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80화 (80/204)
  • 80화

    “…européen(유럽의).”

    한 마디로.

    유럽의 문학만을 사랑한다는 의미.

    그건 명백한 우월주의였다.

    장 스테판은 얼굴이 굳었다.

    그 말을 굳이 통역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난 1930년대 지식인이다.

    프랑스어와 같은 라틴어족의 언어를 구사하진 못해도, 기본적인 단어와 회화의 뉘앙스는 겉핥기로 안다.

    우리 시대엔 그것이 엘리트의 교양이었으니.

    나는 그 노인에게 바로 말했다.

    “C’est bon(좋네요).”

    노인들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스쳐 갔다.

    정말 내가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줄 알았나?

    동양인을 깔봐도 너무 깔보는군.

    나는 다시 한국어로 말했다.

    “원래는 돌아가며 낭독을 하려 했지만… 오늘은 방법을 좀 바꾸려 해요. 먼저, 신사 분께서 낭독을 시 작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내가 가리킨 사람은… 방금 전 그 노인이었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까지 읽으란 말이오? 한 문단?”

    “아니요. 마음에 드신 곳까지요. 한 글자라도 좋고, 한 문장이라도 좋아요. 글이 형편없다고 느끼실 때 멈추시면 됩니다. 그리고 바로 나가셔도 좋아요.”

    “하하… 재밌는 젊은이로군.”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책을 잡았다.

    “크흠….”

    목을 가다듬는 낮은 소리.

    덩치가 좋아서 그런가, 울림도 나쁘지 않았다.

    “남자2는 이대로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하려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좀 놀랐다.

    낭독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는 멈칫했다.

    책을 계속 읽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이 다음 문장을 훑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하려 했다는 것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남은 건 그런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좀 더 몰입하는 눈으로 다음 문장을 읽어갔다.

    “문제는 무엇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인지 그 자신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큰 집과 큰 개, 상냥한 아내와 바르게 장성한 자식들, 건강, 취미, 노후 자금, 잘 웃는 성격, 대외적 평판… 무엇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자꾸만 인생에서 뭔가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혼란스러웠다. 마음 어딘가에 파인 듯한 검은 구멍. 그 검은 구멍은 자신을 이루는 어느 한 조각이 빠져나간 것처럼 허전하고 황량했다.”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그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만 읽으실 건가요?”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지?’라고 묻는 눈빛.

    노인은 계속 책을 읽었다.

    “…그에겐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었다. 자신과 딱 맞는 퍼즐 같은 여자.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증상을 이야기했다. ‘여보, 내 일부가 어디론가 떨어져 나간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인간은 누구나 불행이라는 부분과 함께 살아가잖아. 나는 그 부분이 떨어져 나간 거야. 어디선가 그 불행이 혼자 살아가고 있는 게 틀림없어.’ 남자2는 이 말을 듣고 아내가 깔깔대며 웃어 주길 바랐다. 이해받지 못하면 불행이 뭔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진심 어린 공감이었다. ‘어머, 그런 기분이 들다니. 당신 정말 기분이 허전하겠네요.’ 아내의 그 말이야말로 그를 지독하게 허전하게 만들었다. 어찌할 수 있는 방도도 없이.”

    노인은 이제 쉴 틈 없이 <내외인>을 읽었다.

    책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남자2의 역할을 할 때는 어딘지 불안한 말투로, 아내의 역할을 할 때는 조금 높은 톤으로.

    프랑스어를 잘 모르는 내가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수준급의 낭독이었다.

    1시간이 거의 다 차갈 무렵,

    마지막 문단에 다다랐다.

    “남자2는 자신의 허전함이 극에 달했다는 걸 느꼈다. 마음속 검은 구멍은 남자2를 완전히 잠식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살 시도를 했다. 10대 때에도 코웃음을 치며 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다리에 올라 강을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의 비릿한 수면. 폐에 물이 차는 고통을 겪으면 그 검은 구멍이 사라질까. 하지만 남자2는 몇 번의 시도에도 결국 뛰어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바라는 건 죽음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공포라고. 그 공포로 인해 떨어져 나간 불행의 조각이 다시 들러붙길 바라는 거라고. ‘대체 어딨는 거야?!’ 남자2는 힘껏 외쳤다. 그 소리는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남자1이 있는 곳으로.”

