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91화 (91/204)
  • 91화

    북콘서트가 대한문학상과 겹치는 것.

    신경이 아주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다.

    좋은 쪽이건 아닌 쪽이건 엮일 수밖에 없을 거고.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도 웃긴 일.

    내게 중요한 건 북콘서트의 주제가 될 <등>.

    발간 일정을 맞추기 위해 최종 퇴고에 들어갔다.

    <등>

    요즘 소설치고도 클래식한 타입.

    형식적 기교는 최대한 배제.

    중요한 건, 안정적인 서술과 묘사.

    광기 어린 인간의 일대기를 다루는 진정성.

    천재의 재능을 보여 줄 묵직한 대사.

    즉, ‘기본기’가 가장 중요한 소설.

    ‘기본기’만으로 모든 걸 보여 줘야 하기에 작가의 역량이 가장 잘 드러나는 타입의 글이지.

    문득, 소설을 처음 썼던 시절이 떠올랐다.

    기교가 무엇이고 형식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시절.

    그저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쓰려 노력했던 나날.

    다시 그 순수한 시절도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렇게 <등>에 빠져 있을 때였다.

    우웅― 우웅―

    반가운 전화가 걸려 왔다.

    조인후 감독이었다.

    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감독님!”

    ― 오오, 작가님. 바로 받으시는군요.

    “몽테뉴 영화제 극본상, 정말 축하드립니다. 한국에 돌아오신 겁니까?”

    ― 하하… 작가님 덕 아니겠습니까. 어제 들어와서 꼬박 잠만 잤습니다. 음… 한번 뵙고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나는 모니터를 봤다.

    <등>의 퇴고를 다 할 때까진 곤란한데.

    “12월이나 되어야 가능할 듯한데요.”

    ― 아… 그때는 제가 다시 외국으로 가는데요. 세미나가 있거든요. 이걸 어쩐다.

    “어쩔 수 없죠. 어쨌건 해를 넘기지 않는 쪽으로….”

    ― 음. 아쉬운 대로 일단 작은 선물을 하나 보내 드리죠.

    “네? 갑자기요?”

    ― 거절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사람들이 저 양심 없다고 욕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원작을 제공한 대가는 이미 충분히 받았다.

    심지어 러닝개런티라 앞으로도 계속 들어올 테고.

    ― 그럼 추후에 뵙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또 연락 드리죠.

    그렇게 통화는 마무리가 되어버렸다.

    좀 황당했지만, 이내 신경 쓰지 않았다.

    ‘작은’ 선물이라고 했으니.

    기껏해야 한우 세트 정도 되겠지.

    그럼 지훈이와 신나게 구워 먹어야겠다.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름 정도가 지난 오늘.

    <등>의 퇴고를 끝냈을 때였다.

    마지막 온점을 찍는 순간.

    “와… 죽겠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훈이 뒤를 돌았다.

    “다 썼어요?”

    “방금. 시간 되면 이거 신라문학에 메일로 보내 줄래?”

    “네. 바로 보낼게요.”

    나는 작업실의 간이 소파에 늘어졌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지훈이 바로 내 자리로 와서 원고를 살폈다.

    “지금 원고 보내면 책은 언제 나온대요? 북콘서트 딱 한 달 남았는데.”

    지훈은 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녀석은 북콘서트 얘기가 나온 후, 내내 그걸 신경 쓴다.

    정작 나는 별 실감이 안 나지만….

    출판사 일정이야 뒤죽박죽 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등>의 경우는 아니었다.

    “마감에만 제때 보내면 바로 출판 공장 돌려준대. 교정 바로 보고 인쇄하면, 연말 직전에는 나올 거야.”

    “으흠. 특별 대우네요. 그래서 마감이 언젠데요?”

    “오늘.”

    “…바로 보내겠슴다.”

    지훈은 재빨리 메일을 보냈다.

    그때, 현관문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딩동― 딩동―

    “택밴가? 제가 나가 볼게요.”

    “…부탁해.”

    나는 전자레인지에 돌린 인절미마냥 늘어져서 말했다.

    지훈이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외침.

    “형! 좀 나와 봐요!”

    …왜 또.

    귀찮은 마음으로 터벅터벅 밖으로 나갔다.

    저게 뭐야…?

    지훈이 웬 거대한 박스를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뭐야 그게?”

    “모르겠어요. 엄청 무거운데요? 조인후 감독님이 형한테 보내셨어요.”

    “아, 맞아. 작은 선물 하나 보낸다고 했어. 뜯어 보자.”

    우리는 별생각 없이 박스를 뜯었다.

    그리고 그 안엔, 접이식 자전거가 들어 있었다.

    “웬 자전거를 보내셨지?”

    “헐…! 이거…!”

    지훈이 자전거를 꺼내 힘껏 펼쳤다.

    여타 자전거보다 작은 바퀴.

    단순하지만 고전적인 구조.

    은갈색 몸체.

