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85화 (85/204)

85화

“신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해요.”

내가 말했다.

두 감독과 최오준 배우, 그리고 통역까지.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당연히 종교적인 신을 의미하는 건 아니고요. 상징적으로요.”

“좀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만.”

로베르 감독이 턱을 괴고 물었다.

“살아가며 기대고 믿는 것들이 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 가족, 부유함, 명예… 이런 외적인 조건과 잣대를 모두 버리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에너지라고 할까요.”

“아, 저 그 마음 이해가 돼요. 실현할 자신은 없지만….”

최오준 배우가 홀린 듯 말했다.

그도 엄연히 예술가다.

당연히 공감이 가겠지.

난 그에게 말했다.

“실현하기 어려운 게 당연해요. 저는 그 맹목성의 다른 말이 광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최오준 배우가 살짝 놀란 듯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천재 예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 다들 성격적인 문제가 있다고도 하고요. 보통 사람이 아닌 게 확실하긴 해요.”

“그럼 예술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인가. 쓸쓸하군.”

조인후 감독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듯.

“아뇨.”

난 고개를 저었다.

“예술가는 자신이 구현한 세계를 믿죠. 그 세계가 그에겐 신일지도 몰라요. 그러니 자신의 인생을 모조리 바치는 것일 테고….”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로베르 감독만이 연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잠시 후, 조인후 감독이 물었다.

“그렇다면 천재 예술가는요? 그들의 존재를 따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천재란 것도, 사실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인데.”

맞는 말이다.

주관적이고, 추상적이지.

하지만 규정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외부의 신을 버리고 자기 안의 신에 완전히 도달한 사람이 아닐까요. 음… 자신의 세계를 예술품을 통해 ‘순수하고 완벽하게’ 구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이요.”

“흐음….”

조인후 감독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로베르 감독이 말했다.

“공감해요. 나도 영화를 찍을 때, 내 순수한 영감이 온전하게 작품이 되어 주길 바라지.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어요. 설명할 순 없지만… 자연스럽게 외부적인 생각들이 끼어든다고 해야 하나?”

조인후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가족이나 사람들이 내게 가지고 있는 기대에 대한 부담이랄까… 그런 잡념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순수함은 훼손되니까요.”

내가 듣기엔 겸손의 말이었다.

그런 순수한 영감을 받는다는 점만으로도… 그들은 대단한 예술가임이 분명하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기대가 되네요. 작가님이 생각하신 예술가의 모습.”

로베르 감독이 말했다.

조인후 감독도 장난스레 덧붙였다.

“멋진 천재 예술가를 만들어 주세요. 우리가 못 다 한 꿈을 이룰 수 있게.”

* * *

어제, 5지구 리브레 클럽을 끝냈다.

파리에서의 일정도 마무리가 되어 가는군.

모처럼의 휴일.

나는 오늘도 호텔 앞 카페에 앉아 있었다.

본격적으로 소설을 구상할 때다.

나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영감을 받은 이 파리에서 소설의 뼈대를 세우려 한다.

며칠 전 마레 지구에서 영화 감독을 만난 일.

꽤 도움이 되었다.

‘천재 예술가’에 대한 정의가 조금 더 또렷해졌으니.

‘광기’의 개념 역시 그렇고.

소설의 주인공을 떠올려 보았다.

머릿속에 다시 찾아온 한 화가.

문득 생각했다.

어느 위치에서 그를 바라보고, 묘사해야 할까.

앞에서 마주 보는 것.

옆에서 발맞추는 것.

뒤에서 따라가는 것.

앞에서 마주 보면 열정 어린 얼굴을 전달할 수 있고,

옆에서 발맞추면 행동의 속도감을 전달할 수 있다.

뒤에서 따라가면…?

그의 ‘등’을 볼 수 있다.

‘등’을 본다는 건 꽤 매력 있는 일이지.

등의 주인이 나아가는 그 여정을 묵묵하게 응원하는 느낌이 드니까.

그래.

이 소설의 문체.

한 발 뒤에서 그를 지켜보는 듯 만들어 보자.

이 화가의 여정을 응원하듯이.

이 소설은 아주 운명적으로 시작한다.

한 화가가 내면의 신을 만난다.

예술가들은 ‘영감’이라 부르는 어떤 것.

그는 주저하지 않고 집을 나간다.

마음속에 담아 두고 산 계획은 아니다.

누군가 그리 하라고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그냥, 그는 감각적으로 알았다.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걸.

그는 떠돌이 환쟁이가 된다.

한번은 누군가가 그에게 묻는다.

