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여러 작가가 참여하는 앤솔로지.
당연히 통일된 키워드가 필요하다.
키워드는 대체로 작가들 합의를 통해 정해지기 마련.
현민상 시인이 말했다.
“저는 너무 감정적인 것만 아니면 돼요. 사랑, 눈물… 뭐 이런 거. 제가 서정시는 정말 못 쓰거든요.”
“판타지스러운 것도 좀… 리얼리즘이 살아 있는 편이 좋아요.”
김미소 작가도 한마디 했다.
나는 한지온 작가에게 물었다.
“작가님은요?”
“저는… 모두에게 비슷한 무게를 주는 키워드였으면 좋겠어요. 너무 어렵거나 지엽적이어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게.”
“…역시 언니는 달라. 우린 너무 이기적이었어. 그렇지, 민상 오빠?”
“어. 할 말이 없다.”
두 사람은 잔을 짠 하고 잔을 부딪쳤다.
한지온 작가가 내게 물었다.
“작가님은 생각하신 키워드가 있나요?”
키워드는 아직 없지만, 하고 싶은 건 있다.
이 앤솔로지 모임의 의미를 담는 것.
나는 이들에게서 과거의 ‘구인회’를 본다.
그때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비슷하게 느끼고 있다.
…이 감정을 보다 일반적인 단어로 바꾸자.
이 세상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
나는 그들에게 넌지시 말했다.
“‘기억’은 어때요?”
“기억… 기억….”
한지온 작가가 읊조렸다.
현민상 시인은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요?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단어.”
“쓸 수 있는 이야기의 범주가 넓을 것 같아요. 저도 찬성!”
김미소 작가도 좋은 모양이었다.
한지온 작가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기억’을 가지고, 함께 잘해 보죠.”
나는 잔을 들었다.
그들의 잔들이 달려와 부딪쳤다.
그렇게 앤솔로지의 대략적인 구성이 끝났다.
‘기억’을 가지고 뭘 쓸지는… 생각을 해 봐야겠지.
* * *
프랑스 파리.
리브레 출판사.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에바 편집위원은 결연한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품엔 파일철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녀가 멈춘 곳은 편집장실의 문 앞.
똑똑똑!
어딘지 악에 받친 노크 소리.
그 소리만 들어도 마리옹 편집장은 알 수 있었다.
에바 편집위원이 왔다는 걸.
“들어와요.”
아니나 다를까.
에바 편집위원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나타났다.
마리옹 편집장은 소파에 옮겨 앉으며 앞자리를 권했다.
“어서 와요, 에바. 자리에 앉아요.”
“찾았습니다, 편집장님.”
“뭘요?”
“저번에 말씀하셨던 ‘이상’의 작품관을 알 수 있는 자료요.”
“아….”
‘그런 자료가 있었어?’
마리옹 편집장은 놀랐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영어로 된 건가요?”
“아뇨. 프랑스어예요.”
“네?”
이번만큼은 놀람을 숨길 수 없었다.
한국의 신인 작가가 프랑스어 작품을 갖고 있다고?
“…소설?”
에바 편집위원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틀리셨네요. 이상의 시와 그 시를 해석한 비평입니다.”
에바 편집위원은 서류철을 내밀었다.
마리옹 편집장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나저나 시라니… 시는 번역하기도 힘들 텐데?’
“이걸 어디서 찾은 거죠?”
“그의 SNS에서요. 저희 팀의 인재 스테판 장이 찾아냈어요. <내외인>의 제목과 우리 리브레 출판사의 이름을 모두 태그했던데요.”
“그래요? 마치 우리를 보라고 만든 자료 같네요.”
“우리가 고민할 걸 알았다는 것처럼 말이에요.”
“…똑똑하네.”
“그 시를 보시면 똑똑하다는 말로는 설명하실 수 없을걸요.”
마리옹 편집장은 서류철을 넘겼다.
그 안에 있는 세 개의 시.
그리고 그것을 해설한 비평.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번역의 수준.
‘…수준급의 번역.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아.’
그다음에 들어 온 건 세 편의 시.
‘난해해. 하지만 난해함을 위해 써진 시는 아니야. 간간이 느껴지는 확실한 이미지가 대단히 파괴적이고, 매력적이야. 그런데 이 좋은 시에 비평을 굳이 붙인 이유가…?’
그녀는 마지막으로 비평을 읽어 보았다.
