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00화 (100/204)
  • 100화

    금홍에게로 가는 길.

    대한외대는 오피스텔에서 가깝진 않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쭉 달리면… 그 근처까진 갈 수 있다.

    바람이 좀 불긴 해도, 나는 자전거를 몰았다.

    정리할 생각도 좀 있고.

    제일 먼저 든 생각.

    금홍이 날 왜 보자고 했을까.

    그리고 두 번째 든 생각.

    금홍에게 번역에 대해 전할 말이 있다.

    <그 집>의 번역을 위해….

    금홍이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으니까.

    끼익―

    자전거를 멈췄다.

    천변 벤치에 금홍이 앉아 있었다.

    하나로 묶은 머리.

    롱패딩 차림.

    화장기 없는 얼굴.

    ‘대학원생’ 그 자체의 모습이지만, 싫지 않았다.

    “금홍 선생님!”

    “어? 혜경 샘! 빨리 오셨네요?”

    난 손을 흔드는 금홍의 곁에 앉았다.

    “추운데 왜 나와 계셨어요. 도착하면 연락 드린다니까.”

    우리가 만나려던 곳은 이 천변 위쪽의 카페다.

    “바람 좀 쐬려고요. 요새 너무 틀어박혀 있었더니 좀이 쑤셔요.”

    하고 환하게 웃는다.

    “…공부는 잘 되어 가요?”

    “힘들죠. 그래도 문창과 처음 들어갔을 때보다 더 재밌는 것 같아요.”

    처음 금홍을 봤을 때가 생각났다.

    어딘가 예민하고 불안해하던 표정.

    그런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훨씬 생기가 돌았다.

    “아, 갑자기 보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금홍이 내게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사실 북콘서트 가고 싶었거든요. 통번역과는 세미나가 정말 많은데… 28일에 있는 연말 세미나는 중요한 발표회도 겸하거든요. 그래도 그냥 빠지고 가려고 했는데….”

    했는데?

    “교수님이 발표를 시켜 주셨어요. 그런 기회, 타 학교 출신한테는 오기 힘든 거라서요. 그래서 제가 선택했어요. 세미나에 가기로.”

    금홍은 조금 미안해하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난 괜찮았다. 정말로.

    내가 금홍이어도 그렇게 했을 거니까.

    “발표는 잘 했어요?”

    “저, 3등 했어요. 아슬아슬하게 순위권.”

    “정말요? 진짜 대박이네? 다들 쟁쟁했을 텐데. 발표 주제가 뭐였는데요?”

    “사실 저보다 베테랑들은 많아요. 영어 잘하는 사람은 셀 수도 없고. 그래도 저는 문창과를 나왔잖아요. 번역자 입장에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 그것을 영문 어휘로 옮기는 것. 그 위주로 공부해서 발표했어요.”

    영어 실력이야 시간이 지나면 늘기 마련이다.

    최후의 수단으로 유학이란 방법도 있고.

    하지만 ‘문학’을 보는 눈을 쉽게 기르기 어렵다.

    문창과를 나온 경력을 썩히지 않았다니.

    과연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무튼 북콘서트 못 가서 미안하다 사과도 하고, 자랑도 하고 싶어서요. 아, 쇼핑백 안에 든 건 캔들이에요. 연말 선물이랄까.”

    “…고마워요. 해 드린 것도 없는데.”

    “없긴요. 매번 일 주시잖아요. 정말 도움이 많이 돼요.”

    금홍은 내 눈치를 보더니 슬쩍 물었다.

    “새로운 번역자… 알아보셨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다.

    “금홍 샘.”

    “네.”

    “지금 방학 중이시죠?”

    “네.”

    “그럼 지금부터 스릴러 문학 공부하셔야 할 것 같아요.”

    “…네?”

    “다음 작품, 스릴러예요. 그리고 바로 미국 시장으로 내보일 생각이고요.”

    금홍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 하지만 말씀드렸던 것처럼….”

    “구할 거예요. 새로운 번역자.”

    “그럼….”

    “금홍 샘이 초벌 번역을 해 주세요.”

    초벌 번역.

    본 번역에 들어가기 전에 중요 포인트를 미리 잡아 놓는 일을 뜻했다.

    히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 하지만… 저라면 어떻게든 기존 번역자를 활용할 것 같긴 합니다. 본격적인 번역에 들어가기에 앞서 글의 포인트를 잡아 달라든가 하는 방법으로요.

    그 말은 꽤 일리가 있다.

    번역의 ‘포인트’를 잡는 것.

    즉, 내 글이 번역될 것을 염두하고 문장을 분석하는 것.

    금홍만큼 그 일에 익숙한 사람은 없지.

    그녀는 지금까지 내 모든 글을 번역해 왔으니.

    그리고 <그 집>을 미국 시장에 보내기 위해선… 반드시 그 작업이 필요하다.

