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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69화 (6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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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68)

    다시 사는 천재 작가 68

    “저, 작가님이 신-문학에 올리신 시 세 편, 다 읽었어요.”

    현민상 시인이 말했다.

    ‘시인’이 본 나의 시.

    궁금했다. 그 소감이.

    “시인의 눈엔 어떻게 보이던가요?”

    “이해가 잘 안 되던데요.”

    아. 역시.

    “그런데 좋았어요.”

    어?

    “만들어놓으신 이미지 하나하나가 느낌이 좋았거든요. 에너지가 쏟아질 듯하다고 해야 하나... 폭발적이라고 해야 하나...”

    “....”

    “그거면 되는 거죠, 시라는 게. 읽었을 때의 느낌. 남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인데 그게 어떻게 다 이해가 돼요? 느끼는 거지.”

    김미소 작가가 말했다.

    “이 오빠 지금 이렇게 쿨한 척 말하고 있지만, 야밤에 연락 와서 작가님 시 좋다고 난리였어요.”

    “야! 김미소! 쓸데없는 소리-”

    현민상 시인의 얼굴이 벌게졌다.

    한지온 작가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동감해요. 전 시 읽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시를 쓰시던데요.”

    그 순간이었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흑백 사진이 머릿속에 지나가는 것처럼.

    1934년.

    내 시를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에 사무치던 때.

    나는 ‘구인회’라는 문학 동인에 들어갔다.

    이름 그대로, 뜻이 맞는 9명의 작가가 함께 한 모임.

    김유정, 김기림, 정지용...

    지금까지 이름을 남긴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있었지.

    김유정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난 당신 시가 좋던데.’

    ‘하지만 아무도 이해를 못 하던데.’

    ‘그래도 좋던데, 느낌이. 그거 외에 더 필요해?’

    그 말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김유정은 몰랐을 것이다.

    내가 구인회로 활동한 건 고작 삼 년.

    그들과 <시와 소설>이란 동인지를 낸 일,

    함께 문학 강연을 다닌 일...

    작가 생활에 몇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구인회도 시대의 여파를 이기진 못했다.

    많은 작가들이 나처럼 단명을 하거나,

    월북, 납북으로 생사를 달리했으니.

    내 앞에서 웃고 있는 젊은 세 작가의 생기 넘치는 얼굴.

    ‘구인회’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일본 작가들과 책을 내기로 한 여파였을까.

    나는 충동적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같이 재밌는 걸 해볼래요?”

    “네?”

    김미소 작가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함께 앤솔로지를 내보는 거예요.”

    앤솔로지.

    그것은 여러 작가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창작한 작품집을 의미했다.

    작가들의 몇 안되는 단체 활동 중 하나.

    “그래요. 전 할게요. 재밌어 보이네요. 예비발표 준비도 끝나가고.”

    김미소 작가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아....”

    나머지 두 사람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한문학상 본심 진출자.

    즉, 앞으로도 문단의 수혜를 입을 작가들.

    당연히 나와 함께 활동을 한다는 게 망설여질 것이다.

    “저희와요?”

    한지온 작가가 되물었다.

    그 물음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왜 하필 우리와?’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작가님들 글이 좋아서요.”

    구인회에 들어갈 때도 그랬다.

    그들의 작품이 좋았고,

    ‘문학’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스케줄을 확인해보겠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일단 한 발 물러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기다릴게요.”

    ***

    2학기의 문학 창작 첫 특강 날.

    나는 국문학과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서류를 작성했다.

    학교 행정이란... 어딜 가도 귀찮은 법이었다.

    “수업 때 혹시 필요한 거 있으세요?”

    차 조교가 다가와 물었다.

    이번 학기도 차 조교가 내 수업을 돕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그도 선배인데, 상황이 묘하게 됐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보드마카. 있죠?”

    “그거야 항상 구비되어 있죠. 판서하시게요?”

    그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저번 학기에 난 한 번도 판서를 한 적이 없다.

    고등학교 수업도 아니고 적을 게 뭐가 있는가.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쓸 건 없고, 그릴 게 있어서요.”

    ***

    인문대 대강당.

    후문을 통해 슬쩍 강당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날 발견한 객석이 술렁거렸다.

    일본 강의를 하고 와서 그런가.

    즉각적인 반응이 오늘따라 생생하다.

    수강 인원은 이미 전석 매진.

    청강생도 가득이었다.

    좌석 사이사이 청강생을 위한 간이 좌석도 있었다.

    차 조교가 신경을 많이 썼네.

    단상에 올랐다.

    학기의 첫 시작.

    짧게 내 소개를 했다.

    “문학하는 이상입니다. 반갑습니다.”

    학생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고요하게 날 바라보는 시선.

    수업이 시작됐다.

    “여러분들도 모두 아시겠지만, 세상은 정말 복잡하게 생겼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 왜 모르겠냐는 듯.

    “예술은 그 복잡한 세상을 바라보는 일종의 시선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뒤를 돌아 커다란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펜을 들자, 학생들이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화이트보드에 커다란 정삼각형을 그렸다.

    그리고 단상의 마이크를 뽑아 왔다.

    칠판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제겐 이 세상이 삼각형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삼각형을 바라본다.

    전혀 모르겠다는 눈빛.

    나는 왼편 아래 꼭짓점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쪽에는 외부 세계가 있죠.”

    다음은 오른편 아래 꼭짓점.

    “이쪽에는 저라는 인간의 내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맨 위의 꼭짓점.

    “여기엔 뭐가 들어갈까요?”

    모두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외부 세계와 개인의 내면.

    남은 건 뭘까? 하는 얼굴들.

    한 학생이 말했다.