    2장이 끝났다.

    이것으로 강연도 끝이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끝이군요.”

    침묵이 흘렀다.

    책을 읽은 노인은 어느새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이걸 다 읽을 줄이야.’

    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C’est bon(좋네요).”

    나는 그를 향해 한 번 더 이렇게 말했다.

    이번엔 비꼬는 것도 뭣도 아니었다.

    그의 멋진 낭독에 대한 칭찬이었다.

    “멋진 낭독을 해 주신 신사분께 박수 드리죠.”

    내 말에 노인들이 멈칫했다.

    수줍은 얼굴을 한 부인이 조심스레 박수를 쳤다.

    그러자 노인들이 하나둘씩 박수를 따라 쳤다.

    박수 소리에, 노인의 얼굴이 더 활활 불탔다.

    “저기, 사인을 좀 해 주시겠어요?”

    한 노인이 물었다.

    “그럼요.”

    “우리도 받고 싶어요.”

    “줄을 서지요, 모두.”

    노인들이 느릿느릿 줄을 섰다.

    책을 읽은 노인만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수줍은 얼굴의 부인이 사인을 받으며 슬쩍 말했다.

    “멋진 강연이었어요.”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요.”

    “저 고집쟁이에게 책을 읽혔잖아요. 대단해요.”

    그녀는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책을 품에 안고 행사장을 나섰다.

    이제 남은 건 노인과 나.

    새하얗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붉었다.

    그는 안경을 벗더니,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렇군요.”

    굳이 괜찮다는 말은 안 해도 되겠지.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인해 드릴까요?”

    “…물론.”

    그는 내게 책을 내밀었다.

    나는 사인을 해 주고 다시 그에게 책을 줬다.

    그는 머뭇거리더니 내게 말했다.

    “나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했소. 지금은 망하고 없지만. 이 독서 모임은 뭐랄까… 늙어 죽는 것밖에 남지 않은 내 삶의 유일한 활력이지.”

    출판사를 운영했다면, 문학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반장 노릇을 할 만하군.

    생각이야 좀 편협하긴 해도.

    “당신의 소설… 내 자존심대로였다면 중간에 그만 읽었을 거요.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요.”

    “저도 낭독을 독차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당신을 무시한 건 내 흰머리 나고 한 가장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

    “<내외인>을 끝까지 읽은 건 잘한 일인 것 같군. 난 이만 갈게요. 고마웠소.”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와 가볍게 악수를 했다.

    그가 나가자, 장 스테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긴장했습니다.”

    “내가 저 노인 멱살이라도 잡을 줄 알았어요?”

    내 말에 그는 웃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정말 대단하세요, 작가님. 제 속이 다 시원해요.”

    “뭘요. 영상은 잘 찍혔겠죠?”

    “확인해 볼게요.”

    장 스테판이 삼각대의 캠코더를 확인했다.

    그리고 씩 웃더니 다시 한번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로써 2차 리브레 클럽, 즉, <내외인>의 두 번째 홍보 영상이 완성되었다.

    * * *

    파리 1지구.

    로베르 감독의 저택.

    상영관에 앉아 있던 로베르 감독은 멍한 얼굴이었다.

    화면에는 <내외인>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 가고 있었다.

    책이 가득한 서재에 쏟아지는 햇빛.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의 뒷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사람은 사라지고 남은 빛.

    화면은 그 빛으로 가득 차고.

    다시 새카맣게 어두워지다가.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뭘 본 거지?”

    조인후 감독의 영화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작들과도 뭔가 달랐다.

    조인후 감독의 전작이 잘 만든 ‘예술 영화’였다면,

    이건 ‘예술’이라는 걸 ‘영화’로 만든 듯했다.

    ‘미장센이 좋기도 좋지만… 서사 자체가 대단히 미학적이야. 원작의 힘이 강한 영화다.’

    그는 그제야 조인후 감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영화를 보시면 원작 소설이 보고 싶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황급히 휴대폰으로 ‘내외인’을 검색했다.

    리브레 출판사 링크가 가장 위에 떴다.

    접속을 해 보니, 배너 자리에 웬 영상이 있었다.

