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오늘은 마지막 리브레 클럽이 있는 날.
나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호텔 창문을 열고 하늘부터 봤다.
쨍하게 푸른 하늘.
미약하게 풍겨 오는 아침 신문 냄새.
갓 구운 빵과 커피 냄새.
청명한 가을 날씨.
…완벽하다.
호텔 앞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새 소설의 초고를 쓰기 시작하며.
소설을 쓰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그리고 다섯 시쯤.
나는 지하철을 타고 파리 1지구로 갔다.
이내 도착한 루브르 박물관 앞 광장.
과연 루브르.
관광객들 천지라, 여기가 어느 나라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아, 이상 작가님.”
행사 준비를 하고 있던 장 스테판이 다가왔다.
날이 날이니만큼 그도 꽤 멀끔했다.
“보세요. 마음에 드세요?”
미리 쳐 놓은 펜스 안의 행사장.
루브르의 상징, 투명 피라미드를 등진 곳.
그곳엔 다섯 개의 의자가 나란히 있다.
나와, 낭독자 네 명의 자리였다.
그 앞으로 관현악단처럼 의자가 펼쳐져 있고.
…생각보다 규모가 너무 큰데?
좀 걱정이 되어 장 스테판에게 슬쩍 물었다.
“멋지긴 한데… 너무 길을 막는 거 아닐까요?”
“괜찮아요. 시청에 신고도 했고요. 루브르 앞에서 별별 행사 다 해요. 초콜릿도 나눠 주고, 악단이 연주도 하고. 책 좀 읽겠다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함께 온 에바 편집위원이 말했다.
“벌써부터 사람이 몰려들려고 하네요. 그런데 작가님, 못 보던 옷이네요?”
그녀는 내 세미정장을 가리켰다.
오늘의 행사를 위해 어제 한 벌 산 것이었다.
“잘 어울려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낭독자분들과 가서 앉으시면 되겠어요.”
그녀가 피라미드 앞 의자들을 가리켰다.
어느새 네 명의 낭독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17지구에서 2장을 통째로 낭독한 노인.
“저분도 오셨군요.”
“낭독자 신청을 받았는데, 신청서를 아주 정성스럽게 쓰셔서 뽑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에바 편집위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는 자리로 다가갔다.
낭독자들은 일어나서 한 명씩 나와 악수를 했다.
“또 만나네요.”
나는 노인에게 말했다.
장 스테판이 그 말을 통역해 줬다.
“오늘은 당신을 판단하러 온 게 아닙니다.”
“….”
“당신은 똑똑하니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나는 미소를 건네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파리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이들에게 ‘판단’의 대상이었다.
‘동양인 작가’가 얼마나 잘 하는지 보자는 그 눈빛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나와 내 작품은 충분히 존중받고 있었다.
수십 명의 리브레 클럽 회원들이 자리했다.
그들은 모두 무릎에 <내외인>을 올려 두고 있었다.
뭔가를 시작한다는 걸 감지했는지.
사람들도 슬슬 몰려들어 우릴 둥그렇게 감쌌다.
사회는 따로 없다.
정말로 ‘읽기만’ 할 거니까.
처음 리브레 클럽을 시작했을 때의 결심처럼.
나는 <내외인> 책을 폈다.
그러자 낭독자들과 클럽 회원들도 책을 폈다.
좋다.
시작하자.
오늘은 내가 각 장의 첫 문단을 읽기로 했다.
프랑스어가 아닌, 한국어로.
나는 마이크에 대고 <내외인>을 읽기 시작했다.
“남자1은 오늘 아침, 자살을 결심했다. 그것은 대단히 이성적인 결정이었다. 그의 출생, 현재의 삶의 조건, 다가올 미래. 모든 것을 따져 봐도 그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계속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비이성적인 결정이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시끄럽던 관광객들도 순간 내 목소리에 집중했다.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할 텐데도.
나는 1장을 읽을 낭독자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다음 문단을 이어 읽기 시작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뉘엿뉘엿 해가 져 가는 노을 진 하늘.
