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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62)
다시 사는 천재 작가 62
오진우 평론가와 헤어지고 난 후,
나는 미쯔하루 편집장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이상입니다.”
-아, 이상 작가님! 저 미쯔하루입니다.
“네. 오랜만이네요. 저번에는 메일로만 연락을 드렸죠.”
-하하...그랬죠. 어쨌건 격조했습니다. 작가님, 오늘은 기쁜 소식이 있어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만.
“기쁜 소식이요? 궁금하군요.”
-예상은 하셨을 겁니다! <다시 사는 일> 일본판이 어제부로 10쇄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말처럼,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하지만 막상 실현이 되니 기분이 좋은 건 당연.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집장님. 도마크 출판사의 덕분입니다.”
그들은 내 책 홍보에 최선을 다해왔다.
간혹 우익 단체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었다.
일본에서도 출판계는 여전히 보수적인 산업이니.
-무슨 말씀을요. <내외인>도 초판 절판에, 곧 3쇄 중쇄를 준비하고 있는 걸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작가님, 책을 해외 출판사에 보내시려면, 저희 측과 계약서를 하나 더 쓰셔야 합니다만...
역시 그렇지.
이전 계약서는 반쪽짜리다.
‘10쇄가 넘으면 중개를 진행할 것임’만을 밝혔으니.
그 이후의 구체적인 계약은 다시 진행해야 한다.
어차피 다녀와야 하는 일.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머리를 환기하며 시를 쓸 계획이었다.
“좋습니다. 한번 다녀오지요. 이번 주에는 일이 있고, 다음 주에 가겠습니다.”
‘이번 주의 일’이란 영화 <내외인>의 시사회였다.
그것만 아니라면 바로 갔을 텐데.
-오? 와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작가님. 오고가는 비행기표와 숙박비는 도마크에서 지원하겠습니다.
“비행기표만 부탁드리지요. 숙박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에 좀 오래 있을 생각이라서요.”
-오래 계신다면... 며칠을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8월 초.
개강을 하는 9월에는 돌아와야 했다.
“음... 보름 정도가 되겠군요.”
이번 일본행은 좀 길어지겠군.
***
합정동 스터디 카페.
젊은 평론가들 5인은 열심히 스터디 중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혼자 읽긴 어려운 책을 함께 발제하고 토론하는 모임.
이번에 발제할 책은 게오르크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문학 공부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론서였다.
‘현대의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 난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던 네 명의 평론가.
그들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한 평론가가 <소설의 이론>의 서문을 읽었다.
“별을 바라보며 가야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한 마디로, 현대에는 ‘별’이라는 정해진 운명의 길이 없다는 거겠죠. 옛날에는 계급이나 성별, 종교 등에 의해 태어나자마자 정해진 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오로지 홀로 개척해야 하잖아요.”
“그 별을 잃은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모습을 그리는 게-”
“현대의 소설이라는 거죠. 정해진 길 없이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 혼란을 보고 독자는 삶의 길을 잡아가기도 하겠고요. 소설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잖아요. 별 까지는 아니어도 작은 빛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소설의 본질에 관한 건설적인 토론.
평론가들은 학구열을 불태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지훈도 있었다.
잠시 후, 쉬는 시간.
“쉬었다 해요- 담배 피러 갈 사람 있어요?”
“지훈 샘, 저요.”
동료 평론가 박민우가 지훈을 따라나섰다.
그는 지훈이 ‘대한문학상’ 예심 원고를 맞바꾼 사람이기도 했다.
흡연부스 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한문학상에 대한 얘길 나눴다.
“민우 선생님도 예심 보느라 고생 많았겠네요.”
“눈 빠지는 줄 알았어요.”
“저도요. 한국에 소설 왜 이렇게 많아, 정말.”
지훈의 우스갯소리에 박민우 평론가가 쓴웃음을 지었다.
왠지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 있어요?”
그는 어두운 얼굴로 지훈에게 말했다.
“... 사실, 할 말이 있어서 따라왔어요.”
