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92화 (92/204)

92화

벌컥!

도미닉 팀장은 사무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리고 회의록을 던지듯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후우….”

<희>에 대한 투표.

결과는 2 대 3.

이번에도 출간은 불발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구만.”

도미닉 팀장은 방금 전 회의실에서 오갔던 말을 떠올렸다.

―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이네요.

― 좋은 소설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데가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정작 출간엔 반대했다.

― 단편을 어디에 끼워 넣어 발표한단 말입니까. 또, 그렇게 애매하게 이상의 소설을 가져오면 프랑스 쪽에서 비겁하다 여기지 않겠어요?

일이 이쯤 되니….

도미닉 팀장의 입장에선 환장할 일이었다.

“이 바보들!”

‘강렬하다며! 강렬하면 책을 내야 할 게 아냐? 그놈의 같잖은 자존심이 뭐기에 이런 작품을 거부하는 거지?’

그나마… 1 대 4에서 2 대 3이 됐으니….

한 명의 마음이라도 돌린 게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후우….”

도미닉 팀장은 소파에 푹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의 <희> 번역본을 살펴봤다.

역시 대단한 소설이었다.

유럽인은 흉내도 못 낼 서정성.

단편에서만 볼 수 있는 엄청난 몰입감.

이런 작품을 보면, 도미닉 팀장의 피가 끓었다.

“…포기 못 해.”

그때였다.

누군가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도미닉 팀장의 직속 사원이었다.

“저, 팀장님. 이상 작가에 대해 알아보다가 이런 걸 발견했는데요.”

“뭔데?”

사원은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에 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상의 홈페이지였다.

“잘 보시면 지금까지 자신이 쓴 소설을 영문으로 번역해서 올려 둔 것 같아요.”

독일인의 입장에선 충격적인 얘기였다.

작품을 온라인으로, 게다가 개인이 직접 팔다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국인이라 그런가?”

한국인들이 그렇게 인터넷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는가.

“아, 그리고 SNS를 좀 뒤져봤는데… 이상 작가가 새로운 장편을 곧 낸다고 합니다.”

“뭐? 언제?”

도미닉 팀장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12월 안으로 나온다고 하는 것 같던데요.”

“오호라, 그럼….”

“새 소설도, 영문판으로 이 홈페이지에 올라올 수 있다 이거죠.”

딱!

도미닉 팀장은 손가락을 튕겼다.

“이 홈페이지, 주시하고 있어. 알았지?”

“네, 팀장님.”

뮌의 다수결제가 그나마 ‘합리적’인 점.

모든 의사결정이 작품을 중심으로 정해진다는 점이다.

즉, 새로운 작품이 등장하면 그때마다 투표에 부칠 수 있다는 얘기.

물론 눈치야 좀 보일 테지만.

지금 그게 문젠가.

사원이 나가고, 도미닉 팀장은 소파에 벌렁 누웠다.

‘<내외인>은 형식적 실험이 돋보이는 글이다. <희>는 서정성이 좋은 글이고….’

그러니 부디 다음 글은….

‘클래식한 맛의 작품이 나오면 승산이 있을 텐데 말이지.’

* * *

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북콘서트에 겨우 맞출 줄 알았더니 말이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홈페이지와 신―문학.

이 두 매체에 <등>을 동시에 공개했다.

종이책 판매 지표도 중요하지만, 온라인 독자들이 어려움 없이 신작을 볼 수 있도록.

반응은 바로 왔다.

홈페이지의 결제 수는 벌써 수천 회.

<내외인>의 초기 결제 수를 훌쩍 넘었다.

그리고 신―문학의 댓글과 비평들.

― 예술가 쩌네. 한 번 사는 인생 겁나 화끈하게 살아.

― 천상 예술가가 있다면 딱 저렇게 행동할 듯. 그런데 저렇게 하나에 미치는 삶은 좀 불행할 것 같기도 하고.

― 이상은 생긴 건 댄디하고 깔끔한데 쓰는 작품은 항상 충격적임. 좀 무섭기도 하고…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함.

― 주인공한테 반 고흐 느낌 나지 않냐?

― 나도 집 나가서 고생 좀 하고 천재 소리 듣고 싶다.

― ㅎㅎㅎ천재니까 저렇게 멋지게 사는 거구요. 우리가 하면 그냥 노숙자 될 것 같은데요.

― 마지막 장면 미쳤다. 처음으로 교회에 들어갔던 느낌이라니ㅠㅠㅠㅠ 그림에 신성함이 느껴진다는 표현을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어. 미쳤어ㅜㅜㅜㅜㅜ

그리고 비평란에 올라 온 비평가의 글들.

