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94화 (94/204)

94화

지훈은 샴페인을 한 병 사왔다.

뭐, 남자 둘이서 무슨 축하를 요란하게 하겠는가.

그냥 한 잔씩 나눠 마시고 끝이지.

그리고… 그마저도 기분이 안 났다.

금홍의 전화 때문이었다.

나는 지훈에게 그 일을 털어놓았다.

지훈이 울상을 지었다.

“으아… 너무해요, 금홍샘.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우린 ‘팀 이상’인데.”

“영미권으로 나갈 책 번역 빼고는 다 상관없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 차차 찾아보자.”

“하지만….”

지훈이 샴페인을 홀짝거렸다.

“예전에 저 영문과 조교 할 때, 우연히 원어민 교수님이 금홍 샘 번역 보셨는데… 뭐라 해야 하지? 포인트를 잘 잡는다고 하셨거든요. 아쉽네요.”

그 ‘포인트’라는 거.

작가의 의도를 잘 집어낸다는 뜻일 거다.

“그래서 통번역과에 갔겠지. 재능이 있는 거야.”

“형도 아쉽지 않아요?”

아쉽지.

티는 안 내도, 너보다 백 배는 아쉬울 거다.

“어디 상의해 볼 사람 없나….”

하고 괜히 휴대폰을 뒤적이는 지훈이다.

그때였다.

우웅―

미쯔하루 편집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 도마크 연말 작품집 도서는 잘 받으셨지요? SNS에서 진행한 인기투표 결과가 나왔습니다. 공개되는 1~3위권 안에 작가님도 있으니 꼭 확인해 주십시오.

아, 그 인기투표.

그나저나, 내가 순위권에 있다고?

“지훈아, 그거 나왔댄다.”

“뭐요?”

“인기투표. 도마크 출판사에서 한 거.”

“아! 그거 몇 위예요?”

“잠깐만.”

나는 도마크 출판사 짹짹이 계정에 접속했다.

가장 최신 피드에 인기투표 결과가 나와 있었다.

일본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굵직한 글자들.

‘인기’ 투표라는 걸 알려 주듯 한없이 발랄했다.

작가들 간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군….

아무튼 그렇게 확인한 내 순위는 2위.

1위는 당연히 히루키였다.

“봐 봐! 형 순위권 안에 든다니까요? 내가 들 것 같더라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런 인기투표, 사실 이해도 잘 못했는데.

막상 순위에 드니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형, 약속 지켜요.”

“무슨 약속?”

“SNS에 소감 올리기. 팬들과의 소통.”

…그런 걸 하기로 했지.

진짜로 하게 될 줄은 모르고 한 말이었는데.

난 뭐 씹은 표정으로 알았다고 했다.

이런 글은 소설보다도 쓰기 힘든데.

그날 밤, 나는 소감문을 완성해서 지훈에게 넘겼다.

[이상입니다. 독자분들의 따뜻한 성원, 잊지 않겠습니다. <희>를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응. 난 최선을 다했어.”

빈말이 아니었다.

한 시간은 끙끙대다가 겨우 결정한 거니까.

연애편지 쓰는 것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민망한지.

어쨌건 그렇게 일과를 마무리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등>을 탈고하고 나서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한파가 몰아닥치기 전에 체력을 길러 놔야지.

그렇게 운동을 마무리할 무렵이었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맞다! 히루키!”

히루키도 번역자를 여럿 뒀을 게 아닌가.

꽤 좋은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침 그놈의 ‘인기투표’에서 그가 1위를 했으니… 그걸 빌미로 연락이나 해 보자.

나는 히루키에게 SNS 메시지를 보냈다.

― 1위 축하드립니다. 역시 못 당하겠네요.

답장은 바로 왔다.

― 감사합니다. 십년감수했다고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일본에서 누가 히루키를 이긴단 말인가.

― 이상 작가님과 저의 투표수 차이가 근소합니다. 여기가 일본이라는 걸 따져 보면… 제가 꼭 이겼다고 하기도 어렵죠. 하하.

이기고 지는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 ‘인기투표’에 가장 무심했던 사람은 나일지도.