“할 말이요?”
“어차피 결국엔 지훈 샘도 알게 될 것 같아서요.”
“뭔데 그렇게 무게를 잡아요?”
지훈이 피식 웃었다.
박민우 평론가가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저 예심에서 <세사노> 떨어뜨렸어요.”
지훈이 얼굴이 굳었다.
다른 심사위원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세사노>는 작품 판매량도, 작품성도 타 작품에 비해 월등하다.
예심탈락? 지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가 뭐예요? 딴지를 거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요.”
“전화가 왔어요. 여러 군데서.”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가라사대와 친 가라사대의 문단 권력들.
“압박을 넣더라고요. 구체적으로 누가 전화를 했는지는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아시잖아요. 평론가도 결국 청탁을 못 받으면 굶어 죽는다는 거.”
지훈은 할 말이 없었다.
화를 낼 수도,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제가 비겁한 거예요. 죄송해요... 지훈 샘한테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상 작가님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죄송해요.”
그는 같이 있기가 민망했는지 담배를 눌러 끄고 흡연 부스에서 나갔다.
지훈은 담배를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지훈이 욕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빛은 무슨...”
***
영화 <내외인>의 시사회.
시사회는 용산의 모 예술영화관에서 열렸다.
영화 <내외인>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물론이고 영화 관계자, 영화 평론가, 문화부 기자들을 초청하여 선보이는 자리.
나는 조인후 감독과 최오준 배우 사이에 앉아 <내외인>을 봤다.
남자1과 남자2 역을 모두 해낸 최오준 배우의 연기는 대단했다.
극명한 조건을 가진 두 남자.
그에 맞게 최오준 배우는 마치 야누스처럼 움직였다.
장하늘 배우의 연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연하면서도 어딘지 속을 알 수 없는 분위기.
짧은 분량이었지만 뇌리에 콱 박혔다.
남자2의 아내 역을 맡은 다른 여배우도 분위기 있는 중산층 여성의 역할을 해냈고.
2시간의 러닝 타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조인창 교수의 방이 나왔다.
책으로 꽉 차 있는 그 공간.
독특하게도 마지막 씬은 흑백 처리가 되어 있었다.
마치 현실 세계가 아닌 듯이.
최오준 배우의 뒷모습.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다.
책장인지, 창문인지, 벽인지.
마치, 어느 ‘사이’에 박힌 듯한 모호한 각도.
그런 그의 등을 주욱 훑은 카메라.
바닥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올라오면, 의자엔 아무도 없다.
햇빛이 아주 서서히 환해진다.
종국에는 나의 눈이 부실 정도로.
그리고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
나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좋은 이미지였다.
완성된 영화 <내외인>은... 소설 못지않게 멋졌다.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짝짝짝!!!!!
이어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살짝 뒤를 돌아보니,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잠시 후, 기자간담회가 시작됐다.
조인후 감독과 주연배우들, 그리고 원작자인 내가 앞으로 나갔다.
펑펑 터지는 플래쉬와 환호성, 박수들에 정신이 없었다.
예술영화 시사회에서는 잘 찾아볼 수가 없는 풍경.
영화관 구석으로 얼른 가서 전체샷을 찍는 발 빠른 사진기자들도 있었다.
시사회 진행을 맡은 조연출이 입을 열었다.
“자, 지금부터 감독님 그리고 배우 분들과 함께 하는 영화 <내외인>의 기자간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원작자인 이상 작가님도 함께 모셨으니 많은 질문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이 손을 들었다.
첫 번째로 지목 받은 기자가 조인후 감독에게 물었다.
“조인후 감독님. 이번 작품 정말 인상적으로 봤습니다. 이전의 작품과도 느낌이 많이 다르고요. 아무래도 원작에 기반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조인후 감독이 마이크를 들었다.
