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68화 (68/204)

#   68 - 3905161

#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67)

다시 사는 천재 작가 67

나리타 국제공항.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되어서야 히루키를 만났다.

공항에서 만난 우리는 바로 카페로 들어갔다.

히루키는 아쉬운 티를 냈다.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한다니. 아쉽군요.”

“공항에서라도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못 뵙고 갈 줄 알았거든요.”

히루키는 집필을 할 땐 아무도 만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집필을 끝낸 그는 약간 말라 있었지만,

어딘지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흘긋흘긋 보았다.

꺅꺅거리며 호들갑을 떨긴 해도, 거기까지였다.

“이 주 정도 계셨죠? 계약을 한 것 치곤 오래 계셨는데... 그간 뭘 하셨습니까?”

나는 먼저 일본대에서의 일화를 말해주었다.

특히 내가 받은 ‘보수적인 질문’에 대하여.

그러자 히루키는 아주 즐거워했다.

“그것이 강연의 맛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외인>은 프랑스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프랑스로요? 미국이 아니라요?”

“네. 다들 제 글을 미국으로 보낼 줄 알고 있지만... 제 생각은 달라서요. 세계 시장에 진출할 거라면 제대로 시작하고 싶거든요.”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대로’의 의미를 그도 모르진 않으리라.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상 작가님은 참 신인 작가 같지 않습니다. 아니, 이제 신인은 아니지만...”

“서구권에서는 신인이다- 이거죠?”

“바로 그거죠.”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신인 작가들 특유의 겁먹음이 없단 거겠지.

“제가 처음으로 세계문학 시장에 진출했을 땐... 아닌 척 하긴 했지만 겁을 많이 먹었거든요. 나라를 고를 여유라...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되는대로, 마구잡이로 책을 보냈죠.”

“저도 겁먹긴 마찬가지입니다.”

“....”

“하지만 기회를 놓칠 생각도 없으니까요. 한 번 사는 삶이잖아요.”

이건 스스로에게 보내는 농담이다.

나의 이 두 번째 삶.

이 삶 자체가 기회다.

나는 이 기회를 내 뜻대로 몰고 가려는 것뿐이고.

히루키가 씨익 웃었다.

“세계문학 시장에서 만날 날이 머지않았군요.”

“리브레가 절 뽑아준다면 말입니다.”

“리브레라. 나쁘지 않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바보는 아니라서요. 좋은 글은 반드시 알아봅니다. 다만...”

그는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는 듯했다.

“유럽 시장은 확실히 좀 까다로워서 작가의 전작을 찾아보는 경우도 왕왕 있죠. 그 작가의 작품관이라 해야 할까요? 그런 걸 확인하는 겁니다.”

작가의 ‘작품관’이라.

그들이 찾아볼 수 있는 내 ‘작품관’이라 한다면...

영어로 번역한 <다시 사는 일> 정도일 거다.

...빈약하군.

“제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준비해야겠군요.”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일단은 <내외인>이 좋은 작품이니까요.”

“과찬이십니다. 아, 히루키 작가님도 도마크 연말 작품집에 원고를 주신다고 들었는데요.”

“맞습니다. 하여간 쉴 틈을 안 준다니까요.”

그는 투덜거렸다.

그래도 마감까진 두어 달의 시간이 있으니, 어떻게든 좋은 작품을 내겠지.

슬슬 수속을 해야 할 시간이 됐다.

가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벌써?’라고 놀라며 시계를 보았다.

“아- 아쉽군요. 아, 이상 작가님. 중요한 이야기를 빼먹을 뻔했습니다.”

“네? 뭡니까?”

“이번에 제가 집필한 단편집, 한국어판에 추천사를 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저번에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사는 일>을 발간하러 일본에 왔을 때,

나는 히루키에게 추전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다음 책에 추천사를 써주기로 했지.

그는 입국장까지 날 배웅했다.

슬슬 입국장 앞에서 줄을 서야 할 때, 그가 말했다.

“그럼,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히루키 작가님.”

“이상 작가님.”

“네.”

“우리, 같이 작품을 발표하는 건 처음 아닙니까?”

“...그렇게 되죠.”

“원고, 기대하겠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눈매에 약간의 경쟁의식이 비쳤다.