    “원고는 한 달 안에 나와요. 부담스러우시면 굳이 안 하셔도 괜찮고요. 해 주셨으면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무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금홍에게 있어서 지금은 중요한 시기다.

    세미나 발표에서 3등을 했다고?

    그럼 이제 수많은 세미나의 초청을 받을 거다.

    번역계에 이름을 알리는 정석적인 루트.

    그런데 만약 <그 집>의 번역을 함께한다면?

    …방학은 그냥 날아갈 거다.

    아무 준비 없이 다음 학기를 맞이하는 일.

    당연히 부담스럽겠지.

    그러니까 이건….

    “금홍 샘의 선택이에요.”

    금홍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조금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기다려 줄 여유는 없다.

    하지만, 금홍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어? 12시 지났어요.”

    스치듯 휴대폰 시계를 본 금홍이 말했다.

    정말이었다.

    이렇게 찬 바람을 맞으며 떠드는 동안… 새해가 시작되어 버렸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금홍과 내 휴대폰이 난리가 났다.

    “난리 났네요. 새해 문자들인가 봐요.”

    “그러게요.”

    하지만 우리는 굳이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금홍 샘.”

    “…혜경 샘도요. 올해도 잘 부탁해요.”

    * * *

    새해라고 해서 달라질 건 크게 없다.

    내 일상은 비슷비슷하게 흘러간다.

    뭘 쓰는지가 달라질 뿐.

    아침 운동을 끝낸 후.

    혜경의 부모님에게 간단한 안부 전화를 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이야… <그 집>의 집필이지.

    커튼을 치고, 어두운 분위기에서 쓰는 스릴러 소설.

    등 뒤에서 누가 날 내려다본다는 그 기분으로.

    긴장되고, 흥미롭게.

    그렇게 글을 쓰고 있을 때였다.

    띵동― 띵동―

    아, 지훈이 온 것 같다.

    오늘 우리는 ‘전략 회의’를 하기로 했다.

    새해 첫날이라 안 와도 된다고 했는데도, 지훈은 극구 오겠다고 했다.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지친 얼굴의 지훈이 있었다.

    그런데 녀석이 뭘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오늘은 쉬어도 된다니까. 뭘 그렇게 싸 왔어?”

    지훈은 말도 말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본가 다녀오는 길이에요. 그 잔소리 듣느니 일하는 게 낫죠.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아.”

    나는 큭큭 웃었다.

    명절 잔소리를 피해서 온 거구만.

    지훈은 들고 온 꾸러미를 식탁에 올려 두었다.

    “엄마가 형 갖다 주라고 싸 줬어요. 혼자 있는다니까 불쌍하다고.”

    음… 불쌍해보이는 건 지훈이지만, 어쨌든.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같이 먹자.”

    “전 괜찮아요. 엄마 성화 때문에 배터지게 먹고 왔으니까.”

    지훈이 질색팔색하며 손을 저었다.

    꾸러미 안엔 온갖 음식이 다 있었다.

    갈비찜 하며, 잡채 하며….

    명절에 별 감흥이 없는 성격이지만, 이런 건 좀 감동이다.

    “그나저나 집 놔두고 형도 참 고생이네요.”

    “아직도 집 앞에 기자들 기다려?”

    “네. 아무튼 지독하다니까요. 그래서 저도 잘 안 나다녀요. 어? 지금 스릴러 쓰고 있는 거예요?”

    지훈이 노트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응. 중반부 들어갔지.”

    “제목이 뭐예요?”

    “<그 집>.”

    “음… 느낌 있네요. 그나저나 전 형이 장르 문학 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안 그래도 고민이 많아.”

    “무슨 고민이요?”

    “저번에 문득 생각이 든 건데, 내 이름값이 <그 집>의 평가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렇죠? 국내외 막론하고. ‘이상’이 썼다고 하면 좀 다르게 보겠죠.”

    “장르 문학은 필드가 다르고, 따지고 보면 난 신인인데… 이름값이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그런 식의 이름값은 대부분 나쁘게 작용하지.

    “아… 그것도 그렇네요. 필명을 써도 금방 들킬 것 같고.”

    지훈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는 듯 심각해졌다.

    나는 지훈의 등을 툭 쳤다.

    “일단, 일부터 하자.”

    “아, 네. 좋아요. 일할 건 잔뜩이니까.”

    지훈과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일단, 형이 장르 문학을 내 볼 미국 출판사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그걸 알아보는 과정에서… 미국의 몇몇 출판사들에서 연락이 왔어요. 유로문학상 때문이겠죠.”

    “책을 내겠다고?”

    “맞아요. 어휴, 그런데 이게 좀 복잡해서… 제가 간략하게 피피티로 만들어 왔으니 같이 봐요.”

    지훈이 노트북을 열어 피피티를 켰다.

    먼저 첫 번째 챕터.

