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73화 (73/204)
  • 73화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

    내가 자란 큰아버지의 집이다.

    내가 세 살 때.

    가난한 부모님이 나를 맡긴 곳이기도 하고.

    할아버지 때만 해도 우리 집은 부자였다.

    통인동 골목이 다 우리 가문 것일 정도로.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었다.

    청소년이 될 무렵 남은 건 이 한 칸의 집뿐.

    큰아버지는 장손인 내가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기술을 배우라는 압박에 건축술을 선택했다.

    나는 나를 키워 준 큰아버지가 항상 고마웠다.

    동시에 항상 미웠다.

    왜 할아버지의 재산을 지키지 못했는가.

    왜 화가가 되고 싶은 내 욕망을 묵살하는가.

    나는 그의 뜻대로 건축기사가 됐다.

    하지만 결국 작가로 죽었다.

    예술가로 죽은 것이 그에 대한 나름의 복수이려나.

    통인동 154번지 골목에는 큰아버지의 집이 남아 있다.

    할아버지가 물려준 바로 그 집.

    용케 허물리지 않고 ‘이상 기념관’이 된 건물.

    나는 지금 그 앞에 서 있다.

    현대식 건물 사이에 우두커니 남은 집.

    벽은 기념관답게 유리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들락거리며 내 이야기를 숙덕거린다.

    전시된 것들이야 뻔하다.

    어디선가 기증받은 내 육필 원고.

    나를 영웅으로 만드는 찬사들.

    나는 그 안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저 안에 있는 건 하나같이 가짜처럼 느껴졌다.

    대신 나는 통인동 골목을 걸었다.

    한때 우리 가문의 것이었던 그 땅을.

    카페며 가게며 가정집이며….

    그 땅을 지금 여러 사람들이 조각조각 나누어 가졌다.

    우리 가문의 것이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골목의 끝까지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늘을 보았다.

    청명한 하늘이다.

    그리고 저 하늘에서 내려다볼 이 골목을 상상했다.

    조각조각 난 땅.

    이 땅에 살았던 할아버지, 큰아버지, 그리고 나.

    “음….”

    쓰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눈앞의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제목을 붙였다.

    <새>

    이 ‘새’는 <오감도>를 떠올린 ‘조감도’의 ‘조’를 의미한다.

    소설은 새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새의 시선.

    그 시선이 닿은 곳은 작은 땅덩어리.

    그 땅덩어리에 세 명의 부자가 산다.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아들.

    세 사람은 서로를 죽도록 증오한다.

    새는 하늘을 빙글빙글 돈다.

    그리고 세 부자를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훔쳐 듣는다.

    그들은 항상 화를 낸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럽다.

    원래 세상일은 멀리서 볼수록 희극적이다.

    가문의 일이란 특히 더 그렇다.

    세 부자는 싸움 끝에 땅을 세 조각으로 나눈다.

    그러나 땅을 나누는 일로 또 갈등이 생긴다.

    그들은 뒤엉켜 싸운다.

    새는 여전히 하늘을 뱅뱅 난다.

    아들이 그 새를 손가락질한다.

    ‘저 새는 건방집니다.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순간.

    새는 관찰자에서 인간들에게 쫓기는 생물이 된다.

    세 부자는 새를 향해 돌을 던진다.

    새는 돌을 맞는다.

    새의 시선이 하늘에서 바닥으로 거꾸러진다.

    나는 그렇게 정신없이 초고를 써 내려갔다.

    세 부자는 우리 가문의 모습이다.

    ‘새’는 지금의 내가 되겠지.

    ‘기억’이란 내려다보는 행위다.

    과거에는 몰랐던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입장에선… 내려다보는 인간이 건방질 수밖에.

    새가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소설에서 밝히지 않았다.

    그 부분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싶어서였다.

    오랜만에 산문을 쓰니 재미가 좋았다.

    시가 내 속을 끝까지 털어 내게 하는 힘이 있다면, 소설은 쓰면 쓸수록 나를 정돈하게 하는 힘이 있다.

    아이로 남고 싶을 때는 시를, 어른이 되고 싶을 때는 소설을 쓰는 게 맞는 거겠지.

    <새>는 우리 집안 남자들의 이야기다.

    부자였던 할아버지.

    가산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와 삼촌.

    목숨마저 부지하지 못한 나.

    삼대의 우스운 연대기를 떠올리는 나의 기억과 시선.

    한때 우리 집안의 땅이었던 통인동의 작은 카페.

    나는 그곳에서 한 편의 단편 소설을 뚝딱 써냈다.

    * * *

    그날 밤.

