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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64화 (6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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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63)

다시 사는 천재 작가 63

시사회에 다녀 온 날.

나는 작업실에서 지훈이 오길 기다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늦는다 싶더니,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얼른 거실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지훈의 표정이 말이 아니다.

술 냄새까지 좀 나는 것 같고.

“왔냐?”

나는 지훈을 맞이하며 말했다.

우린 서로의 귀가 같은 건 절대 챙기지 않는다.

평소 같지 않은 내 행동에, 지훈도 눈치를 챈 것 같다.

<세사노>가 예선탈락 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단 걸.

“...소식 들은 거죠?”

“어.”

지훈은 말없이 거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

“...죄송해요, 형.”

“뭐가.”

“아으... 진짜. 제가 그냥 심사를 했어야 했는데... 괜히 바꿔가지고! 미친 가라사대, 진짜! 하아... 죄송해요.”

아니.

지훈이 심사를 봤다고 해도 결과는 같았을 거다.

오히려 더 더러운 꼴을 봤겠지.

나는 진정하란 의미로 물을 한 잔 떠다주었다.

“마셔. 그리고 자책하지 마.”

“하지만, 형.”

지훈이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화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화를 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일단은 지훈이 자책하지 않는 게 먼저.

“네가 심사를 해서 꾸역꾸역 올렸어도, 결국 본심에서 떨어졌을 거야. 그리고 너도 미운털이 박혔겠지.”

“하아....”

지훈이 소파에 깊게 눌러앉았다.

그리고 내가 가져다 준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너무 무력한 기분이에요. 결국 이런 권력 놀음에 휘둘리는데, 평론을 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렇게 현타 세게 온 거, 등단하고 처음이에요.”

지훈은 부당한 일을 잘 견디지 못한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걸 잘 못 참고.

순수하면서도, 조금은 어린 면이다.

나는 지훈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그래도 참고 해.”

“네?”

“그래도 참고 하라고. 그런 일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는 건 바보짓이지.”

“하지만....”

“네가 힘을 기를 때까지, 그냥 해. 냉정히 말해서,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이 일을 절대 잊진 말고.”

“....”

“그리고 너 아직 석사 논문도 안 썼잖아. 마음 비우고, 논문부터 준비하는 게 어때? 어차피 돌아오는 학기에 발표해야 하잖아.”

지훈이 날 빤히 봤다.

“형은 화도 안 나요?”

“나 바빠. 그런 놈들 때문에 화낼 시간 없어. 그런 놈들 들이받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쌓여 있으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나도 이 일은 끝까지 기억할 테니까.”

난 투사가 아니다. 예술가지.

그리고 예술가는 작품으로 싸우기 마련이고.

그들이 주는 상 따위 정말 필요없다.

하지만 결국, 머지않은 순간에,

그들의 선택을 후회하게 할 자신이 있다.

“그 말이 맞아요. 잊지는 않되,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할게요. 논문도 좋은 생각 같고요.”

“잘 생각했어.”

“...후우... 이제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네요. 고마워요.”

지훈이 겨우 마음을 다잡는다.

완전히 회복하는 데까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

좋은 소식이 있었다.

영화 <내외인>이 예술영화관을 넘어 일반상영관에서도 상영하게 된 것이다.

예술영화가 일반상영관에서 상영된다는 것.

그것은 ‘예술영화’에 기대할 수 있는 평균적 수요를 넘었다는 뜻이었다.

즉, 흥행에 성공했다는 뜻.

<내외인> 개봉 이후,

나는 영화 잡지들을 구독해서 그 반응을 살폈다.