    “저 둘을 이어주지 않을까요?”

    똑똑한 답이었다.

    “맞습니다. 딱 맞아요.”

    나는 마지막 꼭짓점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관계’

    “인간 내면과 외부 세계 간의 관계. 이 관계는 삼각형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내면이라는 것도 결국 내부의 영향을 받게 되고, 외부 세계 역시 개인의 내면이 모여 만들어 낸 결과물이거든요.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저의 작품들은- 이 삼각형으로 세상을 바라본 결과값입니다.”

    나는 다시 단상으로 돌아왔다.

    “창작은 세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의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재해석해야만 하죠. 그리고 그 시선을 우리는 ‘작가의 작품 세계’라고 부릅니다.”

    학생들이 비로소 필기를 시작한다.

    삼각형을 따라 그리는 학생들도 있고,

    곰곰이 생각에 빠진 학생들도 있었다.

    자신만의 시선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거겠지.

    난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재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 예를 들었다.

    저번 학기 특강보다는 심도 있는 내용.

    학생들은 잘 따라와 주었다.

    2학기 첫 번째 특강은, 그렇게 끝났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질문을 빠르게 해결하고, 단상에서 내려을 때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차 조교가 다가와 말했다.

    “고생했어요. 근무 시간도 끝났을 텐데 어서 퇴근해요.”

    “네. 아, 저... 방금 신-문학에 이런 글이 올라왔는데요.”

    차 조교가 내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 안에는 한 편의 글이 떠있었다.

    오진우 평론가의 비평이었다.

    <이상의 시 작품론 – 삼각형의 눈>

    “방금 작가님께서 해주신 강의 내용과 비슷해서요. 오 평론가님이랑 함께 얘길 나누신 건가요?”

    “...아니요. 이 글은 제가 결제해서 볼게요. 고마워요.”

    나는 차 조교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한국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 들어온 후.

    시동을 켜는 대신 휴대폰으로 신-문학에 접속했다.

    그리고 바로 오진우 평론가의 글을 결제했다.

    그 비평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이상이 발표한 세 개의 시. 그것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다를 바 없다. 이 세 개의 시는 따로 보면 각자 다른 이미지와 형식의 결에서 존재한다. 가장 먼저 발표한 <은은>은 평범한 연애시로 보이며, <무한 설계도>는 디지털 언어를 흉내 내고, <입>은 ‘먹다’라는 같은 단어가 변주되어 되풀이되는 산문시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시를 함께 놓고 보면, 이상의 시 세계가 활짝 열린다. 즉, 그는 이 세 가지 시에 자신의 세상을 모두 담은 것이다.

    <무한 설계도>를 보자. 0과 1의 규칙 없는 반복. 우리는 일단 이것이 디지털 세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안에 가끔씩 보이는 공백과 말줄임표(···)다. 디지털 세계이되, 그 안에 들어간 질서 없는 기호화 공백. 말줄임표가 환기하는 끝없이 퍼져나갈 무한성. 이는 이상이 이 디지털 세계를 무한한 가능성과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우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암시적인 이미지는 곧······

    <입>은 또 어떤가. ‘먹다’가 반복적으로 활용되며 ‘나’와 ‘너’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때 ‘먹다’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인데, ‘나’는 결국 ‘너’를 먹어버림으로서 ‘나’의 존재를 입증하는 구조로 시상은 전개된다. 즉, ‘나’의 정체성은 ‘먹는 존재’인 가르강튀아, 즉 먹는 ‘입’인 것이다. 이 시의 ‘먹음’은 곧 욕구, 욕망, 욕심의 다른 말이며 이상 내면의 강렬한 삶의 에너지가 된다. 이때의 ‘너’는······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비평가의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꼭 맞을 필욘 없다.

    작품은 작품이고, 해석은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경우가 달랐다.

    나의 의도를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짚어내는 글.

    내 시의 미학적 가치를 이렇게까지 즉각적으로 밝혀낸 글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

    -그렇다면 <은은>은 무엇일까. <은은>은 가장 처음에 쓰인 시지만, 앞선 두 시의 대미를 장식한다. 일단, ‘은은’이라는 단어를 없애보자. 행 길이의 계산된 비대칭이 그제야 드러난다. 이 절름발이 같은 시의 움직임. 그것은 곧 <무한 설계도>와 <입> 사이의 관계를 증명한다. <무한 설계도>에 드러난 디지털 세계의 확장과 공포 속에서 <입>에서 보이는 욕망 가득한 내면. 이상의 내면은 이 세계의 공포에 떨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은은>은 또 이렇게도 해석된다. ‘은은’이라는 단어를 배제하지 않고 이를 한 편의 연애시로 살펴봤을 때, 이는 에로스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무한 설계도>가 보여준 세계의 무한한 확장과 <입>이 보여준 욕망 가득한 내면. 두 요소는 <은은>을 통해 에로스적으로 뒤섞이며, 얽힌다. 즉, 이상이 이 세상을 욕망하듯, 세계 역시 이상을 욕망하는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짧지 않은 비평.

    그 비평은 내 시를 충실하게 해석해주고 있었다.

    “....”

    체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진우 평론가는... 기대 이상이었다.

    의도를 간파 당했단 생각보다는,

    이해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여덟 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연락을 할 만한 시간은 아니다.

    그럼에도 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진우 평론가님. 저 이상입니다.”

    -아, 예.

    그는 말이 없다.

    자신의 비평을 잘 봤는지 묻지도 않는다.

    나는 다른 말 대신, 이렇게 물었다.

    “혹시 지금 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또 한참 대답이 없다.

    말을 하려다, 삼키는 그 특유의 태도가 눈에 선하다.

    잠시 후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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