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77화 (77/204)

77화

프랑스로 떠나는 날, 새벽.

지훈은 나를 인천공항까지 태워다 줬다.

“역시 한 달짜리 여행이라 그런가, 짐이 많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한 달이라… 아득하네.”

차 트렁크에 들어있는 대형 캐리어.

별 거 안 챙겼다고 생각했는데도 꽤 무거웠다.

이번 여행도 나 혼자였다.

지훈까지 데려가기엔 너무 긴 일정이기도 하고.

녀석도 굳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형 다녀오면 전 논문 발표 끝났을 거예요. 으… 지긋지긋한 논문.”

“드디어 송지훈 석사 탄생이냐.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그럴게요. 실시간 대기조 할 테니까 언제든 연락 주세요. 형, 도마크 연말 작품집 원고는 오셔서 주실 거예요?”

“음… 모르겠어.”

사실 기내용 가방에 노트북이 있긴 하다.

언제든 소설 초고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지만 아직 장담은 못 하겠다.

우리는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티켓을 끊고, 짐을 싣고, 지훈과 인사를 하고 입국장에 들어섰다.

정신없는 인파 속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샤를 드골 공항까지 가는 직항선.

자리도 그나마 비즈니스 클래스.

처음에 리브레 쪽이 제공한 건 이코노미였다.

하지만 내가 돈을 좀 더 지불하고 비즈니스로 바꿨다.

장기 비행인데 몸 상해서 좋을 게 뭐 있는가.

어수선한 와중에 비행기가 떴다.

파리라니….

막상 출발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전생의 내게 있어 가장 첨단의 세계는 일본이었다.

모든 서구 문물이 일본을 통해 들어왔으니까.

언제나 서구 세계를 동경했지만, 일본에서 살아남는 것조차 힘겨웠지.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이건 유럽이건, 한국보다 ‘첨단’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 시장만큼은… 아직은 ‘도전’이란 말이 어울린다.

나는 전생에 얻지 못한 도전의 기회를 얻은 거고.

…나아가고 있는 거다. 분명하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선보다 더 큰 땅, 만주로 떠났던 길의 옥희.

옥희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갑갑한 조선의 규율을 벗어던지는 기분으로.

나는 옥희를 굉장히 아꼈다.

<동생 옥희 보아라>에는 애써 아닌 척했지만, 내심 녀석이 날 버리고 떠난 일에 상처를 받았다.

서운하다 못해 미웠을 정도로.

그러니 소설에서나마 붙잡아 두려 했겠지.

하지만 막상 이렇게 떠나 보니… 알 것 같다.

옥희가 어떤 기분으로 조선을 떠났는지를.

녀석이 느꼈을 설렘, 기대, 미안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오빠답게 녀석의 등을 떠밀어 주지 못했을까.

‘가라, 자유롭게.’

그렇게 말했다면, 난 좀 더 멋진 오빠로 기억될 수 있었을까.

* * *

파리 샤를 드골 공항.

12시간 넘는 비행으로 몸은 이미 녹초가 됐다.

파리의 시간은 겨우 오후 1시.

인천에서 오전 6시경에 출발했단 걸 떠올리면, 확실히 지구 자전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왔다.

수없이 많은 서양인.

낯선 체취와 언어들.

유럽에 왔다는 느낌이 여실히 들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출국장으로 나오니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한국인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한국인의 얼굴.

나이는 이십대 중반쯤 됐을까.

그는 내게 소리쳐 물었다.

“이상 작가님이십니까?”

“장 스테판 씨?”

“맞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국적인 억양의 한국어.

하지만 대화를 하는 데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나는 출국장을 완전히 나서서 그와 악수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작가님.”

“저야말로요. 직접 마중을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프랑스는 처음이실 테니까요. 제 차를 타고 호텔로 가시죠.”

우리는 한참을 걸어 주차장으로 갔다.

그는 내게 호텔 주소를 물었다.

나는 지훈이 적어 준 주소를 내밀었다.

그는 좀 놀란 것 같았다.

“파리 16구에 있는 호텔이군요. 꽤나 부촌인데, 좋은 호텔을 잡으셨습니다.”

“제가 아니라 매니저가 잡은 곳이라서요.”

어쩐지 호텔 숙박비가 많이 나왔다 했더니.