영화평론가들은 이 이례적인 흥행을 기뻐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예술영화계의 고립성에 대해 우리는 오랫동안 자성의 목소리를 내왔다. 예술영화는 그 미학적 성취와는 무관하게 ‘예술영화관’에서만 벌어지는 잔치가 된 지 오래다. 이런 의미에서 <내외인>의 성공의 의미는 남다르다. 원작소설의 후광을 차치하고서라도, 영화 <내외인>은 충분히 미학적이며, 충분히 대중적이다. 즉, ‘대중적인 예술영화’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 성공의 이면엔 이상 소설가의 천재적 스토리텔링과 조인후 감독의 천부적 감각이 함께 호흡하고 있다. 어느 한 사람만 없어도, 절대 탄생할 수 없는 명작이다.

자고 일어나면 <내외인>의 상영관이 몇 개씩 늘어나 있다. 나는 영화인으로서, 그렇게 늘어난 상영관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두말할 것 없이 <내외인>은 한국  예술영화의 중요한 선례로 남을 것이다.

‘중요한 선례’라.

듣기 좋은 말이었다.

한국에서 예술영화는 인기가 별로 없다.

조인후 감독도 유럽 등의 해외에서 상을 받아왔고.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흥행한 예술영화’라니.

평론가들이 신이 날만 했다.

영화 <내외인>이 개봉한 지 일주일.

누적 관객 10만.

이 인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한편, 이번 일본행은 혼자 가기로 했다.

지훈은 당분간 모든 청탁을 거절하고 논문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나 역시 시를 쓰려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일본행 전 날, 짐을 싸는 내게 지훈이 말했다.

“그래도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계약서도 오고 갈 텐데.”

지훈은 내심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데려가면 도움이야 되겠지만, 지금은 논문과 씨름하게 두는 게 낫겠지.

“계약서 받으면 찍어 보낼게. 잘 보고 얘기해 줘.”

“그렇다면야... 알았어요. 연락 주세요. 아, 책은 미국 출판사로 소개되는 거죠?”

“음... 아닐 수도 있어.”

“엥? 하지만 번역본은 영어 아니에요? 금홍샘이 해준 거요.”

“그렇긴 한데, 도마크 쪽과 더 얘기해 보고 결정할 거야.”

지훈은 ‘저 형이 또 무슨 생각이지’ 하는 얼굴로 날 봤다.

“뭐,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요.”

“그래. 넌 논문 잘 쓰고 있어라.”

어쨌건 나는 그렇게 혼자 도쿄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

도쿄에 도착한 오늘.

그래도 한 번 와본 길이라고 곧잘 기차를 찾아 탔다.

두 번째 와본 여름의 도쿄.

기차 창밖으로 푸른 풍경이 그림처럼 지나간다.

할 일이 적지 않다.

책 계약과 두 편의 시 집필.

바쁜 일정이 될 것 같다.

그만큼 마음이 조급하기도 하고.

난 먼저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했다.

저번 일본행에서도 묵었던 호텔로, 도마크 본사와 가까웠다.

도마크 본사는 호텔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 한복판에 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본사로 들어서자마자 직원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상 작가님이시죠?”

“아, 예. 그렇습니다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탔다.

도착한 곳은 제1응접실.

들어가자마자 퍼지는 시트러스 향기.

하얀 안개꽃이 곳곳에 꽂혀 있었고, 한쪽에선 향긋한 커피 냄새가 풍겨왔다.

“이상 작가님!”

미쯔하루 출판장이 큰 소리로 날 부르며 다가왔다.

전화로만 안부를 나누던 사이라,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그는 커다란 원형 소파에 날 앉혔다.

그리고 시부야의 전통있는 카페에서 원두를 공수해왔다며, 포트로 끓인 커피를 한 잔 내주었다.

이번 계약은 판매가 아닌 소개.

도마크 출판사 입장에선 그리 중요한 건은 아니다.

어느 나라에 어떤 책을 보내건, 그들의 역할은 ‘소개’ 까지니까.

이 노력들은 아마 내 다음 책 판매계약을 겨냥한 거겠지.

“손님맞이가 대단하시군요.”

“이 제1응접실에 모시는 작가분인데, 당연하지요.”

