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93화 (93/204)
  • 93화

    ― 노미네이트에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여기까지만 말하겠어요.

    마리옹 편집장이 도도한 미소를 지었다.

    지훈이 영상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날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어때요, 형?”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마리옹 편집장은 이렇게 말한 거나 다름없다.

    ‘이상은 그 상을 받을 겁니다.’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유럽에서 <내외인>이 발간된 것도 모자라… 유로문학상?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유로문학상… 유럽인들끼리 벌이는 잔치라고 욕을 먹어도 그 권위는 대단하잖아요. 마리옹 편집장이 저렇게까지 말을 했으면, 희망을 걸어 봐도 좋지 않을까요?”

    지훈이 은근히 말했다.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녀석마저도 조심스러운 모양.

    “…일단 잊고 있자.”

    기대를 걸기엔 이르다.

    아무리 신인상이라도, 세계엔 쟁쟁한 작가들이 많다.

    상을 신경 쓰느라 에너지를 뺏기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도….

    유로문학상에도 어떤 알력이 작용할지 모를 일.

    하지만 결과적으로, 잊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이런 인터넷 기사가 문화란을 뒤덮었다.

    ― 이상의 <내외인>, 유로문학상 비유럽권 신인 부문에 노미네이트. 한국인 최초.

    * * *

    “마리옹!!”

    도미닉 팀장은 주먹을 꽉 쥔 채 외쳤다.

    그의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마리옹의 인터뷰.

    그녀는 특유의 깔보는 시선으로, 독일의 출판계에 일침을 보냈다.

    ― 음… 독일의 시민들도 훌륭한 문학을 읽을 권리가 있어요. 그 권리를 지켜 주셨으면 좋겠군요.

    누가 프랑스 여자 아니랄까 봐.

    어쩜 이렇게 고상하게 얄미울까.

    도미닉 팀장과 마리옹 편집장도 모르는 사인 아니었다.

    매해 유로문학상 시상식에서 만나는 사이랄까.

    만날 때마다 웃으며 악수를 해도 속으로는.

    ‘촌스러운 독일 책벌레.’

    ‘재수 없는 프랑스 범생이.’

    이렇게 서로를 미워해 왔다.

    하지만 이상이 유로문학상에 노미네이트 된 지금.

    독일의 참패는 기정사실이었다.

    유로문학상 노미네이트 작가의 책을 ‘아직도’ 내지 않은 건… 프랑스를 ‘의식’했다고밖에는 설명 못 할 테니.

    “…흥.”

    그래도 도미닉 팀장은 괜찮았다.

    얼마 전 <등>의 영문판을 보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클래식한 구조와 묵직한 주제의식,

    인간의 광기를 직시하는 진중한 시선,

    전통적 분위기의 세련된 묘사.

    …딱 독일의 취향이 아닌가.

    마치 도미닉 팀장의 바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은 이런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똑똑!

    사원 하나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팀장님, 회의 시간 다 됐는데요.”

    “그래. 가지.”

    도미닉 팀장은 <등>의 영문판을 가지고 일어났다.

    회의실로 향하는 그의 표정이 새삼 진지했다.

    오늘, <등>의 출간을 팀장 투표에 부칠 거였다.

    * * *

    “인터넷 기사 그만 봐.”

    저녁 식사로 배달 음식을 먹을 때였다.

    나는 지훈에게 말했다.

    지훈은 벌게진 눈을 휴대폰에서 뗐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엔 유로문학상 기사가 대서특필 되어 있었다.

    “…제가 매니저인데 어떻게 형님 기사를 안 봅니까.”

    “하는 말 다 똑같잖아. 첫째, 이상 대단하다. 둘째, 대한문학상 못 믿겠다.”

    “그거야 그렇죠.”

    “인터뷰 한 번 안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기사를 계속 쏟아 내는지 몰라.”

    “현대 기자의 기본 재능 아닙니까. 정보 없이 기사 만들기. 그러지 말고, 인터뷰 한번 하시죠?”

    “절대 안 해. 지금 기자들한테 말려들면 한도끝도 없어.”

    지금도 집 앞에선 기자들이 죽치고 있다.

    얼굴만 보면 인터뷰를 하자고 달려드니… 벌써부터 죽을 맛이다.

    그 덕에 며칠째 외출은 고사하고 배달 음식으로 연명하는 중.

    “형, 제가 이번 유로문학상 비유럽 신인상 소설가 부문을 좀 알아보긴 했는데요. 후보들이 쟁쟁하긴 해요.”

