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88화 (88/204)

88화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파리에서의 일들도 이젠 먼 옛날 같다.

어제는 조인후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독일 영화제에 잠시 들렀다가, 몽테뉴 영화제 폐막에 맞춰 파리로 다시 왔다고 했다.

― 작가님이 계속 프랑스에 계셨으면 함께 폐막식에 참석했을 텐데요.

그는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폐막식은 곧 영화제 시상식.

영화인들이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나타나는 자리에 내가?

생각만 해도 불편하다.

다만, 영화 <내외인>의 수상 여부가 궁금하긴 하다.

<내외인>은 감독상과 극본상에 노미네이트 됐다.

듣기론 감독상 수상이 유력하다던데….

뭐가 됐건 잘 됐으면 좋지.

나는 작업실에서 <등>의 원고를 살폈다.

며칠 전, 나는 <등>의 초고를 지훈에게 보여 줬다.

그때, 지훈은 입을 떡 벌렸다.

“…그새 장편을 썼어요? 얼마 전에 일본에 단편 원고 보냈잖아요.”

“파리에서부터 썼어. 초고니까 거친 곳이 많을 거야. 보고 말 좀 해 줘.”

“와… 형 기계예요?”

다시 생각해도 웃긴 말이다.

기계라니.

그나저나 지훈은 오전에 나가서 소식이 없다.

<등>의 감상을 듣고 퇴고에 들어갔으면 하는데….

마침 작업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보니 지훈이 신발을 벗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다녀와?”

“지도 교수님 만나고 왔어요.”

“정미현 교수님? 왜?”

“석사 논문, 고생 많이 했다고 밥 사 주셨거든요.”

본받을 만한 사제관계다.

교수들은 제자가 논문을 쓰면 뜯어먹기 바쁜데.

정미현 교수는 지훈을 많이 아낀다.

제자이자, 후배 평론가기 때문이겠지.

지훈은 인수대에 있기 아까운 인물이다.

하지만 저런 든든한 교수가 있으면 말이 달라지지.

“박사 진학하라고 하시지?”

“그렇죠, 뭐.”

“네 생각은 어떤데?”

“갈 거예요. 공부를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죠. 평론가 활동에도 그게 좋고.”

석사 논문 힘들다고 우는소리 하던 송지훈이 맞나.

역시 사람은 성과를 내야 발전하는 모양이다.

뭐, 그럼 논문도 다 끝났다 이거지?

“저번에 준 소설, 혹시 읽어봤어?”

“아, 그 소설. 안 그래도 어젯밤에 다 읽었어요. 기다려요.”

뭘 기다려?

지훈이 작업실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웬 노트를 가져와 식탁 앞에 앉았다.

“장편이라, 필기를 좀 했어요.”

슬쩍 보니 노트가 빼곡하다.

보아하니 오늘 저녁밥은 내가 사야겠다.

지훈은 진지하게 말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 소설은 ‘시선’이 꽤 인상적이라는 점이에요.”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네. 이 소설은 3인칭이잖아요. 그런데 남자를 따라다니며 묘사하는 시선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그 시선 자체에 일단 의미를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소설은 마치… 남자의 등 뒤에 딱 붙어서 따라가는 것 같거든요.”

…좀 놀랐다.

내 의도를 정확하게 집어내다니.

“그 시선이 가진 의미는?”

“이 화가의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죠. 응원이기도 하고, 경외감이기도 하고. 나아가 독자들이 이 시선을 따라 이 화가를 바라보면… 소설은 완성돼요. 독자 역시 이 시선에 공감하게 될 테니까.”

“형식적으로는 어때? 스타일 말이야?”

“클래식한 스타일이에요. 형이 쓴 것 중에서 가장. 정석적으로 한 인물의 시간을 순차적으로 다루고 있잖아요. 그래서 구조적으로 굉장히 안정감 있어요. 전통 문학에 가깝죠.”

“맞아. 이 소설에서 ‘형식미’라는 건 시선을 통해 드러나게 되니까. 그 외의 형식은 클래식한 방법으로 풀어냈지.”

“아, 저 그 부분 좋던데요. 처음에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지훈은 노트에 적어 놓은 첫 문장을 읊었다.