듣자하니, 여기가 일종의 VIP실인 것 같았다.

우린 그간 쌓아왔던 이야기를 나눴다.

히루키는 집필 때문에 두문불출한다고 했다.

“그래도 원고를 마무리하시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만나 뵐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8월 말까지 있을 예정이니 시간은 충분합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특히 <다시 사는 일>의 10쇄 증쇄를 기뻐했다.

“<다시 사는 일>은 이미 일본 내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습니다. 현재 에세이 부문에서는 따라 올 책이 없죠.”

“<내외인>과 비교해선 어떻습니까?”

“사실 성장세는 <내외인>이 더 빠르긴 합니다. 작품의 수준도 그렇고... 저는 이번에도 베스트셀러를 예견합니다.”

<내외인>의 반응도 나쁘지 않다라...

나는 이쯤 해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도마크와 협약이 되어 있는 국가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음... 일단 웬만한 영미권과 서유럽 쪽에는 협약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소개할 나라는 정해놓으셨던 것 아닙니까.”

“미국이요?”

“예. 번역본도 그러하거니와, 미국식 영어를 쓰던걸요.”

냉정하게 말해, 문화 시장은 국력과 자본을 따라간다.

문학시장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뜬 책은 많은 나라로 수출되고, 영화나 드라마도 만들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작가에겐 ‘황금 광산’과 같다고 해야 하나.

단, 유럽만 빼고.

“유럽 시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럽 시장은 꽤 까다롭지요. 특히 서유럽은 더더욱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미쯔하루 편집장이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미국은 작가의 국적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국적을 따지는 걸 실례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저 책이 재밌으면 그만이다.

외국에서 성공한 책을 수입하는 일에도 거부감이 없고.

책에 대한 가치판단은 시장의 논리에 맡긴다.

잘 팔리는 책이 곧 좋은 책이니까.

한일 양국에서 이미 높은 판매율을 보인 ‘이상’의 책.

그들은 아마 바로 받아줄 것이다.

하지만 유럽은 다르다.

유럽은 작가의 국적이 가치판단의 큰 기준이 된다.

같은 이야기를 써도 그것을 독일인이 썼느냐, 유태인이 썼느냐가 다르고

동양인이 썼느냐, 서양인이 썼느냐가 다르고

궁극적으로 유럽인이 썼느냐, 비유럽권이 썼느냐를 나눈다.

차별을 한다기보다는 작가의 문화적 배경을 의식하는 거겠지.

깊은 문학적 전통이 만든 콧대랄까.

‘이상’의 책이 아무리 동양권에서 잘 나간다 해도, 그들은 그들의 기준에 따라 작품을 재평가할 것이다.

이 지점은 또 이렇게 정리된다.

유럽에서 성공한 글은 미국 시장 진출이 쉽다.

미국에서 성공한 글은 유럽 시장 진출을 담보할 수 없다.

세계문학 시장의 패권은 유럽과 미국이 함께 쥐고 있지만,

그것은 시장의 논리일 뿐.

‘인정’의 영역에서 아직 미국은 유럽을 따라갈 수 없다.

그것이 전통과 역사의 힘이다.

그리고 나는...

“제 글을, 유럽으로 먼저 보냈으면 해서요.”

유럽 시장에 부딪혀보고 싶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내 선택에 놀란 듯했다.

“이상 작가님. 왜 굳이 어려운 길을...”

“멀리 보면 그게 더 짧은 길이니까요.”

“....”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아시잖습니까.”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 더 빠른 성과를 얻을 순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유럽 시장을 뚫기 위해선 또 ‘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똑같은 일을 두 번이나 할 이유는 없다.

도마크 출판사와 계약을 할 때 소개 국가를 ‘미국’으로 정해놓은 것도 아니고.

미쯔하루 편집장이 내게 물었다.

“작가님. 그럼 혹시 생각해 놓은 나라가 있으신지요.”

“...프랑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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