 하고 싶을걸.”

    “토론 주제가 ‘예술의 쓸모’래요.”

    …구미가 당긴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지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리 오라 손짓했다.

    의자를 슥 밀어 그쪽으로 갔다.

    “뮌 출판사에서 메일이 왔거든요. D―TV라는 국영 방송에서 하는 교양 프로래요. 이름이 ‘철학 스터디’인데, 이름 한번 촌스럽죠?”

    “오래된 방송인가 봐?”

    “오, 맞았어요. TV가 보급됐을 때부터 있던 방송이라던데요?”

    역시 독일인들. 대단하다.

    철학을 가지고 방송을 만드는 걸로도 모자라, 수십 년을 유지시키다니.

    “아무튼 철학자들이 나와서 대담을 하는 건데, 가끔 문학을 주제로도 한 대요.”

    “흠.”

    독일이고, 철학이라면… <내외인>보다는,

    “<등>을 가지고 얘길 하자는 거구나?”

    “맞아요. 그런데 약간 특이한 점이 있어요.”

    “뭔데?”

    “뮌에서 말하길, 원래 이 프로는 제작진이 직접 작가와 철학자를 섭외하는데… 이번에는 특이하게 섭외한 철학자가 제작진에게 직접 연락을 해서 <등>으로 토론을 하고 싶다고 했대요.”

    “뭐? 누군데?”

    누구기에 직접 날 ‘지목’한 거지?

    “틸 버켈이래요. 저도 잘 모르는 사람이긴 한데… 검색 한번 해 볼까요?”

    지훈은 검색창에 ‘틸 버켈’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뜨는 단어.

    “예술… 무용론자…?”

    혹은.

    “…예술혐오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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