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81화 (81/204)
  • 81화

    생제르맹 거리에 다녀온 후.

    호텔 앞 식당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했다.

    하도 자주 오니 주인도 날 알아보는 눈치다.

    메뉴는 빵과 고기 수프 정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생제르맹 거리에서 받은 영감을 떠올리며.

    “천재의 삶이라.”

    사람들은 1930년대의 ‘이상’을 천재라 한다.

    나 역시… 그런 말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나의 작품이 특별할 뿐.

    나란 사람이 유별나게 독특한 건 아니었다.

    천재들의 삶에 공통점이란 게 있을까.

    쉽게 일반화할 수 없는 문제다.

    물어볼 수도 없지.

    내가 천재라 생각하는 이들은 다 죽고 없으니.

    다만 한 가지.

    천재들이 곧잘 요절한다는 점은 동의한다.

    그 죽음들엔 각자의 사정들이 있겠지만….

    나는 천재성이 인간의 삶을 집어삼킨다고 믿는다.

    ‘천재성’은 그 자체로 인간을 뛰어넘는 경지다.

    인간의 정신과 운명이 그것을 쉽게 감당할 리가.

    그렇게 점점 생각에 빠져 갈 때였다.

    우웅―

    톡이 왔다.

    지훈이었다.

    ― 형, 잘 지내요?

    ― 응. 별일 없지?

    ― 네. 형 프랑스 가니까 여긴 의외로 조용해졌어요.

    ― 파리 정보를 알아 가기 어려울 테니까. 그런데 무슨 일?

    ― 아, 형. 이거 보세요.

    지훈은 내게 짹짹이 링크를 보내 줬다.

    세계적인 영화 감독 로베르 공드리의 짹짹이 피드.

    로베르 감독의 SNS를 왜?

    “어?”

    그 글에서 눈에 띈 건… <내외인>의 프랑스어 이름.

    그리고 <내외인> 책 사진.

    안 되겠다.

    번역부터 맡겨야지.

    ― 지훈아, 이거….

    ― 형, 번역 드릴게요. 급하게 맡겼어요.

    역시, 송지훈이다.

    지훈은 메시지로 번역 내용을 보냈다.

    [한국 작가 이상의 소설 <내외인>. 이번 몽페르 영화제를 위해 영화 <내외인>을 보다가 결국 읽게 되었다. 나는 문학의 거장과 영화의 거장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 왔다. 문학은 문학의 방법으로, 영화는 영화의 방법으로 위대하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매체와 상관없이 예술 그 자체로 위대한 작가를 나는 비로소 만났다. 이 위대함을 비교적 빨리 발견한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내외인>의 낭독 영상을 여러분에게 공유한다.]

    글 밑에는 리브레 홈페이지 주소가 링크되어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는 극찬이었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파리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던 이 서양의 거리.

    이 거리에서 이제야 온기가 느껴진다.

    * * *

    파리 8지구.

    리브레 출판사.

    마리옹 편집장의 사무실 앞.

    에바 편집위원과 장 사원이 서 있다.

    5분 전에 에바 편집위원이 받은 메시지.

    ― 편집장실로 오세요. 장 스테판 사원과.

    미팅의 목적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요즘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미루어 보아….

    “<내외인>과 관련된 일이겠죠?”

    “그렇겠지.”

    “…혼내시려는 걸까요? 편집장님 무서운데.”

    “…그럴지도.”

    돌이켜 보면 켕기는 것들이 많았다.

    첫째, 홍보 시스템.

    허락도 없이 배너에 영상을 넣은 점.

    둘째, 사원의 업무.

    허락도 없이 사원에게 통역을 시킨 점.

    셋째, 독서 클럽의 내용.

    허락도 없이 강연이 아닌 낭독을 진행한 점.

    모두 관례의 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어쨌건, 보고는 하는 게 원칙.

    하지만 보고했다면?

    마리옹 편집장은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쓸데없는 일에 힘 빼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내외인> 판매율이 많이 올랐으니… 칭찬하려는 것일지도요.”

    배너 영상의 홍보 효과는 쏠쏠했다.

    더불어 로베르 감독의 짹짹이 피드.

    그 덕에 <내외인>의 구매율이 몇 배는 튀어 올랐다.

    ‘책’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독자 반응은 좀 기다려야겠지만….

    벌컥!

    갑자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어물쩍거리던 두 사람이 흠칫 놀랐다.

    마리옹 편집장은 시크하게 말했다.

    “뭐 해요? 안 들어오고.”

    “네, 편집장님.”