“음... 저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은 영화로 만들지 않고, 시나리오를 쓰면 절대 바꾸지 않고... 하지만 이번 작품은 좀 달랐습니다. 시작부터가요. 원작이 있음에도, 하하... 정말 영화로 만들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제 자신의 절대적 기준을 깨버린 거죠. 그렇게 하나가 깨지니, 다음 단계가 깨지게 되고, 또 깨지게 되고... 마치 새가 알을 깨고 세상에 나가는 것처럼요. 제게도 좋은 성장의 기회였습니다.”
조인후 감독은 겸손한 사람이다.
예술영화계의 거장이라 불리면서도 ‘성장’이란 단어를 쓸 수 있는.
조인후 감독에 이어 배우들에게도 질문들이 갔다.
대부분 연기에 대한 칭찬과, 영화에 거는 기대 등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기자간담회는 계속됐다.
내게도 질문이 왔다.
“이상 작가님. 소설 <내외인>과 영화 <내외인>은 어떻게 같고 다른가요?”
“한 마디로- 소설 <내외인>은 소설만이 만들 수 있는 <내외인>을 쓴 것이고, 영화 <내외인>은 영화만이 찍을 수 있는 <내외인>을 찍은 겁니다. 언어가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영상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완전히 다르기에, 두 작품은 다른 작품이라 볼 수 있겠죠.”
“이번 작품의 시나리오 작업에 많이 참여하셨나요?”
“아니요. 전혀요. 모두 조인후 감독님께서 주도해서 하셨습니다. 저는 확인 작업을 하고 의견을 드리는 정도였죠.”
“어느 부분에 의견을 주셨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수장은 어디까지나 조인후 감독이다.
어느 부분을 조인후 감독이 잘 살렸느니,
또 어느 부분을 이상이 바꿨느니...
이런 이야기는 작품을 균열시킬 뿐이었다.
그 외에도 <내외인>의 내용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비교적 무난한 질문들이었다.
기자들을 상대로 이런 편안한 질의응답을 할 수가 있구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시사회가 끝났다.
제작진들끼리 또 행사가 있을 거라고 해서 나는 먼저 빠져나왔다.
지훈은 오늘 스터디가 있어 오지 못했으므로, 혼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였다.
누군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이상 작가님?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는 앳된 남자.
“저는 예술전문시사저널의 ‘현장예술’ 취재기자입니다. 저, 이거...”
그는 내게 명함을 줬다.
그리고 대단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먼저,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실례되는 줄 알면서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자간담회에서 여쭤볼 일은 아닌 듯하여...”
“무슨 일이시기에 그러십니까?”
난 약간 경계를 세우고 물었다.
어쩐지 기자간담회가 별일 없이 끝난다 했다.
그는 얼른 취재용 녹음기를 꺼냈다.
“작가님의 등단작 <세사노>가 대한문학상 예심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결과가 오늘 오후에 나왔습니다. 많은 평론가와 독자분들께서는 이런 결과에 의문을 표하고 계십니다. 항간에는 모 출판사의 압력이 있는 게 아니냐 하는 추측까지 나오는 상황인데요... 외람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이상 작가님의 생각을 알 수 있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세사노>가 예심탈락 했다고?
그런 일이 있었군.
지금쯤 지훈도 난리가 났겠다.
문단에서 문학상만큼 권력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도 없다.
블라인드 심사가 가능한 시스템도 아니고.
권력층에 가라사대 파가 한둘도 아닐 테니 탈락한 것도 이상하지 않지.
그러나 기자는 아닌 듯했다.
어딘가 화가 난 듯한 결연한 얼굴.
그는 <세사노>의 예선탈락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기자로서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니었지만, 고마웠다.
내 작품을 사랑해주는 많은 독자의 얼굴을 대변하는 듯도 했고.
그래서 나는 이례적으로 그의 인터뷰에 응해주기로 했다.
“신경을 써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나... 저는 그들이 주는 상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상이란 결국 가치 증명의 문제거든요.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요.”
“....”
“제 글의 가치는 저의 방식으로 증명하겠습니다.”
기자는 뭔가를 더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엷은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충분히 대답이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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