    난 자전거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건… 한눈에 봐도 명품인 걸 알겠다.

    지훈은 입이 떡 벌어져선 말했다.

    “형… 이거 영국 자전거예요. 겁나 비싼 건데?”

    “어, 얼만데?”

    “삼… 사백?”

    “삼사백?!”

    이걸 ‘작은’ 선물이라고 보냈다고?

    조인후 감독도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감사 인사부터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거니, 받지 않았다.

    해외에 간다고 했으니… 자는 중인가?

    지훈은 우와― 우와― 하며 안장을 체결했다.

    타 봐도 되냐는 애원의 눈을 보내며.

    “같이 타자. 아껴서 뭐 해.”

    “정말요? 정말 그래도 돼요? 이거 제 드림카랑 맞먹는 건데.”

    “괜찮아, 타. 하지만 개시는 내가 할래.”

    탈고도 했으니, 난 그럴 자격 있다.

    난 그렇게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집에서 멀지 않은 천변의 자전거 도로를 향해.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렸다.

    시들어가는 풀 냄새.

    초겨울의 바람.

    온몸의 세포가 깨어났다.

    몇 주 동안 머릿속에서 <등>이 떠나지 않았다.

    퇴고와 일본어 번역을 동시에 진행해서 그런가.

    북 콘서트를 열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가.

    유난히 힘을 많이 들어간 소설이었다.

    자전거는 부드럽게 나아갔다.

    세상의 풍경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신이 났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싹 비워지는 기분.

    머릿속엔 앞으로의 계획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이 새로이, 그러나 가볍게 내려앉았다.

    첫 번째, 독일 시장 진출.

    독일에서의 연락이 답답하리만큼 안 온다.

    가끔은 내 쪽에서 먼저 움직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들 역시 날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답답해도 조금 더 기다려 보자.

    두 번째, 미국 시장 진출.

    유럽에서의 성공을 후광 삼는 방법도 있지만 새로운 전략을 짜는 게 좋겠지.

    작가로서의 내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슬슬 생각을 해 봐야겠군.

    “흠….”

    나는 더 강하게 페달을 밟았다.

    새 자전거 때문이었을까.

    뭐든 게 잘 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 * *

    몇 시간 동안 라이딩을 하고 돌아왔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몸에 열이 올랐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한겨울이 오기 전에 많이 타 놔야지.

    그나저나 현관에 또 다른 택배가 와 있었다.

    일본에서 온 국제 우편.

    나는 바로 알아봤다.

    택배를 열어 보니 역시나.

    <도마크 연말 작품집 ― 가족>

    보랏빛 바탕에 은색 로고라.

    어딘가 서글픈 느낌이 나는군.

    제목의 이미지에 맞춘 거겠지.

    <희>가 실린 이 작품집.

    한국어로 번역될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희>를 내 단편집에 넣을 순 있겠지.

    나는 그 책을 <내외인> 옆에 꽂아 두었다.

    샤워를 하고 지훈과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중식.

    쟁반짜장, 볶음밥, 깐쇼새우.

    양호한 조화로군.

    “형, 원고 보내니까 신라문학에서 답장 왔어요. 최대한 빨리 발간하겠다고.”

    “잘했어. 책 나오자마자 내 홈페이지랑 신―문학에도 올릴 거야.”

    “일본어 버전은요?”

    “퇴고랑 동시에 진행했어. 올리기만 하면 돼. 금홍 샘한테도 퇴고 진행하면서 바로바로 원고 전달했고.”

    “와… 괴물이에요?”

    뭐, 나야 일본어가 거의 모국어였으니.

    일반 번역가보다 빠를 수밖에.

    “아, 형. 일본에서 재밌는 일 있는 거 알아요?”

    “재밌는 일?”

    “뭐, 그렇게 신경 쓸 건 아닌데. 이것 좀 보세요.”

    지훈은 짹짹이 피드를 열어줬다.

    그 피드에는 웬 투표란이 나와 있었다.

    투표 대상은 도마크 연말 작품집의 열 작품.

    “이게 뭐야?”

    “일본 문학 팬들이 이번 도마크 연말 작품집을 대상으로 인기투표를 시작했거든요.”

    “그래?”

    “그런데 도마크 쪽에서 막았어요. 작가들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고.”

    “그럼 이건 뭔데?”

    “도마크에서 공식적으로 연 인기투표예요. 기존의 방식과 동일하지만, 결과는 1위부터 3위까지만 공개되는 방식으로. 음… 작가들 속상하지 않게 하되 팬들은 즐길 수 있게?”

    …미쯔하루 편집장이 애쓰는구나.

    난 휴대폰을 지훈에게 줬다.

    “별로 관심 없는 얼굴이네요?”

    “글쎄, 별로. 굳이 저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는데.”

    “음… 팬심?”

    “팬심?”

    “네. 팬들이 작가들에 대한 마음을 풀 데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하는 거죠. 그리고 일본은 아이돌의 나라 아니겠습니까. 팬들도 자기주장이 강하다니까요. 그래서 도마크도 원청 봉쇄는 못 한 거죠.”