    에바 편집위원은 놀라지 않은 척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 위엔 <내외인>의 지표 그래프가 있었다.

    요 며칠 새에 크게 급등한 그래프.

    “앉아요. 두 분 다.”

    두 사람은 마리옹 편집장과 마주 앉았다.

    “에바 편집위원은 <내외인>에 손을 떼라고 말을 했을 텐데… 업무적으로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네요?”

    “전 요즘 <심슬리 저택>에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그럼 이 영상 배너, 리브레 클럽 형식 변경, 무료 통역은 장 스테판 사원이 독자적으로 진행한 일인가요? 그러기엔 권한 이상을 행사한 것 같은데요.”

    촌철살인.

    장 사원은 할 말이 없었다.

    에바 편집위원이 그를 보호하듯 말했다.

    “저의 지시로 진행한 일들입니다. 실무를 맡긴 셈이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에바 편집위원은 손끝으로 그래프의 반등점을 짚었다.

    “<내외인>은 활로를 찾은 것 같은데요?”

    마리옹 편집장은 그녀를 빤히 보았다.

    마리옹 편집장.

    법학과 경제학으로 유명한 파리 1대학 출신의 엘리트.

    문학이 강세인 파리 4대학 출신의 에바 편집위원의 ‘화끈한’ 일 처리 방식?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절차는 어디 갔고 체계는 어디 갔단 말인가?

    글만 잘 보면 다인가?

    경영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나?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졌다.’

    “<내외인>, 본격적으로 밀고 나가야겠어요.”

    그 말에 놀란 건 오히려 에바 편집위원이었다.

    “가, 갑자기요?”

    “왜 갑자기라고 생각하죠?”

    “그거야….”

    <내외인> 판매가 반등을 시작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베스트셀러에 비하면?

    텍도 없다.

    아직 ‘본격적으로 밀고 나갈’ 사이즈가 아니라는 것.

    “에바 편집위원, 제발 경영자의 시선으로 한 번만 생각해 봐요.”

    “….”

    “신인에다가, 외국 작가에다가, 생소한 한국 작가… 그런 작가의 작품에서 이런 그래프가 나온 건 한 가지 결론만 말해 주고 있어요.”

    “기적이라고요?”

    마리옹 편집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제발 좀… 경영에 기적이 어딨습니까. <내외인>은 될 작품이라는 거죠. 무조건.”

    에바 편집위원은 속으로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내외인>의 진가를 인정받아 다행이기도 하지만… 이제 와서 얄밉게 저런 소리를 한다고?

    “그 근거는요?”

    “지표가 말해 주고 있잖아요. 지표는 거짓말을 하지 않죠.”

    마리옹 편집장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에바 편집위원이 다소 심술궂게 물었다.

    “그럼 처음부터 제가 옳았던 거군요?”

    마리옹 편집장이 멈칫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별수 있는가.

    맞는 말인걸.

    “…맞아요. 에바 편집위원이 옳게 봤어요. 당신이 글을 알아보는 능력, 인정해요. 하마터면 리브레가 큰 건을 놓칠 뻔했어요.”

    에바 편집위원은 진짜 놀랐다.

    저 잘난척쟁이 냉혈한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다고?

    “자, 이만하면 기분은 좀 풀어졌겠죠? 우리 제발 실질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요.”

    “아, 네.”

    에바 편집위원은 얼른 마리옹 편집장의 말에 집중했다.

    “온라인은 지금처럼 가죠. 오프라인은 내가 직접 홍보팀에 지시해서 홍보를 진행할게요. 에바 편집위원이랑 장 사원은 이제 발간 행사를 준비하시죠.”

    “<내외인>, 발간 행사를 할 수 있는 건가요?”

    장 사원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상을 따라다니며 그를 지켜봐 왔다.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동양인이라면 가질 만한 열등감이나 소극적인 태도.

    그에겐 그런 것들이 없었다.

    언제나 당당한 태도.

    그 태도를 받쳐 주는 훌륭한 작품.

    ‘작가’라는 단어가 사람이 된다면 그처럼 생겼을 거다.

    장 사원은 같은 동양인으로서, 이상을 보면 가슴이 찌릿했다.

    그가 자랑스러웠고, 그처럼 되고 싶었다.

    “발간 행사, 제가 꼭 맡고 싶습니다.”

    그는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마리옹 편집장은 평소 잘 보이지 않던 미소를 지었다.

    “<내외인>의 낭독 영상 저도 다 봤어요. 거기에서 장 사원이 통역을 하는 것도.”