그 글들도 꽤 의미가 있었다.

먼저 지훈의 글.

― 이상의 새 작품 <등>. 이 작품을 논할 때는 시선의 문제를 배제할 수 없다. 화자는 줄곧 화가의 등 뒤에서 말하는 듯하다. 결코 그를 앞서가지 않으며, 그의 얼굴이 아닌 등에 담긴 세상의 무게와 꿈을 그려 낸다. 화가보다 앞서가지 않는다는 점. 그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천재란 무엇인가? 남들보다 일찍 놀라운 어떤 것을 맞이하는 이를 의미한다. 많이 아는 자가 아니라, 더 빨리 아는 자가 바로 천재다. 이상의 <등>은 이런 ‘천재론’을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는데, 화자의 ‘뒤따라가는 시선’은 천재 화가를 올려다봄과 동시에,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앞서가는 사람임을 증명한다. (……)

또 다른 비평가의 글들.

― 이상의 <등>은 명실상부한 예술가 소설이다. 우리는 지금껏 수많은 예술가 소설을 보며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 왔다. 하지만 예술가라는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까지 깊이 파고든 소설은, 나는 지금껏 본 적이 없다. 즉, 이상은 ‘예술’이 아닌 그 예술을 존재하게 하는 ‘인간’을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다. 소설의 역할은 그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그것을 잊지만 않는다면, <등>이야말로 가장 소설다운 소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천재의 광기는 병자의 광기와 무엇이 다른가. 소설 <등>은 천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그 광기를 직시한다. 주인공 화가의 인생을 보자. 그의 삶의 목적은 맹목적으로 ‘예술’에 박혀 있다. 이 예술가는 예술이라는 구덩이에 삶을 통째로 던져 버리기 때문이다. 가족, 돈, 건강, 나아가 자신조차도.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보다 뭔가를 더 사랑할 때, 우리는 그것을 ‘광기’라고 부른다. 그중에서도 예술적 광기는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피워 올리고, 우리를 매혹한다. 이상은 가장 클래식하면서도 탄탄한 문체와 연출로 이 매혹적인 이야기를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등>에서 새로운 의도와 의미를 찾으려는 움직임들.

모두 고마운 글들이었다.

며칠 후, 반가운 연락이 왔다.

장 스테판의 메일이었다.

그는 마리옹 편집장의 말을 대신 전했다.

― 저희 리브레에서는 이상 작가님의 홈페이지에 번역되어 올라 온 <등>의 영문 번역본을 봤습니다. 정식 회의 끝에 작가님의 신작에 대한 프랑스어 번역판 출간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아직 한국에서도 안정적인 지표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번역본을 내겠다고?

난 좀 의아했다.

하지만 궁금증은 곧 해결됐다.

장 스테판은 이렇게 메일에 덧붙였기 때문이다.

― <등>을 보신 마리옹 편집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이라는 이름 자체를 하나의 완성된 지표로 여겨도 좋을 것 같다고요.

* * *

<등>을 낸 지 일주일.

모든 일은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다.

일본과 프랑스를 비롯한 나라들이 <등>의 판권을 사갔다.

<내외인>을 통해 한번 뚫린 판로.

이번에는 다소 쉽게 풀리는 듯했다.

…역시나 독일만 빼고.

독일에 대해선 거의 체념 상태였다.

싫으면 말라지 하는 마음으로.

요즘엔 자전거 타기에 흥미를 붙였다.

천변을 빠르게 달릴 때의 긴장감.

서늘한 날씨 속에서 달아오르는 몸.

그 감각이 하나로 뒤섞이는 게 좋았다.

이런 신체적 긴장감.

이건 전생에서는 몰랐던 감각이긴 했다.

내 몸은 약했고, 주로 술에 취해 있었으니.

현관을 막 들어왔을 때였다.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업실에서 튀어나온 지훈이 외쳤다.

“아, 형! 왜 지금 왔어요?”

“…뭔데 그래?”

“형 진짜 놀랄 만한 일이 있다고요!”

“아직도 놀랄 일이 남았어?”

며칠 전.

<등>이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속도만 두고 따지자면 신기록이었다.

몽테뉴 영화제와 <내외인>의 영향이 컸겠지만.

그런데 더 놀랄 일이 있다고?

“빨리 와서 이것 좀 보세요.”

지훈이 날 작업실로 끌고 갔다.