짧지 않은 글.
그러나 번역이 워낙 좋아 술술 읽혔다.
“이건…!”
마리옹 편집장은 세 개의 시를 다시금 봤다.
그녀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이 비평의 존재 의미를.
이상의 시는 대단하다.
<내외인>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시의 미학은 난해함에서 온다.
즉, 난해함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그리고 그에 대해 약간의 길을 잡아 주는 비평이란….
“…적재적소네요, 이 비평.”
“편집장님.”
에바 편집위원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이상의 작품관은 제가 더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보여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작가 중에, 이 이상 자기 세계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작가는 흔치 않아요.”
“….”
“놓치지 마셔야 해요. 이 작가.”
“…그렇게까지 확신한다고요?”
“네. 틀림없습니다.”
에바 편집위원은 확답을 했다.
마리옹 편집장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흠….”
에바 편집위원은 긴장하며 무릎을 꽉 잡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마리옹 편집장은 확실한 지표 없인 외국 작가의 책을 내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그의 소설이 말해 주지 않는가.
그만이 이룰 수 있는 미학적 성취를.
그의 시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견고한 그의 작품관을.
“…에바 편집위원.”
긴 고민 끝에, 마리옹 편집장이 입을 열었다.
* * *
기억.
나는 작업실에서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내게 기억이란 ‘내려다보는 일’이다.
내 안의 기록들을… 조감도처럼.
나는 노트에 이렇게 썼다.
<오감도>
오감도.
나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연작시다.
‘오감도’라는 단어는 건축 용어인 ‘조감도’에서 나왔다.
조감도란, 지상에서 지표를 내려다보며 그린 설계도.
마치 새의 시선과 같다고 하여 새 조(鳥) 자를 쓴 것.
난 그 말이 재밌어서 새 조 자를 까마귀 오(烏)자로 바꿨다.
까마귀의 시선으로 내려다본 1930년대의 세계.
그 불길하고 불편한 감정을 여러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오감도>다.
비록 끝까지 연재는 하지 못 했지만.
나는 다시 한번 그 일을 해 보고 싶었다.
내 안의 기록을 훤히 내려다보는, 어떤 시선을 만드는 일 말이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우웅― 우웅―
전화가 걸려 왔다.
미쯔하루 편집장이었다.
단번에 눈치챘다.
프랑스로 보낸 <내외인>의 결과가 나왔구나.
리브레 출판사가 내 SNS를 확인한 후.
나는 더 연연하지 않기 위해 그쪽 일을 잠시 잊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전화를 받았다.
“이상입니다.”
― 네, 작가님. 도마크입니다.
“네. 프랑스 건 때문에 전화를 주셨겠군요.”
나는 뜸들이지 않고 바로 물었다.
― 아하하… 네. 맞습니다.
그리고 잠시 그는 말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 축하합니다, 작가님. 작가님의 <내외인>이 프랑스 문학 시장으로 진출하게 된 것 같습니다.
순간, 나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험을 한 보람이 있었구나.
― 리브레 쪽에서도 이례적으로 논의가 길어졌나 봅니다. 그쪽 담당자 말로는 부족한 지표를 작품성과 또 작가님 SNS에 올려놓은 시와 비평을 통해 확인했다고 하더군요.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
올려 두길 잘 했어.
“출판장님께서 힘써 주신 덕분입니다.”
― 하하하… 그런데 SNS에 올린 프랑스어 자료, 저도 봤습니다만. 리브레를 겨냥해서 올려 두신 건가요?
“네. 히루키 작가님이 그러시더군요. 어쩌면 제 작품관을 확인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준비를 해 뒀습니다.”
― 아하,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게 없었더라면 결정이 더 어려웠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미쯔하루 편집장은 계약을 위해 내 메일 주소를 리브레 쪽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이로써, 도마크의 역할은 정말 끝이었다.
“저, 미쯔하루 편집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 아닙니다. 계약사항이었는데요.
“그래도 편집장님께서 특별히 힘써 주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하하… 저야 말로요. 그럼 이제 저흰 가벼운 마음으로 연말에 주실 원고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맞다, 그것도 있었다.
일본의 작가들과 함께 실릴 ‘도마크 연말 작품집’
“늦지 않게 써서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계약 사항에 있던 것처럼, 작가님의 소설이 도마크를 통해 프랑스로 갔다는 내용을 저희 측에서도 홍보 자료로 사용해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나는 이 사실을 지훈에게 알렸다.