내가 등지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
내 작품을 읽는 목소리.
내 작품을 따라 읽는 눈동자.
…모든 작가가 꿈꾸는 삶.
나는 바로 그 삶을 살아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남몰래 미소 지었다.
파리에 오길 잘 했다.
* * *
마지막 리브레 클럽이 끝난 후.
리브레 관계자들과 나는 리브레 출판사로 왔다.
해외문학팀 사람들이 소소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파티라고 해 봐야 와인과 카나페 정도지만.
어쨌건 진심이 묻어나는 환대였다.
“아까 분위기 정말 좋았죠? 루브르 앞에서.”
“나중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사고 날까 조마조마하더라니까요.”
“그래도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에요. 솔직히 리브레 클럽,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소소한 시민 행사였는데 이번 일로 그 규모가 정말 커진 것 같아요.”
“맞아요. 이상 작가님 덕에 우리 해외문학팀 기도 좀 살았고요.”
그들은 까르르 웃었다.
에바 편집위원이 피식 웃더니 내게 말했다.
“리브레는 해외문학팀보단 국내문학팀이 강세거든요.”
“그래요?”
“프랑스인들이잖아요.”
에바 편집위원은 뻔하지 않겠냐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또각― 또각― 또각―
날카로운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다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마리옹 편집장이 있었다.
“엇… 저는 다른 팀 다 퇴근한 줄 알고.”
에바 편집위원이 얼른 말했다.
“저만 남아 있어요. 리브레 클럽이 성황리에 끝났다죠?”
“네. 곧장 오는 길이에요. 이상 작가님께서 내일 출국을 하셔서, 간단한 파티를 하는 중이었어요.”
마리옹 편집장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언제 봐도 얼음장 같은 여자다.
“이상 작가님.”
“네.”
“장 사원과 함께, 잠깐 저를 좀 보실 수 있을까요?”
“…그럼요.”
나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색이 된 장 스테판과 함께 그녀를 따라갔다.
마리옹 편집장의 사무실.
나와 장 스테판은 그녀와 마주앉았다.
이 사무실, 그녀의 인상처럼 깔끔하군.
“저 때문에 지금껏 기다리신 건가요?”
내가 물었다.
그녀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래요.”
그녀는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작은 선물 상자였다.
“먼 나라에서 오셔서, 한 달이나 리브레의 행사에 참여해 주셨는데… 편집장으로서 해 드린 게 없는 것 같아서요.”
“이게 뭐죠?”
“제가 좋아하는 프랑스 브랜드, 몰리나르의 향수예요. 무난한 향을 골랐는데 어떨지 모르겠군요.”
마리옹 편집장은 살짝 경직된 말투로 말했다.
호의를 베푸는 게 익숙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기쁘게 그 선물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네요.”
“그리고 논의 드릴 일이 있습니다만.”
“뭐죠?”
“작가님의 에세이 <다시 사는 일>, 저희 리브레에서 내실 의향이 없으신가 해서요.”
마리옹 편집장은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세요?”
“그게… 정말, 편집장으로서 부끄럽기 때문이죠.”
마리옹 편집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작가님의 잠재력을 제가 알아보지 못했어요. 유능한 직원들이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겠죠.”
마리옹 편집장은 무슨 말을 더 덧붙였다.
장 스테판은 그 말을 통역하지 않았다.
“편집장님이 뭐라고 말씀하신 거죠?”
“음… 방금 한 말, 에바 팀장님껜 비밀이라고….”
“Mousier, Jang…!(이봐요, 장 사원…!)”
눈치 없는 장 스테판은 결국 한 소리를 들었다.
나는 푸핫 하고 웃고 말았다.
그리고 장 스테판이 정말 혼나기 전에 대답했다.
“리브레가 제 에세이집을 내주신다면 영광이겠죠.”
마리옹 편집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일을 진행해도 될까요?”
“네. 지금 당장은 좀 갑작스러우니 메일로 진행하시죠.”