그의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도시 외곽 특유의 황량한 전경이 지나갔다.

이런 길은 서울과 크게 다를 게 없군.

장 스테판은 리브레 독서클럽에 대해 말해 주었다.

“사실 독서클럽에 초대하는 외국 작가님들은 대부분 유럽 분들이십니다.”

그럴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해야 하는 10회의 강연.

옆집 드나들 듯 국경을 넘는 유럽인들이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일정이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내외인>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고맙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내외인>이 좋은 작품이라는 건 에바 편집위원님과 저 모두 동의하는 바이니까요. 어떻게든 이 작품을 독자들의 손에 쥐여 주는 게 저희의 목적입니다.”

“‘쥐여 준다’라….”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떠먹여 준다’ 정도가 되려나?

“첫 일정은 모레였지요?”

내가 물었다.

그는 멈칫하더니 대답했다.

“네. 19지구에서 열릴 겁니다. 그 후로 17, 15, 13… 마지막 1지구까지. 역순으로 진행되죠. 그런데 그 19지구가….”

“그다지 안 좋은 동네라고 들었습니다만.”

난 솔직하게 말했다.

파리에 오기 전, 이 ‘독서클럽’에 대해 지훈과 나름대로 알아봤다.

지훈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리브레가 주관하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전통 있는 클럽인 건 맞아요. 그런데… 동네 분위기를 많이 탄다네요?”

“동네 분위기?”

“네. 파리는 지구에 따라 분위기가 천차만별이래요. 형이 처음으로 강연을 하는 19지구는… 소득이 낮은 사람들이나 이민자들이 많다는데요.”

그래서 난 약간 긴장을 하고 온 상태였다.

장 스테판은 살짝 주저하더니 내게 말했다.

“힘드실 수도 있어요. 파리에 온 이민자들은 상상을 초월하거든요. 작년에는 이탈리아계 작가님이 오셨는데, 클럽의 이민자 한 분과 멱살을 잡고 싸웠죠.”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책에서나 봤던 ‘이탈리아인’ 같군요.”

장 스테판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저는 그들이 저를 책에서나 본 ‘동양인’으로 만들지 않게 조심해야겠고요.”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작가님.”

한 마디로, 약해 보이지 말 것.

장 스테판의 외모는 완전히 한국인이다.

그가 아무리 프랑스인으로 살아왔어도… ‘동양인’의 고충을 모르지 않을 거다.

우리는 16지구 호텔 앞에서 내렸다.

비로소 영화에서나 봤던 유럽의 거리가 펼쳐졌다.

잘 닦아놓은 돌길과 고풍스러운 건물.

건물 코너의 노상 카페까지.

“유럽이군요.”

내가 말하자 장 스테판이 씩 웃었다.

“유럽이지요.”

장 스테판은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내일 오후에 에바 편집위원님과 함께 식사를 하시죠. 자리는 저희가 마련해 놨습니다.”

“그렇게 하죠.”

장 스테판이 떠난 후.

나는 호텔로 들어갔다.

기본적인 영어 회화는 나도 혜경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사방에서 들리는 낯선 언어 때문일까.

일본에서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호텔 방에 도착했을 때.

나는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아주 먼 외국으로 오고 말았다는 걸.

심지어 나의 문학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일이었다.

문득, 지금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소설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캐리어를 뒤져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소설 속 ‘희’를 만났다.

우린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서울역 앞에 있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한다.

그리고 이내 ‘희’에게 말한다.

― 모쪼록 몸조심해라.

‘희’가 웃으며 ‘나’를 한 번 안아 준다.

그리고 제 남편이 될 남자의 손을 잡고 서울역으로 달려 들어간다.

‘나’는 따라가지 않는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어깨에는 빗물이 떨어진다.

‘나’는 흠칫 놀란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평생 연락이 닿지 않으면 어쩌지?

공포가 밀려온다.

그러나 이내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뒤돌아 서울역을 떠난다.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마음 속 짐이 덜어진 기분이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완성한 소설.

나는 그 소설에 <희>라는 이름을 붙였다.

* * *

다음 날 오후.

시차 적응을 채 못 한 몸을 이끌고 호텔을 나섰다.

장 스테판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그의 차를 타고 8지구로 향했다.

“8지구에는 리브레 출판사가 있거든요. 저희가 자주 가는 괜찮은 레스토랑으로 안내할게요.”