    나는 <새>의 초고를 지훈에게 보여 줬다.

    지훈은 <새>를 뚝딱 읽었다.

    “크으… 마초적이야.”

    “그렇지?”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다보는 시선’. 이게 한 건 했는데요? 왜, 그렇잖아요. 객관적인 시선에서만 보이는 매력. 특히 이런 남자들 싸움들에서 감정의 기름기를 싹 빼고 행동만 보여 주면… 굉장히 마초적으로 변하죠. 싸움은 싸움이되 본질은 스포츠인 권투처럼.”

    “딱 그 지점을 노린 거야. 사람의 싸움은 감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새’의 시선을 통해 행위만 보여 주는 거지. 감정의 기름기를 없애고, 버석버석한 느낌만 날 수 있도록.”

    내가 기억하는 버석버석한 어린 시절처럼.

    그런데 지훈이 대뜸 이런 소리를 했다.

    “형, 근데 아버지랑 사이 안 좋았어요? 아니면 할아버지랑?”

    소설은 작가의 내면을 반영한다.

    지훈도 이 글에서 내 가족사를 읽어 낸 거다.

    내 경우엔 아버지가 아니라 큰아버지지만.

    “뭐… 그런 셈이지.”

    “형, 외동이죠? 같은 외동인데 저랑은 다르네요.”

    지훈이야 남자치곤 말도 많고 애교도 많으니.

    이래저래 집안에서 사랑을 받는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외동은 내가 아니라 혜경이다.

    사실 내겐 두 명의 동생이 있다.

    남동생 운경과 여동생 옥희.

    그중에서 옥희는… 아픈 손가락이랄까.

    옥희는 내가 24살 때 애인과 만주로 도망을 가 버렸다.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옥희를 죽을 때까지 못 봤다.

    아꼈던 동생이던 만큼 씁쓸한 일이었다.

    아주 간만에 가족 생각을 했다.

    언젠가 옥희와의 일도 소설로 쓸 수 있을까.

    앤솔로지 마감까지는 앞으로 일주일.

    신―문학에 동시에 네 개의 작품이 올라가야 한다.

    신라문학 측에서 앤솔로지 게시판 권한은 받은 상황.

    내가 모든 원고를 받아서 한꺼번에 올리기로 했다.

    슬슬 다른 작가들도 초고가 나왔어야 할 텐데?

    나는 ‘앤솔로지 팀’ 단톡방을 열었다.

    ― 다들 진행 사항이 어때요?

    ― 음….

    이건 김미소 작가.

    ― …ㅎ

    이건 현민상 시인.

    뭐, 다들 평범한 마감 직전 모습들이군.

    ― 전 준비된 것 같아요.

    역시 한지온 작가.

    다르긴 다르다.

    마감 일주일 전에 원고가 나오다니.

    ― 이상 작가님은요?

    ― 저는 초고만. 이제 퇴고해야죠.

    ― 당장 쓰겠습니다. 죽을죄를 지을 순 없죠.

    현민상 시인이 너스레를 떨었다.

    김미소 작가는 말도 없다.

    …설마, 펑크는 안 내겠지?

    ― 이거 정말 재밌네요. 분명 혼자 쓰고 있는데 같이 쓰는 느낌이 나요.

    한지온 작가가 말했다.

    나는 씩 웃었다.

    바로 이 느낌이다.

    작가들의 소속감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마음이 맞는 작가들과 ‘함께 쓰는 느낌’.

    그게 다다.

    * * *

    프랑스 파리 8지구, 리브레 출판사.

    해외저서팀.

    장 사원은 <내외인>의 한국어판과 프랑스어판 원고를 교차해서 살펴보는 중이었다.

    <심슬리 저택> 번역본의 최종교를 보고 있던 에바 편집위원이 물었다.

    “장한테도 한국 문학은 어렵지?”

    “제가 한국어가 짧아서… 쉬운 작품도 아니고요. 하지만 작품 자체는 정말 좋아요.”

    장 스테판은 5살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이민을 왔다.

    한국어를 쓰는 부모님 덕에 모국어를 잊진 않았다.

    한국어학을 복수전공을 하기도 했고.

    “광고 문구도 다 뽑았고, 이제 최종교 보고 책만 나가면 돼. 마리앙 편집장한데 바득바득 우겨서 낸 책이니, 잘되어야 하는데.”

    “….”

    “장 사원이 보기엔 어때? <내외인>. 솔직하게.”

    “음….”

    장 사원은 말을 아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외인>은 프랑스의 그 어떤 소설에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출판은 작품성이 다가 아니었다.

