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90화 (90/204)
  • 90화

    신라문학 이준환 편집위원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난 살짝 놀랐다.

    “박조운 편집장님….”

    “이상 선생, 오랜만이구만.”

    “간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모처럼 박조운 편집장이 와있었기 때문이다.

    신―문학 사업이 잘돼서 그런가.

    호랑이 같던 인상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얼굴만 좋아. 몸은 안 아픈 곳이 없어요. 안 본 사이에 스타가 됐던데? 뉴스에서 지겹도록 틀어 주더만.”

    루브르 얘기구나.

    이쯤 되니 부담감도 안 느껴진다.

    이젠 김미소 작가가 ‘루브르의 남자’라고 놀려도 웃을 수 있을 지경.

    “과찬이십니다. 앤솔로지 심사를 마쳤다고 들었는데요. 책은 언제쯤 나오나요?”

    이준환 편집위원이 대답했다.

    “지금 표지 들어갔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나올 겁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아… 그리고 <등> 말인데요. 전화로 말씀드린 것처럼 출간하기로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편집위원님.”

    라고 말은 했지만… 그는 뭔가 꺼려 하는 눈치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물으려 할 때였다.

    박조운 편집장이 끼어들며 말했다.

    “아~ 난 그 소설 너무 좋았어. 강렬하고, 마초적이고, 천재의 광기가 느껴지는데… 그 와중에 섬세한 부분이 있단 말이지.”

    “…다행입니다. 완성본이 아니라 좀 불안했습니다.”

    “무슨 소리. 좋은 글은 초고만 봐도 아는데. 그건 그렇고…”

    박조운 편집장이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등>에 대해 신라문학이 제안한 게 있어서요.”

    제안?

    그러잖아도 통화할 때 이준환 편집위원이 그랬지.

    <등>에 관련해 상의할 게 있다고.

    “뭐, 긴장하진 마세요. 좋은 일이니까. 사실 신라문학에 대한 이상 선생의 팬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예?”

    내가 책을 내는 유일한 출판사에?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들을 하는데…?

    이준환 편집위원이 말했다.

    “이상 작가가 신간을 내는데, 신라문학이 뭔가를 해 줬으면 하는 거죠.”

    “뭘 그렇게 돌려 말하나. 프랑스 출판사는 루브르 앞에서 낭독회까지 시켜 줬는데, 신라문학 니들이 이상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냐? 이 말이지. 껄껄껄!”

    박조운 편집장이 호쾌하게 웃었다.

    음… 사과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박조운 편집장은 오히려 즐거운 듯했다.

    “틀린 말이 아니긴 해요. 상황이 상황이긴 했지만, 이렇다 할 행사 하나 없이 책을 내왔던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연말이고 하니 일을 벌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발간 기념회를 열자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박조운 편집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등>의 출간 시즌에 북콘서트를 열면 어떨까 합니다.”

    북콘서트.

    작가가 지인과 팬을 초대해서 여는 작은 파티.

    발간 기념회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좀 더 격식 없는 분위기로 즐긴다는 장점이 있지.

    가수나 다른 예술가를 초청하는 경우도 있고.

    “어떻습니까? 해 보시겠습니까?”

    하면야 당연히 좋았다.

    연말 콘서트처럼,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념으로.

    “신라문학 쪽에서 제 매니저와 함께 진행을 맡아 주신다면 할 의향이 있습니다. 아니, 아주 재밌을 것 같습니다.”

    발간 기념회가 언론을 상대하는 자리라면.

    북 콘서트는 팬들을 상대하는 자리다.

    ‘이상’의 팬들을 만나 볼 좋은 기회.

    “잘 됐군, 안 그래?”

    박조운 편집장이 이준환 편집위원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준환 편집위원은 뭔가 꺼림칙한 얼굴이었다.

    “그 얘길 해 드려야지. 중요한 얘기잖아.”

    “아이고, 이 사람아. 그거 신경 쓰지 말라니까.”

    “제가 더 알아야 할 게 있는 겁니까?”

    “아, 그게. 별 건 아니고.”

    이준환 편집위원의 얼굴은 별 게 아닌 게 아닌데?

    “<등>의 출간은 아무래도 연말을 넘기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지금 신라문학에서 연말까지 행사가 가능한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거든요.”

    “그게 언제입니까?”

    “12월 마지막 주 일요일. 그러니까 28일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이내 알 것 같았다.