    “그래도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좋아하는 작가가 1위를 했으면 하는 건가?”

    “당연하죠. 형은 덕후의 마음을 몰라. 누가 1위 할 것 같아요?”

    “히루키.”

    나는 바로 말했다.

    “당연한 거 아냐? 국민 작가잖아.”

    “흠… 저도 동의. 그리고 형도 순위권에 들 것 같아요.”

    “외국인한테 투표를 할까? 자국 작가들 두고.”

    “일본 팬들 형 작품 좋아한다니까요? 아무튼 3위 안에 들면 형 SNS에 뭐라고 남겨야 해요, 알았죠?”

    “알았어. 감사 인사 남기면 되지?”

    “잘하고 있어요. 그렇게 팬 관리를 하는 거죠.”

    지훈이 눈을 빛냈다.

    ‘팬 관리’라니.

    전생의 나라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현대의 작가란 어쩐지 연예인 같은 데가 있다.

    언론을 상대해야 하고, 팬들을 신경 써야 하고….

    나도 참, 별일을 다 해 본다.

    * * *

    독일의 뮌 출판사.

    독일의 제일가는 출판사답게 그 규모는 방대했다.

    특히 전 세계의 명저를 다루는 해외문학팀.

    해외문학팀엔 총 5개의 팀과 5명의 팀장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도미닉 팀장은 가장 관록 있는 베테랑.

    그는 오늘 4명의 팀장을 회의실로 모았다.

    “오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외인> 출판 건에 대해 협의를 하고 싶습니다만.”

    “…또요? 그건 이미 안 내기로 결과가 나온 거 아닙니까?”

    “맞아요. 1 대 4로 반대표가 더 많았잖아요.”

    팀장들이 살짝 반발했다.

    뮌 출판사는 기본적으로 다수결제였다.

    워낙 출판사 몸체가 크다 보니 생긴 제도였다.

    지금까지는 가장 합리적이라 평가받지만, 단점은 소수의견이 묵살된다는 점.

    지금 뮌 해외문학팀의 다수의견은 이렇다.

    프랑스에서 발굴한 신인 작가.

    그런 작가의 책을 좋다고 내는 거?

    자존심이 허락할 리가.

    한 팀장이 슬쩍 말했다.

    “입장을 바꿔서, 만약 우리가 이상을 먼저 발굴했다면 리브레가 책을 냈을까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안 낼 거였다.

    낸다 해도, 수년이 지난 후에나 가능하겠지.

    그때쯤 되면 발굴 국가는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

    팀장들이 한 마디씩 의견을 덧붙였다.

    “프랑스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외인>은 독일 문단이 선호하는 스타일과 거리가 멀어요.”

    “맞아요. 프랑스가 <내외인>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어요. 작품의 형식이 아주 실험적이고 파격적이잖아요.”

    “그런 스타일은 독일 독자들이 선호하지 않죠. 클래식한 멋이 떨어지니까요. 이런 소설은… 독일 문학 시장에서 ‘상품성’이 없어요.”

    프랑스에서의 장점이 독일에선 단점으로 작용한 말.

    도미닉 팀장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도 뛰어난 팀장들이었다.

    모두 일리 있는 말들이었고.

    ‘하지만 마음을 움직일 순 있지.’

    “그래서 제가 변수를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일본으로 가족 여행을 갔다가 구한 이상 작가의 다른 소설, <희>를요.”

    “뭐… 그렇기야 하지만….”

    “일찍이 독일어 번역본을 나눠 드렸죠? 혹시 안 읽으신 분 계십니까?”

    아무도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도미닉 팀장은 씩 웃었다.

    ‘구미가 당기는 작품을 쓰는 작가인 건 분명하군. 읽으라고 강요한 적도 없는데 말이야.’

    도미닉 팀장은 이상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번 회의에서 <내외인> 출간에 혼자 찬성표를 던진 이도 바로 그였다.

    그가 문학을 보는 관점은 보통의 독일인과 좀 달랐다.

    ‘정제된 형식미? 클래식한 멋? 파격적 실험? 개나 주라지. 그런 건 부차적인 거야.’

    문학은 예술이다.

    예술은 인간의 흥미와 구미를 당기게 해야 한다.

    고차원적인 미학으로 그걸 가능하게 한다면 더할 나위 없고.

    그리고… ‘이상’의 글엔 분명 그런 힘이 있다.

    일본에서 연말 작품집을 가져왔을 때, 미쯔하루 편집장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 독일 쪽에서 이상 작가의 책을 출간하지 않는 이유가 짐작이 갑니다만… 저라면 다른 출판사가 움직이기 전에 어떻게든 출간을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외인> 출간 건은 이미 ‘반대’로 끝난 사항이니….’

    도미닉 팀장이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우리 뮌을 통해 <희>를 발표하는 일을 투표에 부치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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