“오직 한 가지만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맹인이거나 예술가다. 맹인은 어둠만을 보고 예술가는 자신이 창조할 세상만을 본다’ 이 부분이랑, 마지막 문장… 어딨더라?”

지훈은 노트를 뒤적거렸다.

마지막 부분이라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화가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화가의 이름만이 ‘천재’로 남았을 무렵.

그를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화랑 주인의 말이었다.

“아, 여깄다… ‘화랑의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림을 버리듯 팔고 바로 뒤돌아 가 버렸어. 얼굴을 볼 새도 없이 말이야. 난 그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지. 그리고 얼른 밖으로 달려 나가 그를 불렀어. 하지만 그는 귀머거리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가더군. 그가 어디로 갈지는 세상 누구도, 운명조차도 모를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자신만은 그 길을 아는 것 같았지. 난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멍하니 봤어. 그런데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어. 어렸을 적 처음으로 교회에 갔을 때, 날 은근히 감싸던 압도감과 엄숙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느끼고 만 거야.’”

지훈은 여운을 느끼듯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창조’라는 단어와 교회의 느낌… 소설의 완성도를 높여 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 부분은 의도한 게 아니었다.

난 자연스레 썼을 뿐이고, 그걸 지훈이 찾아낸 거다.

평론의 시선으로.

감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형의 저번 앤솔로지 소설 <새>에서 보였던 마초스러움, 그러니까 <새>의 마초이즘이 다소 가족적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좀 더 원숙한 마초이즘을 뽐내고 있어요. 세상 풍파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 길을 가겠다는 식이잖아요. 남자들이라면….”

지훈이 씩 웃으며 노트를 덮었다.

“환장할 만한 소설이죠, 이거. 천재에다가, 인생을 내던지는 열정을 보여 주는데. 저는 리뷰 끝!”

나는 느릿하게 박수를 쳤다.

이렇게 단시간 안에 장편을 분석한다는 거.

보통 능력이 아니었다.

“고맙다, 송 평론가.”

“뭘요. 저녁이나 사 주세요.”

“사 줄게. 말만 해.”

“아싸!”

지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지훈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이제 리뷰를 의식하면서 퇴고를 하면 될 텐데….

아, 그러고 보니.

“독일 쪽은 여전해?”

유럽 대부분 국가와 <내외인>을 계약했다.

서유럽에서 계약이 안 된 곳은 독일뿐이다.

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락 없어요. 차라리 리브레 때처럼 먼저 연락해 볼까요?”

“아니, 그러지 마. 일단 기다려.”

“하지만….”

“이건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야. 나에 대한 게 아니라… 프랑스에 대한.”

“어이가 없네요. 애들이야?”

“애들 같은 일이니까 굳이 끼어들지 말자고.”

그들은 <내외인>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나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아봤겠지.

이 상황에서 먼저 연락해서 좋을 것 없다.

여유를 갖자.

그들이 결국 날 찾을 수밖에 없을 때까지.

* * *

일본 도쿄.

무라카미 히루키의 작업실.

히루키는 도마크 연말 작품집 원고를 꺼냈다.

미쯔하루 출판장에게 부탁한 최종본이었다.

아직 묶이지도 않은 낱장의 원고들.

제일 먼저 살핀 건 목차.

히루키는 첫 번째.

이상은 열 번째, 즉 마지막 순서였다.

맨 앞 그리고 맨 뒤.

모두 의미 있는 배치.

미쯔하루 편집장은 원고를 보내며 이렇게 덧붙였다.

“분위기를 보고 작품을 배치했습니다. 다소 발랄하고 실험적인 소설은 앞으로, 진득하고 현실적인 소설은 뒤로 뒀지요.”

‘이상의 글이 진득하고 현실적이다?’

그가 아는 한, 이상의 글은 언제나 실험적이었다.

그래서 앞쪽에 배치될 줄 알았건만….

한술 더 뜨자면 자신과 맨 앞자리를 다툴 줄 알았다.

이상을 의식했던 걸까.

자신도 이번 소설엔 파격적인 변화를 줬으니.

‘제목이… <희>라. 여동생에 관한 걸 썼다지.’