    한 해의 마지막 주 주말.

    모든 예술 문화계에서 상 나눠 주기에 열을 올릴 시기.

    문학계도 예외는 아니고….

    “대한문학상 시상식과 겹치는군요.”

    이준환 편집위원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걱정했던 거였군.

    괜한 소란이 일어날까 봐.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애초에 그날에 행사 일정이 비어 있던 것도, 대한문학상 시상식과 겹치지 않게 하려 했던 겁니다만….”

    “그래도 이왕 하는 거, 눈치 보지 말고 하자 이거요. 이상 선생도, 연말에 책을 내고 북콘서트를 하는 게 좋을 것 아니오? 뭐… 연초로 미루고 싶다면야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

    “아니요.”

    난 딱 잘라 말했다.

    “연말에 하고 싶은데요. 발간도, 북콘서트도.”

    처음부터 연초에 발간될 일정이라면 모를까.

    대한문학상 시상식을 피해 발간을 미룰 이유?

    전혀 없지.

    “음… 박조운 이 사람은 상관없다 하지만, 난 말리고 싶어요.”

    이준환 편집위원이 말했다.

    “우리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아요. 이미 신라문학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고, 대한문학상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지도 오래니까.”

    “북 콘서트를 걱정하시는 거군요.”

    “맞아요. 대한문학상의 권위가 아무리 예전 같지 않다 해도, 대부분의 문단 사람이 그날 그곳에 다 모일 겁니다. 좀 더 거칠게 말하면, 생각하시는 것보다 콘서트가 초라해질 수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팬들과 함께하는 북 콘서트라 해도, 문단의 지인들을 초청하는 게 관례.

    그 과정에서 겪을 불편함과 신경전.

    대한문학상과 북콘서트에 대한 무의미한 비교들.

    이준환 편집위원은 바로 그걸 걱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내가 일정을 바꿀 이유는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좀 적게 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행사장에 사람이 많은 걸로 뭔갈 증명할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요.”

    “….”

    “하겠습니다. 28일에.”

    * * *

    이상이 신라문학을 떠났다.

    사무실에 남은 박조운 편집장과 이준환 편집위원.

    이준환 편집위원이 걱정스럽게 운을 띄웠다.

    “정말 괜찮을까.”

    “뭐 어때. 뭐가 겁나?”

    “웬만하면 잡음이 적은 게 좋으니까. 우리에게도, 작가에게도.”

    잡음이 생기는 건 쉬워도 없애는 건 어려운 일.

    갈등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다.

    특히 이 좁은 출판계와 문단에서는 더욱.

    하지만 박조운 편집장의 생각은 달랐다.

    “대한문학상이 같잖은 짓 하는 게 일이 년이야? 친한 작가들 우대하며 상 나눠 주기에, 예심 심사위원 압박에….”

    듣기 싫어도 소문은 들려오기 마련.

    원로라는 자리는 원래 그런 법이었다.

    박조운 편집위원은 혀를 쯧 하고 찼다.

    “특히 가사라대 그놈들 매해 상 가지고 장난질 치는 거 못 봐 주겠어. 없어져 버리라 해. 그따위 상.”

    “과격하긴.”

    “지네 입맛에 맞는 작가 고르고 적선하듯 상장 주는 게 무슨 문학상이야? 허울뿐인데.”

    “알아. 그 말이 백번 옳은 거.”

    이준환 편집위원은 나지막이 말했다.

    “다만 첫 북콘서트를 이런 형식으로 내주는 게 좀… 그리고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잖아.”

    “그것까지 감당하겠다는 거야. 이상 선생은.”

    “….”

    “상처받을 걸 각오하고서라도 자기 속도를 지키겠다는 거지.”

    박조운 편집장은 이준환 편집위원의 어깨를 툭 쳤다.

    “아무튼, 우린 책이나 잘 내고 북 콘서트 준비나 하자고.”

    박조운 편집장이 나간 후.

    이준환 편집위원은 양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생각했다.

    ‘대한문학상… 한때는 그 권위를 따라올 문학상이 없었지.’

    격세지감(隔世之感).

    모든 문인이 꿈꾸던 상이 어쩌다 이 꼴이 됐나.

    문청 시절, 자신 역시 그 상을 동경했고.

    …씁쓸했다.

    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받아들여야 한다.

    ‘문학상’이라는 것도, 그 본질을 잃으면 아무 가치 없는 쇼에 불과하다는 걸.

