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95화 (95/204)

95화

한국대 인문대 대강당.

오늘 강연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평소 내 강연은 사람은 많아도 산만하진 않다.

다들 ‘문학 공부’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니.

하지만 유로문학상 노미네이트 때문일까.

내 특강보다 나 자체에게 관심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궁금한 거야 뻔하다.

유로문학상에 노미네이트 된 소감.

유로문학상 수상 가능성에 대한 의견.

단언컨대, 지금 이 수업에 기자가 숨어 있을 거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간 피곤한 기사가 나겠지.

유명세라는 단어가 있다.

이름을 알렸을 때 치러야 할 세금.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될 난감한 상황.

나는 요즘 그런 걸 부쩍 느끼는 중이다.

아마… 유로문학상 결과가 나올 때까진 이럴 것 같다.

특강이 마무리될 때 즈음.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질문 세례를 쏟아부을 기세.

유명세를 벗어날 방법?

하나뿐이다.

최대한 피해 보는 것.

“오늘은 질의응답을 받지 않겠습니다. 수업에 관련한 질문은 메일을 통해 받을 테니, 그쪽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단상을 내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사람이 객석에서 튀어나왔다.

얼른 단상 뒤 비상구로 들어와 버렸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후우….”

다행이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

조교들이 잘 막아 준 거겠지.

바쁜 걸음으로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한 남자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저기….”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입은 옷, 말투, 인상까지.

기자구나.

“죄송해요. 인터뷰는 어려워요.”

“저기, 저 기억 안 나세요?”

그 말에 난 멈칫했다.

어딘가 수더분하고 어리숙한 인상의 남자.

…익숙하긴 한데.

아, 기억났다.

“그때 그 기자죠? 여기서 만났던.”

내가 대한문학상 예선 탈락을 했을 때.

이 기자가 바로 여기서 날 기다렸다.

내게 일어난 일에 나보다 더 씩씩대던 젊은 기자.

그 모습이 고마워서 짧은 인터뷰를 했지.

그때, 이렇게 말했던가.

― 제 작품의 가치는 제 스스로 증명하겠습니다.

그 증명을 어느 정도 해내서일까.

다시 보니 반가운걸.

“오랜만이네요. 그때 기사 잘 써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해서 인터뷰는 다음에 할게요.”

“하,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를 지나쳐 얼른 차 쪽으로 갔다.

하지만 그도 기자는 기자.

바쁜 걸음으로 날 따라왔다.

“이번 이상 작가님의 유로문학상 노미네이트는 한국 예술계에 경각심을 줄 수 있는 사건 같은데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외의 질문을 던지는군.

한국 예술계에 대한 경각심이라.

수상 여부나 소감이 아닌, 거시적 의미를 묻다니.

당돌하기도 하고.

“자, 작가님! 작가님, 죄송하지만 대답 좀….”

나는 계속 걸어가고, 그는 계속 따라왔다.

앞을 막아 볼 만도 한데, 차마 그러진 못하는 듯했다.

그때도 느꼈던 거지만 좀 어설픈 데가 있다, 이 기자.

나는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날 따라오느라 숨을 헉헉대는 기자.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경각심이라… 잘 모르겠는데요.”

“….”

“작가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별 볼 일 없어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정치를 해야죠.”

그리고 그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기자님 같은 기자가 되든가요.”

“…하지만.”

“다만 작가는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긴 하죠. 작품 안에서 독자의 꿈을 이뤄 주니까.”

“….”

“제가 상을 받아서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생기고, 그게 독자분들이 꿈꾸시는 일이라면… 그 꿈을 이뤄 드리고 싶긴 합니다.”

난 거기까지만 말하고 차에 올라탔다.

막 시동을 켜려고 하는데, 기자가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저기, 작가님!”

나는 또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그를 봤다.

그가 잠시 주저하더니 내게 말했다.

“작가님은 참… 긴장감 있는 삶을 사시는 것 같아요.”

“…제가요?”

“네. 아, 그게 나쁘단 말은 절대 아니고요. 스릴을 즐기시는 것 같아서요. 본받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처음 뵀을 때부터.”

“…감사합니다. 또 보죠.”