왜 그 안락한 집을 나와서 고생이냐고.

그가 대답한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의 일이야. 뭔가를 그려야만 아니, 내 속에서 끄집어내야만 한다는 걸 알았지. 그 집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도. 그곳엔 돈, 아내의 사랑, 지켜야 할 물건과 명예 같은 게 너무나도 많아. 그런 것들이 내 안의 ‘그 어떤 것’보다 잘났노라고 아우성을 쳐대는 것 같았어. 그러니 별수 있나? 그 소리를 멈출 재간이 없으면 내가 나와야지.”

그에 상대는 대답한다.

“단단히 미쳤군.”

그렇게 시작한 화가의 여정.

나는 그의 뒤를 쫓는 기분으로 따라간다.

그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등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가 하나의 그림을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번 터진 이야기는 봇물처럼 쏟아졌다.

사건의 순서와 관계없이 튀어나오는 장면들.

특히 그의 천재성이 증명되는 순간들.

그 모든 속 이미지, 대사, 심리들.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정신없이 타이핑을 했다.

두어 시간 후.

비로소 열 장이 넘는 구성이 마무리됐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났다.

몸이 텅 빈 기분이었다.

나야말로 내 뱃속의, 내 머릿속의 모든 걸 끄집어낸 것처럼.

겨우 한숨 돌리고 노트북을 덮었다.

어느새 식어 버린 커피.

한국식으로 말하면 에스프레소인지라, 식어 버리니 쓴맛만 났다.

우웅― 우웅―

지훈에게서 보이스톡이 걸려 왔다.

전화까지? 웬일이지?

“어, 지훈아.”

― 형님, 잘 지내십니까?

잡음이 잔뜩 낀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리의 인터넷 통신망이란….

이럴 땐 역시 한국이 최고란 생각이 드는군.

“그럼. 별 일 없지?”

― 없는데 전화를 드렸겠어요? 하하…!

왜 이리 신이 났지?

― 메일이 왔어요. 벨기에랑 이탈리아 쪽에서.

“어?”

나는 놀라서 큰 소리로 되물었다.

― 벨기에의 오트랑, 이탈리아의 까롤! 두 출판사에서 동시에 연락이 왔다고요. 형의 책 <내외인>을 자기네 나라에서도 내고 싶다나요.

정말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예상이 들어맞았다.

유럽의 큰 시장에서 팔리는 책은, 주위의 나라로 퍼지기 마련.

나는 지훈에게 말했다.

“바로 대답하지 말고, 출판사에 대해서 잘 알아봐. 나 한국 가면 같이 얘기해 보자. 알았지?”

― 네, 형. 당연히 그러려고 했죠. 그냥 기분 좋으라고 연락 드렸어요.

“잘 했다. 별 일 없지?”

― 음… 한국에서도 슬슬 프랑스판 <내외인>이 잘 팔린다는 기사가 나던데요?

“소식이 퍼졌을 때도 됐지. 알았다. 그럼 고생해라.”

― 넵.

전화를 끊었다.

벨기에와 이탈리아.

작은 시장이 아니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연락이 올 테고.

하지만 중요한 곳이 남았다.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의 두 큰 시장.

영국과 독일이었다.

* * *

오늘, 파리 3지구에서 리브레 클럽이 끝났다.

요즘 리브레 클럽에선 낭독이 아닌 토론을 한다.

이제는 책을 다들 읽어 오니까.

토론은 굉장히 수준 있었다.

아무래도 파리의 중심부인지라 시민들의 교육 수준이 높기 때문이겠지.

이를테면, 이런 토론들 말이다.

― 남자1의 실존과 남자2의 실존은 어떤 차이가 있나?

―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어떤 철학적 명제를 던질 수 있나?

등등.

리브레 클럽이 끝난 직후.

장 스테판과 저녁을 먹었다.

그가 데려간 곳은 단출한 화덕피자집이었다.

우린 피자와 윙을 시켜 배를 채웠다.

“와… 사람들 대단하던데요? 철학과에서 원정 나온 줄 알았어요. 통역하느라 혼났네.”

“저도 놀랐어요. 수준이 너무 높아서. 철학에 관심들이 많은가 봐요.”

“뭐, 3지구니까 그럴 수 있긴 한데, 책들을 열심히 읽어 온 것 같더라고요. 아, 피자 맛 어때요?”

“최고예요.”

빈말이 아니었다.

바삭바삭한 도우에 단순한 토핑.

화려한 한국 피자와 달리 담백한 맛이 좋았다.

“이탈리아만 못하긴 하지만 프랑스 피자도 먹을 만 하니까요.”