비슷한 궁금증이 한 번 더 일었다.

그가 아는 한, 이상은 외동이었다.

‘형제가 없는 사람이 쓴 ‘여동생’ 소설이라. 그럴듯하기 힘들 텐데?’

히루키는 천천히 <희>를 읽어 보았다.

확실히 이전 소설들과는 달랐다.

가장 최근의 소설 <새>만 해도 어떤가.

‘내려다보는 시선’이 주는 마초이즘.

삼대의 남자들이 보이는 서로에 대한 애증.

그 모든 것들이 실험적 구성으로 빛나고 있다.

하지만 <희>는 아니다.

이 소설은 철저한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비 오는 서울역의 습기.

동생을 보내기 싫은 오빠의 마음.

동생의 애인에 대한 미움.

어찌할 줄 모르는 못난 오빠의 애달픔.

그 모든 마음이 히루키에게도 전달되고 있었다.

“이건… 진정성의 영역이다.”

모든 소설은 허구다.

허구에서 진정성을 획득하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렇기에 진정성 있는 소설의 힘은 강하다.

독자의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이렇게 ‘오빠’의 마음을 잘 아냐 이거다.

여동생이 있는 건 오히려 히루키 쪽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데면데면해진 여동생.

<희>를 보니, 문득 그 여동생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또한 괜스레 오빠로서 미안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건 마치… 정말로 여동생을 먼 곳으로 보낸 사람의 글 같잖아?’

그는 원고를 덮었다.

이상이라는 작가.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란 생각을 하며.

* * *

<등>은 총 12개의 장으로 되어 있었다.

<내외인>보다는 조금 더 많은 분량.

며칠 동안 <등>을 1차 퇴고했다.

그리고 오늘 오후, 제본을 맡겼다.

아직 최종본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남 보여주기 부끄럽진 않지.

제본을 가지고 찾아간 곳.

바로 신라문학이었다.

이준환 편집위원은 날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오세요, 이상 작가님. 프랑스에는 잘 다녀왔습니까?”

“네. 정말 즐거웠습니다.”

“루브르 앞에서 한 낭독회,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뉴스에서도 여러 번 틀어 줬지요.”

요즘은 어딜 가나 루브르 이야기를 한다.

물론 난 그때마다 멋쩍게 웃을 뿐이지만.

이준환 편집위원이 소파를 권했다.

그리고 커피를 내주며 내게 말했다.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려 했는데.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신라문학이 내게?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라, <내외인> 판매 추이가 다소 특이해서요. 말씀을 한번 드릴까 했죠.”

“특이하다면…?”

“사실 어떤 책이건 특별한 이슈가 없는 이상 판매율은 서서히 떨어지게 됩니다. <내외인>은 소설 부문에서 베스트셀러권에 머무른 지 오래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판매율이 떨어지고 있었죠.”

“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루브르 낭독회 이후 판매율이 다시 올랐어요.”

아하.

그렇게 된 거군.

귀찮기만 한 언론의 관심이 도움이 될 때도 있네.

“좋은 일이네요.”

“좋다마다요. 그리고 제가 한 가지 더 예상하자면….”

이준환 편집위원이 눈을 빛내며 내게 몸을 숙였다.

“지금 영화 <내외인>이 몽테뉴 영화제에 출품됐죠?”

“네. 내일이 폐막식입니다.”

“제 설레발일지도 모르지만, 저도 <내외인>을 봤습니다. 어떤 상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걸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영화 <내외인>이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 그 반동으로 소설 <내외인>의 판매율은….

“이쪽 판매율도 오르겠군요.”

“오르는 정도가 아닙니다. 치솟게 되죠.”

“….”

“원래 상이란 게, 국내보단 해외의 권위를 더 쳐주잖습니까.”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이렇게 된 거, 내가 그 말을 마무리해줬다.

“까놓고 말하자면 유럽이면 더하고요. 그렇죠?”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간접적인 이익이 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걸 여기서 논해 봤자 무슨 의미겠는가.

엄연히 말하면 그건 조인후 감독의 작품이니, 나야 좋은 소식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아, 그나저나 제가 신라문학을 찾아온 이유는…”

나는 가지고 왔던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소설을 좀 투고하려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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