나는 좀 장난스럽게 그를 떠봤다.

― 은근히 신경을 쓰셨네요. 우승은 우승이니, 제가 졌습니다.

― 은근히가 아니라 많이 신경을 씁니다. 아닌 척하는 것뿐이죠.

― 작가는 이미지니까요?

― 역시 작가님과는 통하는 게 있습니다. 저 사실… 작가님께 약간의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음.

눈치를 못 챈 건 아니지만.

그는 나보다 연장자에, 일본 문학의 원로였다.

뭐라 대답하기가 애매한데.

― 하지만 이젠 그런 경쟁심은 버리기로 했습니다. 작가님께서 유럽에 성공적으로 안착을 하신 이상, 우리는 팀이죠.

― 든든하네요. 작가님과 팀이라니.

― 제 자랑 같지만, 저도 이번에 미국의 셸터 문학상에 <신의 서>가 노미네이트되었거든요.

“오.”

나는 감탄을 했다.

셸터 문학상.

그것도 꽤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

― 정말입니까? 축하드립니다. <신의 서>는 문체가 담백해서 미국에 잘 먹힐 글이죠. 잘될 겁니다.

― 이렇게 된 거, 우리가 유리천장을 함께 뚫어 보죠.

― 이미 뚫지 않으셨습니까? 외국에서 여러 번 상을 받으셨는데요.

― 뚫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가 보면 막혀 있더군요.

나로선 기억해 둘 만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제 겨우 세계 문학시장에 초입에 서 있다.

언젠가 저 말에 공감할 일을 각오해야겠지.

그 즈음, 나는 슬쩍 본론을 꺼냈다.

― 히루키 작가님, 뭣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 물론입니다.

― 제가 요즘 번역자 때문에 고민이 있는데요.

― 번역자요?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히루키에게 금홍과의 일을 말했다.

― 흠… 난감하시겠군요. 뮌에서 패스한 원고를 쓸 정도의 분이라면, 작가님의 글을 잘 파악하는 센스가 있으실 텐데요.

― 하지만 원어민이 아니긴 하니까요.

― 저도 그분의 말씀에 동감하긴 합니다. 번역에도 방향이 있습니다. 영미권에 진출하려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번역하는 게 맞죠. 그분은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시는 게 낫고요.

― 역시 그런가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때, 히루키가 말했다.

― 하지만… 저라면 어떻게든 기존 번역자를 활용할 것 같긴 합니다. 본격적인 번역에 들어가기에 앞서 글의 포인트를 잡아달라던가, 하는 방법으로요.

흐음… 그런 방법도 있긴 하군.

하긴. 번역을 꼭 혼자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방법이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이 점은 내가 좀 더 생각해 보자.

―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말씀을 들으니 작가님도 곧 미국 시장에 진출하시겠군요. 그렇죠?

히루키가 물었다.

― 네. 물론입니다. 해주실만한 조언이 있을까요? ‘선배’로서요.

― 음… 그래도 선배랍시고 드릴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전략적 글쓰기’를 하시라는 겁니다.

― ‘전략적 글쓰기’요?

― 미국인의 취향에 맞출 필욘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작가님이 가진 것 중에 ‘미국적 감성’과 통할 무언가가 분명 있을 겁니다. 그걸 찾으십시오.

― 미국식 감성이라. 그런 게 존재합니까?

― 당연히, 당연히 존재합니다. 드러나지 않을 뿐이죠.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였다.

<내외인>이 유럽에서 성공을 거뒀으니… 미국 시장은 내 기존 작품의 판권을 사 갈 거다.

문제는, ‘새 작품’이다.

미국 시장에 내 이름을 확실히 알릴 작품.

히루키의 말이 맞다.

미국의 취향에 맞는 글을 쓰려는 게 아니다.

그들과 ‘통할’ 무언가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게 문제.

<내외인>은 한눈에 보기도 프랑스 감성과 통한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유럽 문학 시장의 취향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아니, 그들은 ‘드러낸다’. 자랑스럽게.

하지만 미국 시장은 아니다.

