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65화 (65/204)
  • #   65 - 3894100

    #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6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64

    “프랑스입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작가님이라도 프랑스를 선택하겠지요.”

    유럽엔 세 곳의 큰 문학 중심지가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 중 한 나라에서만 성공을 해도, 다른 유럽권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판권을 사간다.

    영국 문학은 흥미로운 서사와 경제적이고 담백한 문체가,

    프랑스는 유연하고 파괴적인 기법과 실험적인 작가주의가,

    독일은 정적인 형식과 철학적 사유 그리고 절제미가 돋보인다.

    내 문학은 세 나라 중 프랑스와 가장 닮았다.

    아니, 내가 예전부터 프랑스풍의 문학관을 추구해왔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형식도 그랬거니와, 언어적으로도.

    SCANDAL(추문), BOITEUX(절름발이), AMOUREUSE(연인), MADAME(여인) 등등의 단어들.

    나는 이런 단어들을 내 작품에 가져다 쓰곤 했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던 아니고, 언어 자체에 매혹을 느꼈기에.

    “가능할까요? 번역자만 구해주시면 번역비는 당연히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혹시 제 제안이 도마크 쪽에 피해가 된다거나...”

    “아! 그럴 리가요. 뭐, 저희야 어디까지나 ‘소개’를 하는 입장이니 사실 어느 나라로 보내건 큰 차이는 없습니다. 프랑스어 번역자를 구하는 게 어렵지도 않고요.”

    “번역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얇은 한 권 분량이니, 한 달 정도 걸리겠군요.”

    “좋습니다.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또 무엇입니까?”

    미쯔하루 편집장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혹시 <다시 사는 일>이 아니라 <내외인>을 소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그건....”

    미쯔하루 편집장은 안경을 한 번 치켜 올렸다.

    “부탁입니다, 편집장님.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십시오.”

    10쇄 이상이 팔린 건 <다시 사는 일>이다.

    아무리 <내외인>이 베스트셀러가 될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그건 잠재력일 뿐.

    그들의 입장에서 이건 모험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도.

    “저희야 작가님의 작품을 믿습니다만, 그들의 기준선은 꽤 높습니다. 10쇄를 넘긴 <다시 사는 일>을 내보이는 게 확실하고 안정적일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유럽권이라고 해도 판매 부수는 중요한 지표니까요.”

    “그걸 아시면서 왜....”

    “세계문학 시장에 첫 선을 내보이는 작품이, ‘소설’이었으면 해서요.”

    “아....”

    미쯔하루 편집장은 그제야 날 이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특히 장편소설은-”

    “알고 있습니다. 소설가의 정수를 보여주는 글이죠.”

    “맞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설사 실패한다 할 지라도요.”

    이 계약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내겐 장편의 원고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얘기가 달라졌다.

    내겐 <내외인>이 있고, 꼭 이걸 세계시장에 내보이고 싶었다.

    또한 조인후 감독이 각색한 영화 <내외인>

    그의 영화는 유럽권에서 특히 인정받는다.

    운이 좋아 시너지 효과가 날 수도 있을 테고.

    그는 생각에 잠겼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내외인>을 유럽 시장으로 내보낼 판로를 짤 생각이었다.

    조금 고생스러운 길이라 하더라도.

    “흠...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미쯔하루 편집장이 말했다.

    “일단 <내외인>과 <다시 사는 일> 모두 번역을 맡기지요.”

    “네.”

    “그리고 저는 이 일과 관련된 도마크 내부 인사들과 얘길 좀 나눠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다행이 작가님에 대한 도마크 내부의 이미지는 아주 좋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업의 영역이니 안 된다 해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진 말아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단번에 수락을 할 거란 생각은 애초에 안 했다.

    이정도만 해도, 반은 성공이었다.

    ***

    유럽 시장에 어떤 책을 먼저 내보일 것이냐.

    나는 도마크 측에 내 입장을 충분히 밝혔다.

    남은 건... 내 할 일을 하며 기다리는 것.

    일본에서 해야 할 두 번째 일.

    바로 두 편의 시였다.

    한국에 오기 전,

    나는 지훈에게 오진우 평론가와의 일을 말해주었다.