작가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경쟁의식.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네. 저 역시도요.”

나 역시 물러날 마음은 전혀 없다.

***

한국에 돌아왔다.

9월 1일.

완연한 가을이자, 새 학기의 시작이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

일본에서 쓴 시 두 편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리고 <은은>과 함께 세 편을 묶어 신-문학에 게재했다.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이게 뭔 말이여.

-이거 시예요?

-못 알아먹겠는데...<은은> 빼고는.

-<은은>도 장하늘이 가사로 만든 부분 빼고는 모르겠음.

-이상 그냥 소설 쓰는 게 낫지 않나;

-난해해. 뭘 나타내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분위기가 압도적이긴 한데.

-시 보는 거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극도의 표현주의적 시임. 그러니까 내용이 아니라 시 이미지 자체에서 뭔가를 느끼길 바라는 거. 음... 뭔가 쏟아져 내리는 느낌? 그런 거 든다.

-저게 시면 나도 쓴다. 010101010100101000111 됐지?

-윗분; 이상이 이미 저걸 쓴 이상, 님이 쓴 건 베낀 것 밖에 안 됨; 처음 썼다는 게 중요한 거임. <무한 설계도>가 이진법을 쓴 거 보니 디지털 세계를 드러낸 것 같은데. 중간 중간 빈 공간이 의미하는 건 뭘까. 괜히 저런 걸 넣진 않았을 텐데. 모르겠다. 난 여기까지.

-<입>은 소리 내서 읽어보면 좀 매력적. ‘먹다’가 계속 나오니 랩 같기도 하고. 스웩 있네ㅎ

1930년대보단 좀 낫군.

그때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화들을 냈는데.

그 여파로 <오감도> 연재를 중단하기도 했고.

지금 독자들은 나름대로 해석도 해보고, 즐기기도 하는 것 같다.

오진우 평론가는 아직 말이 없다.

나는 지훈에게 그의 소식을 슬쩍 물었다.

“오진우 평론가. 요즘 아무데도 안 나타난대요. 엄청 집중하는 중인가 봐요.”

지훈은 내가 일본에서 사온 젤리를 우물대며 대답했다.

지훈도 그새 논문을 삼분의 일이나 썼다.

확실히 예비발표를 잘 해놓으니, 진도가 빠르다.

“논문에 집중하니까 잡생각 안 들고 좋더라고요.”

“논문 다 쓰면 청탁 받을 거지?”

“청탁도 받고 비평도 써서 신-문학에 올리려고요.”

좋아.

지훈도 점점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고 있다.

나도 이제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새로이 적응해야겠지.

내 새로운 모교, 한국대학교에서.

***

모교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인수대 때처럼 수업은 특강으로 대체되었고,

논문도 나중의 일이니.

그럼에도 대단히 만족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도서관이다.

한국대라는 위용에 걸맞은 도서관.

그 안엔 인수대에선 꿈도 못 꿔봤던 고서와 보존자료가 쌓여 있었다.

나는 갓 발급받은 학생증으로 책을 잔뜩 빌렸다.

그리고 막 도서관을 나가려던 찰나, 한 사람이 떠올랐다.

김미소 작가.

그러고 보니 이젠 동문이 되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톡을 해보니, 마침 학교라고 했다.

-커피라도 한 잔 하실래요?

내 톡에 김미소 작가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런 답이 돌아왔다.

-제 몰골에 놀라지 않을 자신 있으시다면.

몰골?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기대되잖아.

우리는 교내 브런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자리를 잡고 그녀를 기다리던 중.

“이상 작가님.”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위아래로 갖춰 입은 회색 트레이닝복, 후드를 눌러 쓴 머리. 뿔테안경.

“...학교에서 밤 샜어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시겠어요? 이번 학기에 박사 논문 예비 발표 들어갈 거거든요. 그거 준비 중이에요.”

그리고 입을 가리고 하품까지 했다.

한국대 박사 논문.

즉, 한국 최고 대학의 최고 학위 논문.

그럼 밤을 샐 가치가 있지.

“뭐 드시겠어요? 선배 된 입장에서 후배님 내리사랑 좀 하게.”

“아닙니다. 뉴비가 알아서 모셔야죠. 잘 보여야 할 선배님인데.”