녀석의 컴퓨터에는 웬 영상이 떠 있었다.

화면 안에는 차가운 인상의 유럽 여자.

“어? 마리옹 편집장이네?”

“거기서 언론 인터뷰를 한 모양이에요. 잘 들어봐요, 형. 중요한 부분만 틀어 드릴게요.”

그녀는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아주 깔끔한 흰색 투피스.

프랑스 출판사 특유의 고상함을 보여 주는 듯했다.

― 리브레가 적지 않은 계약금으로 한국의 이상 작가의 신간 판권을 사 왔다 들었는데요. 이렇게 서두르신 이유가 있을까요?

― 서두르지 않으면 빼앗길 테니까요.

― 하지만 당시엔 제대로 된 지표가 뜨기도 전이었죠.

― 그리고 지금은 한국 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 예상 지표가 적중한 거죠. 리브레 내에서 만장일치였어요. <등>의 판권을 가져오는 건.

― 프랑스 내에서 아직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내외인>의 후광인가요?

― 절대 아닙니다. 저희 리브레는 이상 작가가 홈페이지에 올린 <등> 영문판을 보고, 오로지 그 작품을 근거로 결정했어요. 리브레는 작가의 이름값만 가지고 책을 내지 않습니다.

마리옹 편집장이 딱 잘라 말했다.

― 저희 프로는 리브레가 부쩍 아시아 서적을 출간하는 건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이 인터뷰를 하기로 결정했는데요, 유럽 문학에 치중해 있던 문학 서적 발간을 아시아권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가 있을까요?

― 리브레는 오래전부터 아시아의 책들을 내왔어요. 중국과 일본의 출판사와도 연계가 되어 있죠. 문제는… 프랑스의 독자분들이 아시아 문학을 낯설게 여겨 왔다는 거죠. 읽어 보기도 전에요. 그리고 그 편견을….

마리옹 편집장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살짝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 이상 작가가 깨 줬죠. 멋지게.

― 그렇군요. 그런데 유럽의 모든 시장은 이상의 문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던데요.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판권을 사가지 않았죠. 프랑스와 문학적 전통이 달라서일까요?

독일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가감없이 말했다.

― 문학적 전통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이건 자존심 문제거든요. 프랑스가 먼저 발굴해서 유럽에 정착시킨 작가의 책을 발간한다는 게.

― 오, 그건 예민한 이야기 같은데요.

― 같은 유럽인으로서 한 말씀 드리고 싶어요.

― 독일 출판계에요?

마리옹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 프랑스와 독일의 출판계는 오랫동안 이런 무의미한 자존심 싸움을 해 왔죠. 음… 독일의 시민들도 훌륭한 문학을 읽을 권리가 있어요. 그 권리를 지켜 주셨으면 좋겠군요.

― 와우. 이 점은 더 여쭤보면 큰일이 나겠군요. 하하….

난감해 하는 건 오히려 인터뷰어 쪽이었다.

마리옹 편집장은 속이 시원해 보였다.

오랫동안 그 말을 할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 어쨌건 유럽에 진출할 많은 비유럽권 작가들은 이상의 혜택을 받을 거예요. 그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군요.

― 마리옹 편집장님.

― 네.

― 비유럽권 작가들 이야기를 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마리옹 편집장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올해 연말에 열리는 유로문학상 말입니다.

― 오, 이런.

마리옹 편집장은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유로문학상.

매해 유럽 대륙을 대상으로 열리는 문학상.

노벨문학상이나 맨부커상 만큼은 아니지만, 유럽 내에서 꽤나 권위가 높다.

출판사 편집장 입장에선, 말하기 조심스러울 수밖에.

인터뷰어가 물었다.

― 이번 유로문학상은 시상식 날짜와 노미네이트 명단이 유난히 늦게 나오고 있는데요… 유럽 내 지표를 통해 선정하는 ‘비유럽 부문 신인 소설상’에 <내외인>이 노미네이트 될 수 있을까요?

― …이걸 물으러 오셨군요?

― 하하하…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 유로문학상에서 비유럽 신인 작가가 수상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비유럽 부문 하나 뿐이죠. 애초에 유럽인을 위해 만든 문학상이니.

― 맞습니다. 그래서 비유럽 부문은 노미네이트 경쟁률도 엄청나죠. 하지만 프랑스 문학계의 ‘이상 신드롬’이 있었잖아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 노미네이트가요?

― 네.

마리옹 편집장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 그럼….

― 노미네이트에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여기까지만 말하겠어요.

마리옹 편집장이 도도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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