워낙 거대한 시장과 수많은 인구.

그들의 취향? 그저 ‘자유롭다’고 퉁치지 않은가.

만약 ‘자유’의 뒤에 가려진 ‘미국적 감성’이 있다면… 그 ‘미국식 감성’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겠지.

여러모로 히루키에게 연락을 하길 잘했다.

―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선배님.

― 다 제가 쓴 전략입니다. 저는 굉장히 정치적인 사람이거든요. 하하….

히루키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 유로문학상, 꼭 받길 바랍니다. 문학상은 작가의 실력에는 하등 영향이 없지만, 작가의 이미지엔 절대적이죠.

그것참, 히루키가 할 법한 말이었다.

* * *

뮌 출판사가 제시한 조건은 꽤 만족스러웠다.

특히 최고의 번역가를 붙여 준다는 점이 좋았다.

나는 별다른 흥정 없이 계약을 했다.

그리고 오늘.

한국대 특강이 있는 날이다.

나는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그리고 별벅스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유로문학상에 노미네이트 된 후 처음 맞는 특강.

일반인도 수강 가능한 청강이라… 좀 불안했다.

집 앞에서 진을 치던 기자들.

그들이 들이닥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특강에 방해가 되면 바로 쫓아내야지.

한편, 나는 한 단어에 흠뻑 빠져 있었다.

바로 ‘미국식 감성’.

다음 작품을 집필할 시간은 내년에야 날 테지만….

내 마음은 이미 백지 앞에 앉아있다.

일단 내가 아는 걸 정리해 보자.

미국의 문학은 유럽처럼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메시지와 미학의 깊이가 얕다는 게 아니다.

서사적으로 명료하다는 거다.

즉,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다는 것.

그런 점에서는 장르 소설과의 경계가 크지 않고.

그렇다면… 아예 장르 소설을 시도해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장르를 쓴다 쳐도, 대체 어떤 장르를?

좀 더 심도 있는 파악이 필요하다.

‘미국식 감성’에 대한 감을 잡으면,

내가 가진 재능과 접목할 수 있을 텐데.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들이 잘 모르는 세계를 다룰 때 곧잘 쓰는 방법.

‘인터뷰’.

나는 지금까지 내 내면을 다루는 글을 주로 써 왔다.

인터뷰가 필요했다면, 내 내면에 물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필요하다.

정보를 줄 타인이.

“미국을 아는 사람… 미국을 아는 사람….”

휴대폰 연락처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나나 혜경이나 인간관계는 거기서 거기.

미국의 ‘미’ 자도 모를 사람들만 가득하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한 사람.

‘이금홍’

금홍이 다니는 과는 영문통번역과.

미국에 발 담가 본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나는 멈칫했다.

지금 같은 타이밍에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좀….

뭐… 별수 있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거지.

조심스레 톡을 보냈다.

― 선생님, 바쁘세요? 간단하게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잠시 후.

…읽었다.

하지만 답이 없다.

바쁜가?

묘하게 서운한데.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쩐지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며.

그때였다.

우웅― 우웅―

금홍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여보세요.”

― 네, 혜경 샘! 방금 수업이 끝나서요. 지금 기숙사로 가는 길이에요. 무슨 일이세요?

금홍은 평소와 다름없이 밝았다.

나는 좀 안심하는 마음으로 금홍에게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작품 때문에요. 제가 인터뷰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주위에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분이 계실까요?”

― 미국에서 오래요? 얼마나 오래요?

“그들의 문화를 뼛속까지 알 만큼.”

― 흐음.

“미국인의 내면도 잘 알았으면 하고요.”

― 흐음….

금홍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음… 음… 하는 소리만 반복할 뿐이었다.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려운 부탁이긴 하다.

한 나라의 문화와 내면을 잘 아는 사람이면, 적잖이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여야 한다.

“무리하진 마시고요, 다른 데에서 알아봐도 되니까요.”

― 아니에요. 찾아볼게요.

금홍이 다급하게 말했다.

―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사람이 떠오르긴 했거든요. 제가 물어볼 테니, 일단은 맡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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