    “국적이 어떻게 되는데?”

    “형 빼면… 일본, 미국, 인도, 러시아?”

    모두 문학적 캐릭터가 확실한 나라들.

    다들 한 가닥씩 하겠다.

    “누가 제일 라이벌 같아요?”

    음… 다?

    그때, 지훈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지훈이 멈칫했다.

    “어? 국제전화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지훈의 얼굴이 굳었다.

    “…아, 예… 예.”

    “뭔데 그래?”

    지훈이 수화기를 막고 내게 말했다.

    “…독일의 뮌 출판사라는데요?”

    나는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통화 넘겨줄래?”

    “아, 네.”

    독일의 뮌 출판사.

    어찌 모르겠는가.

    프랑스는 비슷한 체급의 대형 출판사가 많다.

    그만큼 경쟁이 쟁쟁한 걸로 유명하지.

    하지만 독일은 다르다.

    출판사 간 체급이 뚜렷하고, 그 순위를 유지한다.

    체계와 질서의 나라답달까.

    그리고 독일에서 가장 체급이 큰 출판사.

    그게 바로 뮌이다.

    수화기 너머 여자가 말했다.

    ― 저는 뮌 출판사와 이상 작가님 간 통역을 맡은 통역사 다이앤 박입니다. 제 옆에 해외문학팀 팀장님 중 한 분이신 도미닉 팀장님이 계시니, 바로 통역을 해 드리겠습니다.

    팀장님 중 한 분?

    그럼 팀장이 여럿이란 뜻인가?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는지요?”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리고 지훈이 같이 들을 수 있도록,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 다름이 아니라, 작가님 작품의 독일어판 계약을 저희 뮌 출판사와 진행하실 용의가 있으신지 여쭈기 위해 전화를 드렸습니다.

    지훈이 내 팔을 덥석 잡았다.

    어서 알겠다고 말해!

    라고 외치는 눈으로.

    나도 당장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뮌 출판사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다만, 좀 걸리는 게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기쁩니다만, 먼저 제 작품을 원하시는 이유를 먼저 들어 보고 싶은데요.”

    뮌 출판사의 연락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프랑스 출판계와의 자존심 싸움을 차치하고서라도.

    지금까지 늦은 이유가 분명 있을 것.

    잠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괘, 괜찮을까요?”

    지훈이 걱정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이 정도 담은 있어야지.”

    ― 뮌 출판사 내에서 이상 작가님의 책을 내자는 이야기가 나온 건 한 달 전쯤의 일입니다.

    “제가 아직 파리에 있을 때군요.”

    유럽의 많은 출판사가 러브콜을 보냈던 때다.

    역시 독일 쪽도 가만히 있진 않았군.

    ― 뮌 출판사의 의사결정은 다수결로 진행합니다. 5명의 팀장 중 3명 이상이 찬성해야 하죠. 처음에 <내외인>으로 투표를 붙였을 땐… 4 대 1로 계약 진행이 보류됐습니다.

    “그리고요?”

    ― 작가님께서 서울로 돌아가신 후 <희>를 가지고 두 번째 투표를 했죠. 3 대 2로 또 한 번 계약 진행이 보류됐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등>이 작가님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되었고, 저흰 그 소설을 보고 마지막 투표를 했습니다.

    “흥미롭군요. 2 대 3로 찬성파가 이겼나요?”

    ― 아니요. 1 대 4였습니다.

    오호라.

    ― 시기가 복잡하게 맞물려서 유로문학상 노미네이트를 염두에 뒀을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오직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결정했다는 점 말씀드립니다. 아무튼 연락이 늦어 죄송한 만큼, 저희의 내부 사정을 솔직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나름의 사정과 수고가 있었다 이건가.

    사연을 들어 보니 삐딱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계속 투표를 해 주셨던 점, 먼저 감사드려야겠군요.”

    ― 도미닉 팀장님께서 3번의 회의를 모두 여셨습니다.

    알 것 같았다.

    첫 투표부터 있던 하나의 찬성표.

    그게 도미닉이란 팀장의 것일 테지.

    ― 혹시 다른 독일의 출판사와 진행 중인 계약이 있으신지….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훈은 적잖이 애가 타는 모양이다.

    계속 계약을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댔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계약 조건을 담은 계약서를 보내 주시면 저희가 검토하겠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소란스러웠다.

    두껍고 낮은 목소리가 연신 뭐라고 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도미닉 팀장 같았다.