    이준환 편집위원은 마음을 다잡았다.

    * * *

    일본 도마크 출판사.

    미쯔하루 편집장은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었다.

    연말에 책을 내고 싶은 작가가 한둘이 아니다.

    그만큼 편집장의 일거리도 쌓일 수밖에.

    그래도 그는 이 연말을 잘 버티는 중이다.

    이십여 년 경력의 ‘샐러리맨’의 근성이랄까.

    똑똑!

    “들어와요.”

    “편집장님.”

    한 직원이 책을 들고 들어왔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그 책부터 물끄러미 봤다.

    “뭐가 새로 나왔나?”

    “연말 작품집이 나왔습니다.”

    “아, 그런가?!”

    미쯔하루 편집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다가가 책을 받았다.

    “이게 나와야 한 해가 갔단 느낌이 든다니까. 표지 잘 뽑았네. 아주 고급스러워.”

    채도가 낮은 보랏빛 바탕에 깔끔한 은색 로고.

    [도마크 연말 작품집 ― 가족]

    한눈에 들어오는 글자가 딱 마음에 들었다.

    “바로 시장에 풀라고. 머뭇거릴 것 없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똑똑!

    누군가가 또 노크를 했다.

    미쯔하루 편집장의 개인 비서였다.

    “또 뭔가?”

    “독일 뮌 출판사에서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아, 바로 모셔 줘. 제1응접실로.”

    미쯔하루 편집장은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졌다.

    독일의 뮌 출판사.

    명실상부 독일의 대표적 출판사였다.

    어제 오후, 뮌 출판사 해외문학팀 팀장 도미닉 크로스에게 연락이 왔다.

    일본으로 가족 여행을 왔으니 얼굴이라도 보자고.

    도미닉 크로스 팀장.

    뮌 출판사를 지금의 자리로 이끈 개국공신.

    미쯔하루 편집장의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제1응접실로 향했다.

    회색 양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벽안의 신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미닉 팀장님.”

    “미쯔하루 편집장님.”

    두 사람은 영어로 말문을 열었다.

    “재작년에 편집장님께서 뮌을 찾아 주신 이후로는 처음이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격조했습니다. 하하….”

    그래도 그간 오고 간 메일이 수십 통이었다.

    그만큼 도마크와 뮌의 관계는 가까웠다.

    “가족 여행을 오셨다고 했는데, 가족분들이 서운해하시겠네요.”

    “하하… 제가 여기 온다니까 와이프는 더 좋아하던데요.”

    그의 위트에 미쯔하루 편집장이 웃었다.

    “어떻게, 일본은 잘 구경하셨습니까?”

    “네. 정말 좋더군요. 내일이면 귀국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두 사람은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소개’를 통해 양국에 발간된 책에 대한 것이었다.

    한참 수다를 떨던 도미닉 팀장이 책장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응접실이 정말 멋지군요? 저게 다 도마크의 책입니까?”

    “맞습니다. 천천히 보시죠. 혹시 일본어는…?”

    “죄송합니다. 한자 문화권 언어는 다 젬병이라서요. 배워 보려고 했는데, 어려워서 포기했죠.”

    그는 웃으며 책장을 훑어보았다.

    “이쪽을 보시죠. 이쪽이 신간입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책들을 가리켰다.

    도미닉 팀장은 그 책들을 손끝으로 하나씩 짚었다.

    “멋지군요. 이건 뭐라고 쓴 겁니까?”

    “아, 이건 도마크의 연말 작품집입니다. 무라카미 히루키의 작품이 실렸죠.”

    “흠… 읽어 보고 싶군요.”

    “연말 작품집은 국내용이라서요. 하지만 히루키 작가의 다음 작품집에 실릴 겁니다.”

    “그럼 기다려야겠군요.”

    “아, 그리고 이번에는 특별히 한국의 이상 작가의 작품도 실렸답니다.”

    “…이상이요?”

    도미닉 팀장이 눈을 빛냈다.

    “네. 이번에 루브르 앞에서 낭독회를 가진 이상 작가 말입니다.”

    “음… 그분을 여기서 만나는군요.”

    도미닉 팀장은 연말 작품집을 목차를 살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뮌 쪽에서도 이상 작가의 작품 발간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왔을 리 없는데… 물어볼까?’

    미쯔하루 편집장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도미닉 팀장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이 책, 혹시 제게 주실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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