“이탈리아 하니까 생각이 난 건데, 이탈리아의 까롤 출판사와 벨기에의 오트랑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정말요? <내외인>을 내겠대요?”

“네. 제가 귀국하기 전까지는 확답을 해 줄 수 없지만… 제가 유럽 출판사에 대해 잘 몰라서요.”

“둘 다 나쁘지 않아요. 저희 리브레랑 사이도 좋고요.”

역시 유럽.

나라 간 출판사 사이의 관계도 가까운 모양이다.

“독일과 영국 쪽에서도 연락이 올까요?”

나는 노골적으로 물었다.

장 스테판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눈치를 보고 있을 거예요. 프랑스에 먼저 소개된 작가 글을 모셔 가는 게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특히 독일 놈들이 좀 그런 면이 있죠.”

그리고 픽 비웃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프랑스인이다.

“전 많이 바라지 않아요. 프랑스에서처럼 영국이나 독일에 가서 홍보 활동을 할 시간도 여유도 없고요. 그저 책을 냈으면 좋겠는데.”

“알아요. 그래도 그쪽에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마세요. 여기 프랑스에서 좀 더 이름이 알려지면, 자연히 연락이 올 거니까.”

“유럽의 문학 시장은 꼭 연애 시장 같네요.”

그렇지 않은가.

눈치 보고, 자존심 상해하고.

“틀린 말은 아니죠. 아시잖아요. 유럽인들, 예술에 아주 예민한 거.”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이번에는 영락없이 동양인 같아서.

장 스테판은 내 웃음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나는 웃음을 거두고 물었다.

“<내외인>은 아직도 홈페이지 메인에 걸려 있던데요.”

“네. 그 덕에 구매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어요. 아직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요.”

“베스트셀러의 기준이 궁금한데요.”

“우리는 판매 부수가 아니라 순위로 따져요. 리브레의 책 중에서… 판매율 20권에 들면 베스트셀러라고 하죠.”

“그럼 제 책은…?”

“사십 몇 위 정도예요. 유럽 비유럽 다 합쳐서.”

사십 몇 위라.

애매하게 오기가 생기는 순위였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슬슬 1구 리브레 클럽을 준비해야겠어요.”

“작가님이 따로 준비할 게 있나요?”

“파리에서 1구는 의미가 특별한 것 같아서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1구는 파리의 중심이기도 하고… 루브르 박물관이 있잖아요. 파리의 자랑이죠.”

“마지막 리브레 클럽이니만큼,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부탁이요?”

“클럽의 규모를 좀 키워 주실 수 있나 해서요.”

“음… 지금 잡은 곳도 작진 않아요. 1구의 문화센터는 다른 구보다 훨씬 크거든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요새 파리가 한창 화창하잖아요. 가을이라 날씨도 좋고.”

장 스테판이 피자를 내려놓았다.

“혹시….”

“야외에서 낭독회를 했으면 해서요.”

“….”

“1장부터 4장까지, 통독으로요. 그렇게 리브레 클럽의 마무리를 할까 해요.”

“…와우.”

그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파리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내외인>의 낭독.

그 장면을 떠올려 보는 거겠지.

“그건… 저도 보고 싶은 풍경인데요.”

“가능한지만 확인해 주세요.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추진해 볼게요. 마리옹 편집장님께 바로 말씀드릴게요.”

“무리는 안 해도 돼요.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니까.”

장 스테판은 잠시 파리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다짐한 듯 내게 말했다.

“사실 이상 작가님이 저랑 같은 한국인인 거… 뿌듯하다고 해야 하나요?”

그런가?

프랑스에도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많을 텐데?

“유럽인들은 동양인들이 산수나 할 줄 알지 예술은 모른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리브레에 들어오는 거 정말 힘들었고요.”

“유리천장이군요.”

“네. 그런데 이상 작가님이 뭔가… 제가 갖고 있는 잠재력까지 증명해 주신 기분이라….”

그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에서 동양인으로 사는 것.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야외 낭독회. 제가 어떻게든 추진해 볼게요.”

장 스테판이 결연하게 말했다.

그의 ‘추진’은 생각보다 빨리 결정이 났다.

다음 날 오후.

그러니까 1지구 리브레 클럽을 이틀 남긴 시간.

장 스테판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어딘지 들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야외 낭독회가 성사됐다는 걸.

― 작가님,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야외 낭독회를 열 수 있게 된 모양이네요.”

― 그게 다가 아니에요.

“네?”

― 낭독회는… 루브르 앞에서 열릴 거예요.

…루브르?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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