    “작품 자체로만 보면 <심슬리 저택>보다 한 수 위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아무래도 ‘한국 작가’라는 게 걸려요.”

    “하아… 역시. 이번에도 동의.”

    말하지 않아도 문제점은 명확했다.

    <내외인>은 훌륭하다.

    ‘이상’의 작품관도 훌륭하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국적이 걸린다.

    이상이 영화 감독이나 화가였다면 얘기가 달랐을 거다.

    한국의 예술 영화나 화가는 꽤 ‘먹어 주니까’.

    하지만 ‘문학’은 다르다.

    유럽 문학 시장에서 작가의 국적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 ‘국적’ 자체가 작품 성향을 홍보해 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유럽 작가의 작품은 와인 같은 깊은 맛.

    미국 작가의 작품은 스낵 같은 가벼운 맛.

    남미 작가의 작품은 새콤달콤하고 화려한 맛.

    일본 작가의 작품은 단정하고 담백한 맛.

    그런데 한국 작가?

    유럽의 독자들은 한국 문학의 맛이 뭔지를 모른다.

    모르는 맛을 굳이 먹어 보려는 독자들? 많지 않다.

    “이거, 홍보가 굉장히 중요하겠는걸.”

    “어려운 작업이에요. 팀장님.”

    장 사원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마리옹 편집장이 <내외인> 건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바 편집위원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낼 건 내야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책은, 우리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게 읽혀도 부족하지 않을 작품이라고.”

    장 사원은 피식 웃었다.

    에바 편집위원은 그에게 말했다.

    “마리옹 편집장은 절대 <내외인> 한 권에 홍보를 몰아주진 않을 거야.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걸 생각해야 해. 장 사원도 아이디어 좀 내 봐. 알았지?”

    장 사원은 난감했다.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거’라니.

    사원에게 뭘 바란단 말인가.

    하지만 별수 있나.

    하라면 해야지, 사원인데.

    “…네. 생각해 보겠습니다.”

    또, 같은 한국인으로서 <내외인>이 잘됐으면 싶기도 하고.

    * * *

    ― 얼른 주시죠. 작가님.

    ― 자, 자비를… 잠시만요.

    ― 미소야.

    ― 언니 잠깐만. 나 마지막 부분 퇴고 중.

    ― 김미소 실망. 나보다 늦을 줄은 몰랐다.

    ― 오빤 시잖아!

    앤솔로지 마감 30분 전.

    ‘앤솔로지 팀’ 단톡방은 난리가 났다.

    김미소 작가는 논문이다 뭐다 불안불안 하더니.

    결국 지금까지 퇴고를 하고 있다.

    나머지는 이미 원고가 준비된 상태.

    기다리는 동안 나는 두 사람의 글을 봤다.

    현민상 시인의 작품은 <리모트콘트롤러>.

    기억의 작동법을 유쾌한 언어로 표현한 산문시.

    한지온 작가의 작품은 <사자의 꿈>.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의 엉켜 버린 내면을 담담한 고백체로 풀어놓은 소설.

    좋은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내 작품인 <새>까지 하면.

    모두 ‘기억’이라는 주제와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마감 15분 전.

    단톡방에 파일이 하나 올라왔다.

    ― 미안! 마지막 퇴고까지 끝!

    ― 오타 많은 거 아니냐?

    ― ㅡㅡ없거든. 양심적으로 시인은 그런 말 맙시다?

    ― 미소 고생 많았어.

    ― 언니ㅜㅜ

    김미소 작가가 소설을 보내왔다.

    제목은 <벤쿠버, 벤쿠버>.

    내가 파일을 업로드하려 준비하는 동안, 현민상 시인이 물었다.

    ― 무슨 내용이야?

    ― 음… 한 여자가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는데, 그 시간을 굉장히 화려하게 기억하지만 사실은 암담하게 실패했단 이야기.

    ― 흥미롭네요. 그럼 이제 올립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들은 모두 좋다고 말했다.

    나는 네 편의 소설을 다 올리고, 게시판을 오픈했다.

    ― 으아, 진짜 올라갔다.

    ― 오빠 호들갑 그만.

    ― 벌써 누가 결제했는데?

    ― 올리자마자 오십 명? 헐??

    ― 미소야 호들갑 그만.

    ― ㅡㅡ자기도 좋으면서… 팔십 명!

    결제 수는 순식간에 오십 명을 넘어 백 명에 다다랐다.

    출발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결제 수가 다는 아니었다.

    한지온 작가가 링크를 하나 보내며 말했다.

    ― 인터넷 기사 바로 떴는데요? 기다렸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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