“좋죠.”

그가 날 데려간 레스토랑은 다소 어둡고 서늘했다.

주로 해산물을 파는 곳 같았다.

먼저 와 있던 에바 편집위원이 우릴 맞았다.

장 스테판은 그녀의 말을 바로바로 내게 통역했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에바 위페르입니다.”

“이상입니다.”

우리는 짧게 악수를 했다.

지금까지 상상 속 그녀는 금발이었다.

서양인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이랄까.

그러나 정작 그녀는 검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이지적이면서도 에너지가 느껴지는 미인.

“<내외인>, 정말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세 편의 시도요. 아직 영문으로 번역된 에세이와 단편 소설은 읽어 보지 못했지만… 독서 목록에 리스트 업을 해 뒀죠. 정말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을 쓰시던데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클럽의 특강에 초청해 주신 것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작품의 가치에 비해 너무 작은 행사를 잡아 죄송한 마음이에요. 아, 일단 메뉴를 고르시겠어요? 타르타르와 숭어가 아주 맛있는데요.”

“타르타르가 뭐죠?”

장 스테판은 버벅거렸다.

“그… 생고기를 저며서 소스와 같이 먹는 요리에요.”

…육회구나.

“저는 숭어구이로 하죠.”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숭어의 맛은 깜짝 놀랄 만큼 좋았다.

우리는 천천히 식사를 하며 작품의 홍보 이야기를 나눴다.

“프랑스는 독서 인구가 적지 않아요. 하지만 홍보하기란 굉장히 까다롭죠. 비유럽권 작가분들은 항상 난항을 겪어요. 동양권 작가분들은 더 힘드시고요. 그나마 일본 작가분들의 상황이 좀 낫죠. 그나마 문화적으로 익숙한 나라니까요.”

“홍보가 아니라, 작품 자체로 승부를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에바 편집위원이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작가님. 잘 알고 계시네요.”

“그래서 절 하필 ‘독서클럽’에 부르신 거겠죠. 책을 읽히는 곳이니까요.”

“더 덧붙일 말이 없군요.”

에바 편집위원은 굴을 조금 잘라 먹으며 말했다.

“독서클럽은 일단 제게 전적으로 맡겨 주세요. 편집위원님.”

“그럼요, 당연하죠.”

“단, 부탁드릴 홍보 사항이 있어요.”

“홍보 사항이요?”

“제 소설 <내외인>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내외인>이 곧 유럽의 여러 영화제에 출품될 거예요.”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영화가 있다는 소식은 도마크 측에서 들은 바가 있지만… 그 영화, 프랑스에도 오나요?”

당시 <내외인>은 한국에서만 상영됐다.

미쯔하루 편집장도 영화 <내외인>을 상업 영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 상업 영화가 프랑스에 진출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예술 영화는 다르지.

“네. 조인후 감독이 찍은 예술 영화거든요.”

“조인후 감독! 저도 알고 있어요. 프랑스에서도 인기가 좋죠. 굉장하네요. 정말 좋은 소식이에요. 그렇지 장?”

“네. 한숨 덜었어요.”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주 후, 영화제에서 오픈이 될 거예요. 슬슬 언론에 공개를 할 테니… 리브레 쪽에서 선수를 치시면 뭐가 됐건 반응이 오겠죠.”

“흐음… 장 사원이 한번 확인해 줘. 확실한 정보면 그렇게 하도록 하자고.”

“네, 편집위원님.”

그들의 눈에 한층 더 신뢰가 비쳤다.

조인후 감독이 원작을 영화화한 소설.

그 소설을 쓴 작가.

자신들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저의 목표는… 영화 <내외인>이 프랑스인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소설 <내외인>을 먼저 알리는 거예요.”

영화 <내외인>이 프랑스로 오기까지 남은 시간.

약 2주.

그동안 어떻게든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 보는 거다.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놓으신 게 있을까요?”

에바 편집위원이 말했다.

나는 숭어를 한 조각 입에 넣었다.

숭어 요리라.

맛보기 전까지는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이런 걸 먹어 볼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내 손으로 숭어 요리를 사 먹을 일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건, 내 책도 마찬가지다.

“읽힐 거예요.”

“네?”

“<내외인>을 읽히는 거죠. 그게 제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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