“예, 들어가세요. 인터뷰 감사합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차창을 올리고 주차장을 나섰다.

“…스릴이라.”

어쩐지 기자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난 여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성공에 대한 욕망이나 문학에 대한 욕망.

그 가득 찬 욕망이 바로 긴장과 스릴의 본질이다.

욕망하는 것을 이루는 과정의 아슬아슬함.

거기에서 스릴이 탄생하는 거니까.

기자의 말이 맞다.

새로운 삶을 얻은 후.

그 스릴마저도 즐기게 되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릴’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 보자고.

아슬아슬하고 긴장감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고.

이를테면, 스릴러 소설 같은.

“흠….”

하지만 확신은 들지 않았다.

스릴러는 장르 소설이 아닌가.

나도 혜경도, 장르 소설엔 문외한이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끼이익―

나는 도서관 쪽으로 차를 돌렸다.

길게 생각할 것 없다.

고민이 될 때는 부딪쳐 봐야지.

* * *

가라사대 본사.

“서, 선생님들께서 여긴 어떻게…?”

가라사대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문단에서 내로라하는 원로들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사전 약속도, 언질도 없는 방문.

그들은 씩씩대며 외쳤다.

“이승호 편집장 어딨어?!”

“펴, 편집장님은… 복도 끝 사무실에….”

한 직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이 움직였다.

긴 복도를 지나, 편집장실로 향하는 이들.

“저분들이 한꺼번에 무슨 일이시지…?”

직원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른 직원이 팔꿈치로 그를 쿡 찔렀다.

“보면 몰라? 다들 대한문학상 관계자들이잖아.”

그 시각.

똑똑! 벌컥!

편집장실 문이 열렸다.

가라사대 편집장 이승호는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니, 선생님들께서 여긴 왜 갑자기….”

“이승호 편집장. 얘기 좀 합시다.”

한 남자가 따지고 들었다.

그는 대한문학상 총책임자이자 문학계 원로였다.

“아, 예… 일단 좀 앉으시죠.”

“앉을 것도 없어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긴 합니까?!”

그의 고함에 이승호 편집장이 움찔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늙은이가 지금 어디서 소릴 질러?’

“대체 무슨 일인지 말씀들을 하셔야지요! 갑자기 이렇게 쳐들어와서 이게 무슨 경웁니까?!”

또 다른 원로 작가가 한심하단 얼굴로 나섰다.

“이승호 편집장. 지금 대한문학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말 모르십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후우… 이번 주에 대한문학상 본심에 오른 작가들 중 두 명이나 더 심사를 포기했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라니요?!”

한 원로시인이 나섰다.

그녀는 오랫동안 대한문학상 시 부문을 맡아 온 심사위원이었다.

“그들이 왜 심사를 포기했겠습니까. 가라사대가 압력을 넣어 예심에서 특정 작가를 떨어뜨리고, 그 작가가 해외에서 문학상을 탈 지경에 이르렀으니… 대한문학상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져서 아예 안 받고 말겠다 시위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이승호 편집위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껏 가라사대가 대한문학상 심사위원에게 은근한 회유와 압력을 넣어 온 건 기정사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입 밖에 낸 적은 없다.

대형 출판사와 척을 지는 것만큼 곤란한 일도 없으니.

한 마디로, 갈 데까지 간 상황.

총책임자가 앞으로 나섰다.

“책임지세요. 어떻게든.”

“하지도 않은 일을 뭘 책임을 지란 겁니까?”

“…우리,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맙시다.”

“….”

“솔직해지자고요. 벌써 본심에 오른 작가 중에 다섯 명이나 심사를 포기했어요. 오늘 나온 두 명까지 받아 주면… 올해 대한문학상 아예 못 열립니다.”

이승호 편집장이 움찔했다.

심사에 압박을 주는 건 매년 해 왔던 일이었다.

그 대상은 가라사대의 청탁을 거절하거나, 눈 밖에 난 작가들.

하지만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었는데….

“대한문학상이 취소되면, 그 원성이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 일이 그렇게 되면 저희가 가라사대를 감싸 줄 수 있을 같습니까?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그쯤 되니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이상이 예심 탈락 문제를 걸고넘어지는 게 나았다.