지훈은 뛸 듯이 기뻐했다.
“형! 진짜 너무 잘됐어요!”
번역자를 알아보느라 고생을 한 지훈이었다.
보람으로 치면 나 못지않겠지.
“프랑스라니… 난 근데 형 소설 유럽에서 먹힐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외인>, 모호하고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한 소설이잖아요. 프랑스에 딱 어울려요.”
“리브레 담당자에게 내 홈페이지 주소를 알려 줄 생각이야. 지금까지의 작품, 영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프랑스어로 옮겨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때 그 교수, 연락 좀 해 줄 수 있지?”
“당연하죠. 저한테 맡기세요. 그리고 형 소설 프랑스 진출한 거, SNS에 올릴까요? 대한문학상 놈들 콧대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그냥 둬.”
나는 지훈에게 말했다.
“홍보는 도마크가 할 거야. 한국 기자들이 그걸 가만히 둘 리가 없고.”
“그럼….”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퍼지기 마련이야.”
* * *
‘대한문학상’ 시 부문 본심 심사장.
일곱 명의 본심 심사위원들이 본심작들을 보고 있었다.
지금 문단은 이상의 시 발표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오진우 비평가의 글이 올라온 후론 더더욱.
그건 이 심사장의 분위기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뭘 읽어도 이상의 시 이상의 파괴력이 보이지 않으니….
어떤 심사위원들은 이런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러게 <세사노>를 본심까지는 얌전히 올릴 것이지. 왜 괜히 자극을 해서는 시까지 쓰게 만드나. 괜히 우리 쪽만 난감하게.’
“올해는 좋은 시가 많군요.”
한 심사위원만이 저렇게 뻔뻔한 소리를 할 뿐이었다.
그는 원로 비평가이자, 가라사대의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심사위원이 볼멘소리를 했다.
“젊은 시인들 중에는 이지수 시인과 현민상 시인의 시가 좋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종심으로 올릴 만해요.”
“현민상 시인은 언어의 깊이가 좀 얕지 않나요?”
가라사대 편집위원이 말했다.
그는 이상의 작품을 심사한 예심 위원을 전화로 압박한 사람 중 하나였다.
본인은 모르쇠로 일관 중이었지만, 소문은 날 대로 난 상태.
다른 심사위원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상과 앤솔로지를 낸다는 말을 듣고 저러는구만. 이번에는 그냥 못 두지. 본심까지 올라온 작품을 제멋대로 떨어뜨리려 하나.’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만.”
“저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깊이가 얕은 게 아니라 젊은 시인답게 생동감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거죠.”
“크흠….”
그는 괜한 헛기침만 했다.
“쉬었다 합시다.”
한 심사위원이 말하자, 다들 피곤한 듯 동의했다.
얼추 작품들은 추렸으니 일은 거의 다 한 셈이었다.
“이렇게 기운 빠지는 심사는 또 처음 아닙니까?”
“그러게요. 거 참….”
그렇게 차마 속내는 내보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로, 한 심사위원이 입을 열었다.
“어? 이거 보세요. 이 기사요.”
“네?”
“뭔데 그래요?”
심사위원들이 그에게 몰려갔다.
그가 들고 있는 휴대폰 화면에는 문화부 기사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그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내외인’, 한일 시장을 넘어 프랑스로 진출하다.>
기사는 이상의 <내외인>이 프랑스 대형 출판사 ‘리브레’의 신간으로 발간된다는 내용이었다.
덧붙여, 이상의 작품에 대한 리브레 측의 찬사까지.
― 한국의 이상 작가의 작품은 인종과 국경을 무화시키는 언어적 미학을 극한으로 발휘한다. 한 남자의 분열적 내면과 정체성을 남자1과 남자2의 에피소드로 서사화한 이 작품은 프랑스인들에게도 깊은 충격을 줄 것으로 예상한다.
한국 소설의 외국 진출.
꽤나 어려운 일이다.
세계 문학 내에서 ‘한국 문학’의 캐릭터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콧대 높은 유럽?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일을 이렇게 조용히 이뤄 냈다고?
대체 어떻게 해낸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기사를 읽은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바로 가라사대 편집위원이었다.
그는 좀처럼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더니,
“저는 화장실에 좀….”
하는 말과 함께 초라하게 자리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