    영상은 자동 재생됐다.

    핸드폰으로 찍은 듯한 조악한 화질.

    “뭐야, 이게… 시답잖은 홍보인가?”

    로베르 감독이 영상을 끄려 했다.

    그러나 소리가 나오자마자, 그는 눈치챘다.

    소설 <내외인>의 내용이란 것을.

    그는 영상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랍인들이 하는 프랑스어.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의 소설.

    소설 내용의 기묘함.

    그런 것들이 뒤섞여 이상한 자극을 주었다.

    로베르 감독은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자신이 평생 모국어로 사용한 프랑스어.

    그 프랑스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영상.

    이번에는 웬 노인이 등장했다.

    고집스러운 인상의 전형적인 프랑스 노인.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가끔 주저하다가.

    어떤 부분에선 놀라서 멈칫하다가.

    결국 끝까지 2장을 낭독했다.

    마치, <내외인>을 거부할 수 없다는 듯.

    그리고 지금의 로베르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본 이상, <내외인>의 뒷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3, 4장을 읽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어야 해.’

    리브레 홈페이지에서 책을 주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지옥같이 느린 프랑스 택배를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화제 시작까지는 앞으로 일주일. 그 전에 읽어야 해. 그래야 영화 <내외인>도 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상영관을 나온 그는 슬리퍼를 끌며 문으로 걸어갔다.

    메이드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어딜 가시려고요?”

    “서점에요.”

    “그 몰골로요? 모자라도 쓰고 가세요.”

    메이드는 얼른 그의 캡모자를 가져다주었다.

    며칠 동안 상영관에 틀어박혔던 로베르 감독.

    그의 꼴은 담배에 절여진 노숙자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는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서점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 *

    파리에 살았던 걸출한 작가들.

    셀 수도 없이 많다.

    사르트르, 카뮈, 빅토르 위고, 말라르메, 보들레르….

    이번 파리행에서 이들의 발자취를 좇을 수도 있다.

    그들의 집에 가 보고, 육필 원고를 구경하고….

    여느 관광객들처럼.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 목적은 ‘파리에서만 쓸 수 있는 글’.

    그 글감을 찾는 거니까.

    여기는 파리 6구의 생제르맹 카페 거리.

    특별한 목적이 있어 온 것은 아니다.

    오늘은 강연이 없고, 나는 원래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돈이 있으니 더 신났을 뿐이다.

    원래는 카페에 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관광객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 앉아 있다간… 글감은 고사하고 귀만 멍해질 거다.

    나는 그저 돌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한적한 길이 나올 때까지.

    그리고 어느 골목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벽에 새겨진 시.

    프랑스어로 되어 있지만, 제목은 익숙했다.

    아르튀르 랭보의 <술 취한 배(Le Bateau Lvre)>.

    기억하기론, 이런 내용을 담은 시다.

    배에 처음 탄 소년.

    소년의 눈에 비친 술 취한 듯 용솟음치는 바다.

    격랑의 파도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설렘.

    고작 16세였던 천재 시인 랭보.

    세상을 대하는 그의 감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시.

    나는 그의 시보다도, 그가 남긴 말을 더 좋아한다.

    ‘현대적이어야 한다, 완벽하게.’

    예전 날, 한국대 첫 수업을 이 말로 시작했다.

    내 삶과 문학의 모토니까.

    나는 랭보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봤다.

    그는 21살에 절필하고.

    나이가 든 후에 시를 썼던 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건 다 헛소리였고, 거짓말이었다.’

    세계 문학의 한 획을 그은 천재 시인의 회고.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저 변덕이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의 마음이 왠지 이해는 간다.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욕망.

    새 삶에 대한 무한한 동경.

    내게도 그런 것들이 없지 않다.

    어쩌면 바로 그 힘으로 두 번째 삶을 얻었을지도.

    나는 생제르맹을 슬슬 걸어 나왔다.

    호텔 근처의 항상 가던 카페로 가는 게 나을 듯했다.

    그리고 그 골목을 다 빠져나왔을 때.

    나는 비소로 깨달았다.

    내가 파리에서 무엇을 쓰고 싶은지.

    그것은 바로… ‘천재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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