    장 사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로선 마리옹 편집장과 대화를 나눠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훌륭하더군요. 발간 행사도 장 사원에게 맡길 수 있겠어요.”

    * * *

    어제 15구의 낭독회가 끝났다.

    세 번째 리브레 클럽이었다.

    클럽 회원들은 <내외인>을 다 읽어 왔다.

    그들은 정성 들여 3장을 낭독했고, 내게 사인을 받았다.

    시비나 딴지를 거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토요일인 오늘.

    장 스테판과 만나기로 했다.

    그는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관광을 시켜 준다고 했다.

    주말에 불러내는 게 미안해 정중히 거절했지만… 할 말이 있다는 말에 결국 그러자 했다.

    항상 앉아있는 호텔 앞 카페.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장 사원을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가 도착했다.

    “이상 작가님!”

    그는 퍽 신나 보였다.

    차림이 가벼워서 그런가, 평소보다 어려 보이기도 하고.

    “어서 오세요, 주말에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저도 주말에 나다니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또 입이 근질근질해서요.”

    그때 웨이터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장 사원은 커피를 부탁했다.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먼저, <내외인> 판매율을 좀 보시죠.”

    그는 휴대폰으로 판매 지표를 보여 줬다.

    “지금 비유럽권 신인 중에서 10위권 안에 들어요.”

    “한때 꼴찌를 한 사람으로서 기쁘네요.”

    내 말에 그가 민망한 듯 웃었다.

    “아, 알고 계셨네요?”

    “제 매니저가 꽤 부지런해서요.”

    “하하… 아, 그리고 알려 드려야 할 소식이 또 있어요. 다음 주 13지구에서 독서클럽을 마치신 직후, 그곳에서 <내외인> 발간 행사를 하실 수 있겠어요?”

    “네? 갑자기요?”

    “책이 나온 지 좀 됐으니… 오히려 늦었죠.”

    나는 기쁜 마음에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물었다.

    장 스테판은 그간의 사정을 말해 줬다.

    에바 편집위원이 <내외인>을 밀어붙인 일.

    마리옹 편집장이 ‘지표’를 인정하기까지의 일까지.

    역시, 리브레 입장에서도 모험이었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니.

    “…두 분이 고생이 많으셨군요.”

    “저야 뭐 시키는 대로 한 거고, 에바 팀장님께서 애를 쓰셨죠. 파리 4대학 문학도로서 물러설 수 없다나요.”

    “다음에 만나면 저녁 식사라도 대접해야겠어요. 스테판 씨도 함께요.”

    “좋죠. 아, merci(감사합니다).”

    그는 웨이터가 가져다준 커피를 받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원래 외국 작가들이 오면 이렇게 개인 시간을 내시나요?”

    “하하… 그럴 리가요. 발간 행사를 하려면 작가님을 좀 더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편하게 대화를 좀 나눠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열심이군.

    국적은 바꿔도 한국인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어디 가고 싶으신 곳 있으세요? 주말이랑 공휴일이 겹쳐서 나흘은 쉬실 테니 파리 외곽 쪽도 다녀올 만한데.”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어요. 박물관들도 지루하고.”

    “그래요? 의외네요. 다들 파리에 오면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다만, 가야 할 곳이 있긴 해요.”

    “가야 할 곳?”

    “천재가 살던 곳에 가야 해요. 단 한 군데만.”

    “천재가 살던 곳이라… 어렵네요.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요.”

    장 스테판은 고민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혹은 천재가 죽은 곳도 좋죠.”

    한 마디로, 천재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곳.

    내겐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

    작가들의 생가는 이미 꾸며진 관광지였다.

    마치 통인동의 ‘이상 생가’처럼.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건 생제르맹 거리 정도.

    그곳엔 랭보의 시가 있었으니.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소설을 쓸 수 없다.

    좀 더, 숨을 쉬는 듯한 ‘천재의 공간’은 없을까.

    생각에 빠져 있던 장 스테판이 말했다.

    “좀 초라한 곳이어도 괜찮을까요?”

    “상관없어요.”

    “오베르에 가시죠.”

    “오베르요? 처음 들어 보는데요.”

    파리 지도에서는 본 적 없는 곳이다.

    “파리 북쪽 외곽에 있어요. 차를 타고 삼십 분 정도?”

    “거기에 뭐가 있는데요?”

    “빈센트 반 고흐가 자살한 밀밭이요.”

    나는 바로 그러자고 했다.

    천재 화가 반 고흐가 자살한 곳.

    그 이상 마음에 쏙 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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