    지훈이는 꽤 흥미로워했다.

    -그 사람이 <은은>으로 비평을 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은 받았는데... 형이 시를 더 쓸 줄은 몰랐어요. 형 원래 완전히 산문파 아니었어요?

    완전히 산문파였던 건 혜경이다.

    시집을 즐겨 읽지도 않았고.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써봤는데, 써지더라고. 그럼 쓰는 거지.

    -저도 논문을 그냥 써봤는데, 써져서 쓰는 거면 좋겠네요.

    한참 논문에 골머리를 앓던 지훈이 힘없이 빈정댔다.

    그리고 녀석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왜 세 편을 주기로 했어요? 다섯 편도 아니고. 개수가 좀 애매하지 않아요?

    그때 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세상이 삼각형으로 보이거든.

    -그건 또 뭔 소리래.

    -보면 알아. 아니... 오진우 평론가에게 내 시가 통한다면, 너도 알게 될 거야.

    지금, 도쿄의 커피 전문점.

    나는 2인용 금연석에 혼자 앉아 있다.

    내 노트에 그려진 삼각형을 바라보며.

    그 삼각형의 위 꼭짓점에 적힌 건 <은은>이다.

    이제 밑의 두 꼭짓점을 채울 일만 남았다.

    그리고 이 삼각형이 나의 시 세계를 완성할 것이다.

    “커피 리필해드릴까요?”

    빈 잔을 보고 종업원이 묻는다.

    “네. 부탁드립니다.”

    내가 말하니 그가 잔을 채워준다.

    이 카페에 눌러앉은 지도 세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시가 짧다고 해서, 빨리 써지는 건 아니다.

    숙고의 시간은 오히려 소설보다 길다.

    그만큼 내 내면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귀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다.

    시의 귀는 내면을 향해 열려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보다 어둡고 미지한 존재는 없다.

    턱을 괴고 창밖을 보았다.

    한국의 그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도시의 풍경.

    드높은 빌딩들,

    광고가 나오는 전광판,

    모두가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나란 인간은,

    현대인이란 인간은 무엇일까.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

    그것이 내 두 번째 시의 방향성이었다.

    내가 인식하는 ‘세계’

    전생의 나는 이 세계가 비대칭적인 거울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과 행위를 세계에 입력해도,

    튀어나오는 것은 항상 반대되는 것들이었다.

    돈을 벌었지만 돈이 벌리지 않고,

    사랑을 해도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고,

    인정을 바라면 비웃음이 돌아오고,

    희망을 꿈꿀수록 죽음이 더 빨리 찾아오던,

    그런 웃기고 부조리한 세계.

    나는 그 절망을 숫자와 기호를 통해서 어떻게든 증명해보려 애썼다.

    ‘1+3=4’라는 공식을 반복한다거나,

    0부터 9까지의 숫자를 거꾸로 늘어놓는다거나.

    이런 실험을 통해 이 세계의 낯설고 불편한 이미지를 구현하려 했다.

    전생과 이번 생이 다른 게 있다면...

    가장 큰 차이는 혜경의 건강한 육체.

    그리고 두 번째는... 인터넷 환경.

    인터넷.

    그 폭발적인 자율성.

    범람하는 디지털 코드들.

    무한한 가능성과 무한한 공포를 함께 담고 있는 세계.

    이 환경 속에서 내 작품마저도 ‘책’이라는 아날로그를 벗어나 디지털화 되었다.

    불현 듯 머릿속에서 뭔가가 지나갔다.

    나는 그 단어를 삼각형의 왼편 아래 꼭짓점에 적어 넣었다.

    ‘세계. 디지털’

    ***

    “죽겠다...”

    나는 풀썩, 하고 침대에 누웠다.

    호텔 이불 특유의 탈취제 냄새가 풍겨왔다.

    하루 종일 밖을 떠돈 몸이 축 늘어졌다.

    저번 일본행때 묵었던 호텔이지만, 혼자 와서 그런가 방이 왠지 허전했다.

    눈을 꿈뻑이며 요즘 일과를 생각했다.

    일과랄 것도 없긴 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식을 먹고, 호텔을 나선다.