“우리 학교 학풍 촌스러워서 후배한테 밥 얻어먹으면 못났단 소리 들어요. 지갑 넣으세요.”

그런 말까지 들으니 결국 지갑을 넣었다.

어쩐지 김미소 작가는 갈수록 포스가 강해진다.

아무튼 우리는 간단한 브런치를 함께 먹었다.

그녀는 배가 많이 고팠는지 접시를 싹싹 배웠다.

그리고 내 눈치를 슥 보고 말했다.

“속 시원할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뭔데요?”

“대한문학상. 형평성 문제 제기되고 나서 완전히 김 빠졌어요.”

“저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 문단도 말이 많았군.

“작년까지만 해도 누가 받는지를 두고 기대 많았잖아요. 지금은 사람들이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더라고요.”

문학상은 원래도 까다로운 분야다.

심사위원의 주관에 수상 기준이 결정되니까.

그런데 이렇게 공신력을 잃으면...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보아하니 대한문학상의 수명도 얼마 안 남았다.

난 김미소 작가에게 말했다.

“본심에 오른 작가분들이 제일 큰 피해자네요.”

이대로라면 상을 받아도 명예롭지 않을 테니.

김미소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 잠시만요.”

김미소 작가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지온 언니, 왔어?”

지온 언니?

한지온 작가를 말하는 건가?

한지온 작가는 등단 후 꾸준히 좋은 활동을 보여주는 작가다.

작년, 김한이 그녀의 <수사기밀>을 따라했다가 내게 걸리기도 했지.

“어. 민상 오빠랑? 알았어. 아, 나 마침-”

김미소 작가가 눈길을 보냈다.

나와 함께 있는 걸 말해도 되겠냐는 듯.

나는 좋을대로 하란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 작가님이랑 커피 한 잔 마시는 중이야. 응? 어, 맞아 ‘그’ 이상 작가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어... 지금? 음... 알았어. 여쭤볼게.”

김미소 작가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한지온 작가랑 현민상 시인 아시죠?”

“그럼요.”

현민상 시인도 문단에서 촉망받는 신인.

최근 발간한 시집 <잠의 언어>도 인상 깊게 봤다.

그리고 둘 다... 대한문학상 본심 진출자들.

“두 사람 이번에 한국대 학부 강의를 하게 됐거든요. 서류 때문에 잠깐 학교 들렀다는데... 만나보실래요?”

동료작가들이라.

김미소 작가 외에는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긴 했다.

굳이 피할 일도 아니긴 하지.

“그래요, 그럼. 인사라도 하죠.”

우린 한국대 정문으로 나갔다.

그들은 정문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내 또래의 작가들.

한지온 작가는 단정하고 차분한 이미지였고,

현민상 시인에겐 어딘지 개구쟁이 느낌이 났다.

“이상 작가님. 처음 뵙겠습니다. 현민상입니다.”

“반갑습니다. <잠의 언어>, 인상적으로 봤어요.”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빛냈다.

“제 시집 보셨어요?”

“당연하죠.”

독서는 항상 하는 거니까.

그 중에서도 그의 시집은 상당히 좋았고.

“한지온 작가님도, 정말 팬이에요.”

“영광이네요, 이상 작가님.”

나는 두 사람과 차례로 악수를 나눴다.

두 사람은 서류 때문에 곧 학교로 들어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 작가님 계신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올 걸. 김미소 넌 왜 말을 안 해줘?”

“내가 오빠한테 그 말을 왜 해줘? 지온 언니면 모를까.”

두 사람이 티격태격했다.

김미소 작가, 이제 친한 작가도 많아진 모양이다.

등단 초기 불안해하던 모습은 오간 데 없다.

이젠 문단에 자리를 잡았단 뜻이겠지.

한지온 작가와 나는 서로의 소설에 대해 몇 마디 의견을 나눴다.

그녀의 글은 침착하고 냉정하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진 작가랄까.

그래서인지 그녀의 목소리에도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한참 그렇게 소설 이야기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상 작가님.”

나를 빤히 보고 있던 현민상 시인이 대뜸 입을 열었다.

“네.”

“저, 작가님이 신-문학에 올리신 시 세 편, 다 읽었어요.”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