그럼 쌍방의 과실로 논점을 흐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상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유감 표시도, 문제 제기도.

그 와중에 이렇게 전세가 역전됐으니, 그가 더 빛나 보이기 마련.

‘그놈의 유로문학상 때문에…!’

이승호 편집장은 이 방면에 머리가 트인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에 답은 하나였다.

유로문학상을 덮는 이슈를 만드는 것.

심사를 포기하려는 작가들에게 더 큰 보상을 주는 것.

그리고 이 해결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상금을 올리죠.”

이승호 편집위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돈.

이슈를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

지금으로선 이것뿐이다.

돈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그제야 좀 진정됐다.

총책임자가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각 부문 대상 상금은 지금보다 두 배. 그리고 본심 후보에게도 소정의 상금을 지급하는 걸로 합시다. 상금은 가라사대가 준비하세요. 이 일을 덮는 대가라고 생각하시고.”

“그렇게나 많이 말입니까?”

대상 상금만 해도 인당 천만 원이었다.

시, 소설, 희곡, 평론, 동화, 시조까지.

벌써 육천이 더 들어가는데, 소정의 상금까지?

“가라사대는 지금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닙니다.”

원로 시인이 정신 차리라는 듯 따끔하게 말했다.

“크, 크흠… 소정의 상금이라면….”

“삼백씩 하죠. 그거면 심사 포기하겠단 작가들은 다시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한지온과 현민상 빼고는 아직 언론에 풀리지도 않았으니까요.”

이승호 편집장은 머리가 아득했다.

본심으로 올라온 인원만 해도 부문 당 아홉 명.

다 합치면 결코 만만히 볼 숫자가 아니었다.

‘사태를 너무 얕봤어. 대한문학상이 이렇게 휘청거릴 줄 알았나….’

돈 나갈 생각을 하면 피가 말렸다.

하지만 여기서 버팅겼다간, 독기 오른 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아마 자기들이 모르는 사이 가라사대가 압박을 넣었다고 폭로하겠지.

사실은 눈감아 준 거면서.

“…좋습니다. 경영팀에 말을 해 보지요.”

“상금을 지원해 주신다 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닌 줄 아시죠? 당분간 언론플레이도 조심해 주시고요.”

그들은 혀를 차며 돌아갔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자리.

이승호 편집장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런 개 같은…!”

퍽!

그는 잡히는 책 한 권을 벽에 집어 던졌다.

마침 들어오려던 비서가 놀라서 문을 닫고 나갔다.

이승호 편집장은 씩씩거렸다.

“개새끼들… 좋다고 장단을 맞출 땐 언제고 지들은 잘못한 거 하나 없는 척 따지고 들어?”

문제는 저들이 눈감아 줬다는 증거가 없단 거였다.

반면 가라사대가 예심 심사위원을 압박했단 증거?

‘요즘 같은 분위기면, 예심 심사위원들이 옳다구나 하고 먼저 고발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승호 편집장은 한숨을 쉬었다.

큰일은 큰일이었다.

편집장은 회사의 대표가 아니다.

그 정도 큰돈을 운용하려면 경영진에 이 일을 책임지고 설명해야 했다.

그 수치를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문학판 더러워서 원… 때려치든가 해야지….”

* * *

도서관에서 장르 소설에 대한 책을 잔뜩 빌렸다.

그걸 들고 집으로 왔을 때 즈음.

금홍에게서 톡이 왔다.

― 미국이라는 나라나, 미국인의 내면을 깊게 알 만한 사람은 의외로 많진 않아요. 그 정도 되면 한국어가 서툴러서 통번역과에 못 오거든요. 그래도 구하긴 했어요. 선배 오빠인데, 초중고를 모두 미국에서 나왔어요. 제 동기들이 항상 머리 검은 미국인이라 놀릴 정도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 정말 감사해요, 금홍샘ㅜㅜ 제가 다음에 밥 살게요.

― 그러세요, 그럼. ㅎㅎ 연락처 알려 드릴게요.

그렇게 나는 금홍에게 그의 연락처를 받았다.

인터뷰 일정은 빠르게 잡혔다.

가능하면 빨리 만나고 싶다는 그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오후.

나는 대학로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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