    <다시 사는 날>의 표지와 두 칸으로 나누어진 표.

    “<다시 사는 날>, 에세이죠. 이 표의 왼쪽은 <다시 사는 날>을 내면 좋을… 그러니까 에세이로 유명한 출판사들이에요. 오른쪽은 <다시 사는 날>을 내겠다고 연락이 온 곳이고요.”

    “겹치는 곳은 없어?”

    “있죠. 보세요.”

    지훈이 마우스를 한 번 클릭했다.

    그러자 몇 개의 출판사의 이름이 파란색으로 변했다.

    “이 출판사들이 교집합이에요. 지금 두 곳이 있죠.”

    마우스를 또 한 번 클릭.

    두 출판사의 장단점이 주욱 나열되어 있었다.

    “읽어 보시고 선택하시면 될 것 같아요.”

    “준비 많이 했네. 일단 알았어. 너 가고 내가 생각 좀 해 볼게.”

    “좋아요. 그럼 다음을 좀 볼게요.”

    <내외인>과 <등>의 경우도 비슷하게 진행됐다.

    언제 이렇게 연락들이 와 있었지?

    하나하나 정리를 해 놓은 송지훈도 대단하다.

    “이번에는 스릴러 전문 출판사예요.”

    수십 개의 출판사 리스트가 쫙 떴다.

    “미국은 스릴러가 인기가 좋아서 출판사도 굉장히 많아요. 사실 어딜 선택해야 할지 전 잘 모르겠어요.”

    “일단 1위부터 10위까지만 보자. 그 아래는 웬만하면 보지 말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 출판사 별 대표적인 특징 같은 거 좀 정리해 뒀으니 한번 보세요.”

    나는 피피티를 휙휙 넘겼다.

    챕터가 끝도 없다.

    나라가 커서 그런지 출판사들도 참 각양각색이다.

    돈이 많은 출판사.

    신인을 잘 밀어주는 출판사.

    책에 삽화를 싣는 출판사.

    미국 남부에만 책을 납품하는 출판사.

    반대로 북부에만 책을 납품하는 출판사.

    매월 잘 나가는 작가의 순위를 매기는 출판사.

    SNS 홍보를 잘하는 출판사.

    공모전으로 유명한 출판… 사?

    공모전?

    “지훈아, 이 ‘공모전’이라는 게 뭐야?”

    지훈이 피피티를 슥 보더니 말했다.

    “아, 여기 좀 웃긴 출판사예요. ‘누들’이라는 곳인데, 장르 판에서는 십오 위 정도 되는?”

    십오 위라.

    그리 큰 곳은 아니지만… 미국 시장의 규모를 생각하면 작다고 할 수도 없지.

    그나저나.

    “뭐가 웃기다는 거야?”

    “공모전으로만 운영되는 출판사거든요. 한 해에 두 번 공모전을 열고 장르 당 다섯 명 정도의 당선인을 내요. 그 사람들의 책만 내는 거죠. ‘누들’에서 책을 내려면 무조건 공모전을 통과해야 해요. 기성이고 뭐고 얄짤 없이. 무기명 원고라서 실력으로 정면 승부 해야 하고요. 그래서 특이한 신인들이 많이 등장해요. 공포물 쓰는 할머니라든가, 로맨스 판타지 쓰는 트럭 운전기사라든가.”

    …그래?

    이 ‘누들’의 운영 방식, 마음에 들었다.

    공모전이란 일종의 기회의 평등.

    이름값 없이 그 평등한 기회를 통과하면… ‘장르 소설을 쓰는 이상’에게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지훈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비추예요. 대중적으로 잘 팔린다기보단 코어 팬층이 좋은 출판사거든요. 훨씬 더 큰 데로 갈 수 있으니, 그냥 이런 곳이 있다는 것만 알아 두시고….”

    “공모전 일정은?”

    “네?”

    “공모전 일정은 어떻게 되는데?”

    “에… 잠시만요.”

    지훈은 휴대폰으로 뭔갈 검색했다.

    “3월 초네요.”

    앞으로 약 두 달.

    충분하다.

    집필에 한 달, 번역에 한 달.

    나는 씨익 미소지었다.

    “왜 웃어요? 형… 설마?”

    “누들에 <그 집>을 보내야겠어.”

    “엑? 왜요? 더 좋은 곳이 열네 개나 있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최선이야. 이름값을 지우려면 확실하게 지워야지.”

    “하지만… 그럼 손 볼 일이 많아져요. 형은 이제 이름이 알려진 기성 작가니, 모든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할 거고… 또….”

    지훈이 조심스레 말했다.

    “…번역을 정말 잘해야 해요. 공모전이잖아요.”

    아차 싶었다.

    ‘공모전’에 원고를 낸다는 건… 영어가 원어민인 작가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게 ‘누들’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지훈아, 번역가부터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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