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몽테뉴 영화제 삼일 째.
오늘은 <내외인>의 상영 날이다.
나는 파리 8구, 샹젤리제 거리로 갔다.
개선문을 향하여 죽 올라가는 완만한 오르막길.
그 오르막길 중간에 ‘고몽 영화관’이 있다.
안 그래도 인기가 좋은 샹젤리제 거리.
영화제의 열기로 사람들이 더 북적거리는구나.
나는 얼른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 취재진 사이로 정장을 차려입은 익숙한 얼굴.
조인후 감독과 최오준 배우였다.
취재진 인터뷰가 끝난 후.
대기실에서 두 사람과 만났다.
오랜만에 한국의 지인들을 봐서 그런가, 새삼 반가웠다.
“작가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한껏 멋을 낸 최오준 배우.
빛이 나는 걸 보니 역시 배우는 배우다.
“그럼요. 오늘 정말 멋지네요. 감독님도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보니 어째 더 반갑습니다? 허허….”
조인후 감독은 조금 들떠 있었다.
“인터뷰 좀 하시겠습니까? 원작자이신데.”
“아뇨, 안 할래요. 인터뷰는 웬만하면 안 하는 주의라. 아, 관계자석에 제 자리 마련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 정도야 당연하죠. 파리 여행은 잘 하고 계십니까?”
“몇 군데 못 갔어요. 리브레 클럽 일정이 빡빡해서.”
최오준 배우가 말했다.
“아, 저 그 홍보 영상 봤어요. 뭔가 감동적이던데요?”
“그래요?”
“네.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하나의 책을 이어 읽는 것도 그렇고… 두 번째 영상에서 나온 할아버지 목소리도 정말 좋고요.”
아, 그 노인.
기억난다.
그 노인은 홈페이지에 <내외인> 리뷰도 올렸지.
지훈이 일찍이 번역을 맡겨 내게 보내 줬다.
[<내외인> 2장을 통으로 낭독한 사람입니다. 경제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으나, 평생 문학 출판사를 운영했습니다. 저는 유럽인이라면 유럽의 문학을 통해서만 고귀한 정신과 실존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육성으로 <내외인>을 읽고서야 알았습니다. 유럽인으로서, 제가 얼마나 편협한 생각을 가졌는지요. 유럽인들은 유럽인이기에 더욱 비유럽의 책을 읽어야만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요.]
우물 안 개구리.
유럽인의 문학 편식을 잘 꼬집은 말이었다.
그의 솔직한 리뷰는 소소하게 이슈가 됐다.
그 덕에 <내외인>의 인터넷 구매율도 많이 올랐고.
“그, 리브레 클럽이라는 건 몇 회나 남았습니까?”
조인후 감독이 물었다.
“여섯 번 남았어요. 사흘에 한 번꼴이죠.”
“바쁘시네요.”
“그래도 함께 커피 한잔할 시간은 있지 않을까요?”
“작가님 되는 시간에 맞춰 보죠.”
우리는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관계자석에 앉자마자 암전이 됐다.
스크린에 올라오는 제목, <내외인>.
프랑스어 자막과 함께 보니 감회가 새롭다.
한국에서 이미 한 번 본 영화.
나는 다시 집중해보려 했다.
그러나 어둠 때문이었을까.
내 생각은 자꾸 다른 곳으로 흘렀다.
고흐의 방으로 올라가던 계단.
계단을 오르고 만난 복도.
어슴푸레한 햇빛이 들어오던 방.
그 어둠, 습도, 온도, 먼지까지.
오베르에 다녀온 후.
아무 때나 불쑥불쑥 올라오는 그 이미지.
그 이미지는 떠올릴수록 강렬해진다.
더는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이미지들이 꼬리를 물고 무작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흐의 방.
그 방이 사라지고 떠오르는 건… 랭보의 시가 적힌 벽.
그 벽이 허물어지고 나타나는 건… 일본의 다다미방.
내가 죽기 전까지 살았던 작고 초라한 방.