    ― 정말 감사합니다. 원한다면 독일에 모셔서 발간회를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만.

    “아, 따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연말까지 일정이 꽉 차서요.”

    ― 아… 아쉽군요.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가 보도록 하죠. 그럼 계약은 <등>으로 진행하는 건가요?”

    ― 네. 맞습니다.

    “그럼 진행해 보도록 하죠.”

    지훈이 소리 없는 쾌재를 불렀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들도 들뜬 게 느껴졌다.

    갑자기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영어로 내게 자신이 도미닉 팀장이며, 나의 열렬한 팬이고, 계약을 성사시켜 줘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와 적당히 인사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지훈과 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송지훈.”

    “…네.”

    “축배를 들어야 하지 않겠냐?”

    “샴페인 하나 사 오겠습니다.”

    지훈이 빠릿빠릿하게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텅 빈 조용한 집.

    나는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후우….”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리브레에 <내외인>을 보냈던 날이 기억났다.

    잘 될 거란 확신?

    계약을 하기만 해도 성공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유럽의 3대 문학 시장에 모두 진출하다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신다.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긴 있구나.”

    그때, 문득 금홍이가 생각났다.

    뮌 출판사는 금홍이 번역한 <등>을 봤을 거다.

    번역에 무리가 없었으니 작품을 좋게 봤을 테고.

    금홍의 번역본.

    따지고 보면 이제야 빛을 본 거다.

    <내외인>이야 처음부터 프랑스어로 번역을 해서 리브레로 보냈으니.

    난 오랜만에 금홍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길게 이어졌다.

    공부하느라 받지 못하는 건가?

    끊을까 말까 망설이던 때였다.

    ― 여보세요?

    받았다.

    “금홍 샘, 저 혜경이예요.”

    ― 샘!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 했는데… 유로문학상에 이름 올라가셨잖아요! 정말 대단해요!

    “하하…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아, 그것보다 저 독일의 뮌 출판사와 이번 신간 계약을 하게 됐어요. 선생님 번역본을 보고 회의를 했대요. 정말 감사드려요.”

    금홍은 말이 없다.

    뭐지? 좋아할 줄 알았는데.

    ― 기쁘네요. 정말 너무 잘 됐어요. 제 번역으로… 그런데.

    그런데?

    ― 사실 번역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었거든요.

    “뭔데 그러세요?”

    ―음… 혜경 샘. 영미권에서 책을 낼 계획도 있으시죠?

    “네. 당연하죠.”

    ― 그럼 영미권 출판사에 보내실 원고는 영어 원어민 번역자를 쓰셔야 하는 거… 아시죠?

    금홍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곤 있었다.

    번역은 원래 번역되는 언어를 모국어로 삼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걸.

    그러니까 금홍은 지금까지 반대의 일을 해 줬던 거다.

    하지만 번역에는 두 가지 주요점이 있다.

    하나는 자연스러운 영어 실력.

    나머지 하나는 글의 문맥을 이해하고 포인트를 강조할 수 있는 문학적 능력.

    금홍은 아마도 후자에 재능이 있겠지.

    또, 지금까지 내 글을 번역할 ‘경험’이 있고.

    이런 사람을 놓치고 싶진 않은데.

    “하지만 뮌 출판사는 선생님의 번역을 봤는데요. 그 글이 좋았으니 제 작품을 선택했겠죠.”

    ― 유럽인들이잖아요. 그들에게도 영어는 외국어고, 어차피 독일어로 번역을 할 거니까요. 하지만 영미권 사람들이 보면 어색한 부분이 분명 있겠죠.

    …역시 일리 있는 말.

    “음…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금홍 샘.”

    ― 어… 네, 죄송해요. 제가 미리 말씀을 드려야 했는데… 아! 홈페이지에 올라가는 글은 지금처럼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어요. 유럽으로 보낼 글도요.

    내가 생각보다 순순히 수긍해서일까.

    금홍은 오히려 당황한 것 같았다.

    “죄송할 게 뭐 있어요. 괜찮아요.”

    잠시 후.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등>의 다음 작품.

    반드시 미국 시장을 노려야 한다는 걸.

    금홍을 계속 쓰는 건 무리.

    떼를 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역자를 완전히 새로 구한다?

    나와 한 번도 호흡을 맞춰 보지 않은 사람을?

    역시 어려운 일이다.

    “흠….”

    미국으로 보낼 작품.

    아직 구상조차 없으니 번역도 급한 일은 아니지만… 방법은 슬슬 찾아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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