    카페에 들어가 시를 생각한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또 카페에 들어가 시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저녁을 먹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시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이 즐거워 미칠 것 같았다.

    다른 걱정 없이 하루 종일 문학에 집중하는 일.

    이거야말로 내가 꿈꾸던 가장 작가다운 삶이니.

    특히 주제어가 떠오른 오늘은 더 기분이 더 좋았다.

    세계의 강력한 디지털화.

    그것은 내가 현재로 와서 느낀 놀라움 중 하나였다.

    숫자와 기호의 세계에 익숙한 나마저도, 경외감을 느낄 정도로 강력한 힘.

    이 경외감을 시작으로 뭔가를 써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감정.

    창작을 앞둔 순수한 즐거움.

    문득, 시를 다시 써보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이성적인 작업에 가깝다면,

    시는 감성적인 작업에 가깝다.

    순간의 느낌과 발상에 많은 게 달려 있다.

    내면에 집중하는 작업이니만큼,

    나를 더 강하게 휘어잡는 신비한 힘이 있지.

    한편, 지금 걱정되는 한 가지.

    도마크 출판사에서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주말이 끼어 있기도 했지만 벌써 닷새나 지났는데.

    종일 머리를 썼더니 단 것이 당겼다.

    마트에서 산 초콜릿을 하나 입에 넣고 샤워를 하려 갈 참이었다.

    우웅-우웅-

    전화가 울렸다.

    미쯔하루 편집장이었다.

    혹시 결정이 났나?

    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아, 이상 작가님. 접니다.

    “미쯔하루 편집장님.”

    -도쿄 여행은 어떠신지요.

    “아주 좋습니다. 예전 생각도 많이 나고요.”

    -아무래도 한국에서보단 편하시지요? 한국에서는 알아보시는 분도 많으실 테니까요.

    “하하... 한국에서도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말끝을 흐렸다.

    미쯔하루 편집장이 바로 눈치를 챘다.

    -이크, 전화를 건 목적을 얼른 말씀드려야겠군요. 아쉽게도 아직 <내외인>과 <다시 사는 일> 건은 내부적 결정이 나지 않아서요.

    난 좀 실망했다.

    하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일본의 관료제에 빠른 의사 결정을 바라는 게 무리일지도.

    -제가 전화를 드린 건 다른 용건이 있어서입니다.

    “다른 용건? 무엇입니까?”

    -이상 작가님, 한국에서도 강연을 많이 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작가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돌았나 봅니다. 이번에 일본대 인문대에서 명사 특강이 열리는데, 작가님을 초청할 수 있겠느냐는 연락이 와서요.

    일본대학교.

    한국의 한국대처럼 일본 제일의 대학이다.

    특히 인문대와 사회대의 영향력이 아주 강한.

    “이렇게 갑자기요?”

    -그쪽도 작가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일을 추진한 듯합니다. 학생들의 요청도 많았거니와, 일본대는 방학 때 명사 강의를 워낙 많이 열거든요. 관심 있으십니까?

    “강연 하는 걸 즐기긴 합니다만. 언제입니까?”

    -다음 주 월요일입니다.

    나흘 후였다.

    썩 시간이 많은 건 아니지만... 못할 것도 없지.

    시 쓰기도 조금씩 진척을 보이고 있고.

    “강연 주제가 정해져 있습니까?”

    -자유입니다만... 작가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강연을 기대하고 오겠지요.

    “결국 문학 강연이군요.”

    -하하... 그런 셈이지요. 작년에 히루키 작가님께서는 동양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강연하셨답니다.

    히루키가 할 법한 강연이군.

    나는 여타의 정보에 대해 물었다.

    시간은 1시간 반. 돈도 적잖이 주는 것 같았다.

    뭐, 돈을 차치하고서라도 일본대에서 강연이라.

    내겐 의미가 남달랐다.

    전생에 문학 세계를 넓히겠다고 일본에 왔다가 떠돌이처럼 살다 죽은 기억을 떠올려보면 말이다.

    “좋습니다, 해보지요.”

    -그럼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그쪽으로 연락을 넣지요.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스케줄이 하나 더 생겼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