그 방도 어둡고, 서늘하고, 축축했지.
평범하게 살 기회는 수없이 많았다.
조선으로 돌아가 아내와 가정을 이루고.
건강을 추스르고.
건축기사로 재기하고.
돈이 되지 않는 문학 따위 버리면 그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내면의 창작욕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나는 오로지 그 창작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그 맹목성.
사람들은 그것을 ‘광기’라고 부르는 거겠지.
그때였다.
소설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오직 한 가지만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맹인이거나 예술가다. 맹인은 어둠만을 보고 예술가는 자신이 창조할 세상만을 본다.’
…!
머리가 활짝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상상 속에서 한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괴팍한 인상의 중년 남자.
그는 이제부터 내가 쓸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화구를 들고 있다.
화가인 모양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이 세상에 너무 빨리 태어난 탓이다.
그의 아내는 굉장히 부유하다.
아내는 그가 돈 걱정 없이 예술에 전념하도록 한다.
남편의 재능을 인정해서가 아니다.
그저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해서다.
많은 여자들이 그를 한심해하고.
많은 남자들이 그를 부러워한다.
어느 날.
화가는 그 평온하고 안락한 집을 나선다.
그리고 삼 년 후,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그 삼 년의 여정.
나는 그 시간을 소설로 담아 낼 것이다.
그의 재능과 광기를 함께 담아서.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짝짝짝짝짝짝!
박수들이 쏟아졌다.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어찌나 집중을 했던 건지.
영화는 벌써 끝나 있었다.
사회자가 나와서 프랑스어로 진행을 시작했다.
조인후 감독의 곁에 통역사가 붙어 섰다.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말했다.
“간단한 무대 인사가 있을 예정이니까, 앞으로 나가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러지. 오준아, 가자.”
“아, 네.”
“작가님도 나오시죠.”
“저도요?”
조인후 감독이 씩 웃었다.
“관객 분들이 기대하고 계실 텐데요? 인사만 하는 정도니, 함께 가시죠.”
나는 엉겁결에 앞으로 나갔다.
조인후 감독과 최오준 배우가 차례로 인사를 했다.
통역사의 통역은 아주 빠르고 거침없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됐다.
“요즘 프랑스에서 아주 유명해지신 한국의 작가님이시죠. 영화 <내외인>의 원작 소설 <내외인>을 쓰신 이상 작가님이십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짝짝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격한 환호에 나는 좀 당황했다.
하지만 여긴 어디까지나 영화판.
내가 말을 길게 할 곳은 아니지.
“…소설과 더불어 영화 <내외인>을 사랑해 주신 프랑스 시민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간소하게 인사를 마쳤다.
그때였다.
사회자가 스태프에게 뭔가를 전달받더니 깜짝 놀랐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마이크를 잡았다.
“어… 지금 들어 온 소식입니다. 저희 프랑스의 거장 로베르 공드리 감독께서 이곳 고몽 영화관의 다른 상영관에서 영화 관람을 하셨는데요, 마침 시간이 맞아 <내외인> 제작진께 축하를 드리기 위해 이곳에 오신다고 합니다.”
로베르 공드리 감독?
나는 물론이거니와, 상영관의 모든 이들이 당황했다.
워낙 괴짜라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다고?
“로, 로베르 공드리 감독님이요?”
최오준 배우가 중얼거렸다.
그는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하긴, 배우로서 꿈같은 일이겠구나.
그리고 정말로 로베르 감독이 나타났다.
조인후 감독이 먼저 다가가 아는 체를 했다.
객석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로베르 감독은 통통한 체형에 흰 머리를 멋들어지게 기른 신사였다.
그는 박수를 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최오준 배우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악수를 했고, 그 다음이 나였다.
로베르 감독은 날 빤히 보았다.
그래서 나도 그를 빤히 보았다.
그는 양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
그리고 힘차게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merci, merci(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뭐가?
“로베르 감독님,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사회자는 어느 새 침착하게 행사를 이끌어 갔다.