“그럼 그렇게 하죠, 작가님.”
난 그렇게 에세이집을 발간을 가계약했다.
문학에 열정적인 사원과 팀장.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편집장.
루브르 앞에서 독서클럽을 열 수 있는 자본.
리브레 출판사는 꽤 괜찮은 곳이니까.
“저는 그럼 다시 파티에 참석해야 할 것 같은데요.”
“네. 그러셔야죠.”
편집장 사무실을 나가기 전.
마리옹 편집장은 내게 말했다.
“새 장편을 쓰신다죠?”
“소문이 빠르네요.”
“소문이 자자하다는 게 더 맞겠죠.”
“그 말을 들으니 더 열심히 써야겠네요.”
마리옹 편집장은 조심스레 말했다.
“새 작품을 쓰면, 그때도 저희 리브레를 염두에 두셨으면 해요.”
“음… 아직 계약을 말하긴 일러서요.”
“이해해요.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어서요.”
“생각이라면….”
“작가님의 다음 작품은… 발간되자마자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을 놀라게 할 것 같아서요.”
나는 겸손의 말을 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녀 역시 공치사를 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마리옹 편집장님.”
“자, 그럼 어서 가서 파티를 즐기도록 하세요. 전 이만 퇴근을 해야겠네요.”
“또 뵙죠.”
“안녕히 가세요. 이상 작가님.”
마리옹 편집장이 환한 미소를 보내 주었다.
나는 장 스테판과 사무실을 나섰다.
“와우!”
장 스테판이 경탄했다.
“왜 그래요?”
“마리옹 편집장님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봐서요.”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 리브레도 보면 볼수록 재밌는 사람이 많다.
다만, 마리옹 편집장의 마지막 말은 틀렸다.
― 작가님의 다음 작품은… 발간되자마자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을 놀라게 할 것 같아서요.
내가 바라는 건 프랑스도, 유럽도 아니었다.
전 세계.
나는 내 작품을 전 세계에 내보이고 싶으니까.
* * *
귀국은 오후 비행기였다.
느지막이 일어나 호텔 조식을 먹고 짐을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
마리옹 편집장이 선물해 준 몰리나르의 향수.
칙―
손목에 뿌려 냄새를 맡았다.
이국적이면서도 프래쉬한 향기가 풍겨 왔다.
마음에 든다.
파리에서의 추억처럼.
호텔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와 택시를 탔다.
장 스테판이 데려다주겠다 했지만, 그의 업무 시간이라 극구 거절했다.
또, 혼자 택시 정도는 탈 수 있고.
샤를 드골 공항은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입국 수속을 마친 후.
대기 벤치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파리에서 <내외인>으로 많은 일을 했다.
아랍인들의 낭독.
노인들의 낭독.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브르 앞에서의 낭독.
아, 로베르 감독을 만나기도 했지.
<희>의 초고를 완성하고.
새 소설의 구성을 짜기도 했고.
아직 제목을 정하진 못 했지만.
그러고 보니 제목, 제목이라….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문득, 소설 속 화가의 등이 떠올랐다.
나는 내내 그의 등을 생각하며 소설을 구상했으니.
당연한 일이려나.
“등….”
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 단어, <등>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아 보자고.
그 제목의 의미를 작품을 통해 전달해 보자고.
우웅― 우웅―
장 스테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난 공상에서 깨어나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이상입니다.”
― 작가님, 공항에는 잘 도착하셨습니까?
“그럼요. 지금 탑승 대기중입니다.”
― 다행이네요. 알려 드릴 게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뭔가요?”
수화기 너머가 떠들썩했다.
에바 편집위원이 뭐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 오늘 아침에, 이번 달 리브레 출간도서 판매 순위가 업데이트되어서요.
“그런가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말이 돌아왔다.
― …축하드립니다, 작가님. <내외인>이 20위를 차지했어요.
20위.
…잠깐, 20위면?
― 오늘부로 <내외인>은 리브레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