“정말 반갑습니다, 로베르 감독님. 감독님께서 오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곳을 찾아주신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여쭤도 될까요?”
“네! 먼저 이 엄청난 작품을 보러 와 주신 프랑스의 문화인 여러분께 박수를 보냅니다.”
그는 관객석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사람들이 환호를 했다.
“사실 파리가 영화로 들썩이고 있지 않습니까? 저 역시 방금 전까지 불가리의 예술 영화 <혼>을 봤습니다. 그리고 마침 <내외인> 팀이 이곳에 있다기에 부리나케 와 버렸죠.”
“감독님도 <내외인>을 보셨나요?”
그는 말도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요. 저는 가끔 어떤 작품을 봤을 때… 제가 살아 있을 때 존재해 줘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외인>은 제게 있어 그런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영화, 소설 모두요.”
살아있을 때 존재해 줘서 감사하다라.
퍽 감동적인 말이었다.
방금 전까지 빠져 있던 예술가들의 삶을 떠올리면… 내가 더 감사한 일이지.
로베르 감독은 말했다.
“우리 프랑스에 강렬한 정신적 감동을 준 <내외인>의 제작진 분들께 깊은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그가 이번엔 우리를 향해 박수를 쳤다.
객석의 시민들이 환호와 박수를 함께 보냈다.
로베르 감독은 조인후 감독에게 뭐라고 소곤거렸다.
정신없는 와중에, 조인후 감독이 슬쩍 내게 왔다.
“이상 작가님.”
“네?”
“로베르 감독이 내일 커피 한잔할 수 있냐 물어보는데요?”
* * *
중년이 훌쩍 넘은 로베르 감독이 잡은 약속 장소.
그곳은 ‘마레지구’였다.
파리 4지구에 위치한 마레지구.
편집샵들이 모여 있는, 한국으로 치면 가로수길 거리.
생각보다 ‘핫’한 위치 선정에 놀란 것도 잠시.
로베르 감독은 거침없이 어딘가로 향했다.
나와 조인후 감독, 최오준 배우, 그리고 통역은 잠자코 그를 따라갈 수밖에.
도착한 곳은 사람이 바글바글한 노천카페.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문은 제게 맡겨 주시죠.”
그가 시킨 건 ‘쇼콜라테’라는 음료와 레몬 파이였다.
화려한 이름과 달리, 초콜릿 원액과 우유가 전부.
“마레에 오면 이걸 먹어야죠.”
“커피를 마실 줄 알았는데요.”
내가 말하자 그가 낄낄 웃었다.
“커피는 유럽 어디서나 팔지만 쇼콜라테는 이 집만 한 곳이 없죠.”
우린 그가 시키는 대로 우유를 원액에 부었다.
초콜릿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마셔 봐요. 한국에 가서도 잊지 못할걸?”
그의 말대로였다.
그 진한 초콜릿과 고소한 우유의 풍미.
좀 웃기기도 하다.
파리에 와서 ‘초코우유’를 즐길 줄이야.
자연스럽게 <내외인>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로베르 감독은 <내외인>을 여러 번 봤다고 했다.
책도, 영화도.
그는 내게 물었다.
“저는 이상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발간 기념회에서 차기작에 대한 얘길 하셨다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빨리 얘길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아직 구상 단계라서요.”
“아닙니다. 천재 이야긴 무조건 매력적일 수밖에 없죠. 안 그런가요, 조 감독님?”
“그렇죠. 다만 좀 궁금하긴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천재를 염두에 두신 건지?”
“음… 일단 예술가를 다뤄보려고 해요.”
“어떤 사람을 천재 예술가라 생각하시는데요?”
얌전히 있던 최오준 배우가 물었다.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그가 꽤 묵직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아, 다른 게 아니라…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천재 예술가의 이미지가 궁금해서요.”
최오준 배우가 당황하며 덧붙였다.
두 감독이 날 가만히 봤다.
대답을 기대하는 듯.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예술가란 재능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요?”
조인후 감독이 물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신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