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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62화 (6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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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61)

다시 사는 천재 작가 62

<무너지는 날>의 마지막 회 방영날.

워낙 시청률이 잘 나온 드라마라, 엠플릭스 쪽에서 종방연 자리를 마련해줬다.

하지만 나는 종방연에 참석하지 않았다.

마지막 회의 여운을 오롯이 혼자 느끼고 싶어서였다.

거실의 불을 꺼두고 조용히 마지막 회를 감상했다.

1화부터 몰고 왔던 ‘복수’의 감정이 터지는 부분.

김유한은 복수를 위해 삼촌을 폐가로 부른다.

김유한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눈치 챈 삼촌.

산속으로 도망을 친다.

손에 땀을 쥐는 길고 긴박한 추격전.

그 추격전 끝에 김유한은 삼촌을 제압한다.

그런 김유한을 도발하는 삼촌.

-그래... 네 부모, 내가 죽였어.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날 죽인다고 시간이 되돌아가나? 아니면 네 부모가 살아오기라도 해?

-...누가 살아오는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내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지.

복수에 점철되었던 김유한의 감정이 해소되는 대사.

쓸 때는 몰랐다.

나는 그저 ‘김유한’에게 몰입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텀을 두고 다시 보니 알 것 같았다.

결국 <무너지는 날>도 나의 얘기라는 걸.

불행했던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이번 생은 멋지게 살아보고 싶었던 내 바람.

‘글’이라는 게 이렇게 신기하다.

어떻게 해서든, 결국 ‘나’를 보여주고 말지.

이어지는 에필로그.

모든 일을 해결한 김유한이 폐가로 돌아간다.

폐가에서 본 과거의 기억들.

그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끼이익-

문이 열린다.

놀랍게도 그 안엔 폐가의 기억 속 인물, 1930년대의 여자 사토미 유우가 서 있다.

김유한은 홀린 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

폐가는 마치 1930년대로 돌아간 듯하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손님들이 드나든다.

사토미 유우가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선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곁에 선 김유한.

사토미 유우는 김유한에게 삼촌을 잡은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김유한 역시 현대의 지식으로 그녀의 억울한 죽음을 막아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기에, 소통할 수 없다.

김유한만이 그녀의 존재를 볼 뿐이다.

-이 집. 이젠 없앨 거예요.

그녀가 듣지 못함에도 김유한은 말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1930년대와 현재.

두 개의 시공간이 얽히고 일렁인다.

이제 두 남녀는 눈을 마주하고 있다.

사토미 유우의 입술이 달싹인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사라진다.

순식간에 폐가로 돌아온 집과 혼자 남은 김유한.

김유한은 정원을 내다보다가, 하늘을 본다.

그리고 하늘에서 김유한을 내려다보는 시선.

김유한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무너지는 날>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을 그 여운을 느꼈다.

...끝났다, 드디어.

<무너지는 날>은 내게 의미가 남달랐다.

환생 후 시도한 첫 번째 새로운 장르, 드라마.

21세기 ‘이상’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 시작점.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지훈이 알려 준 사이트를 찾아가, 실시간 시청률을 확인했다.

...38.2%

JTBA 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이었다.

***

언론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무너지는 날>, 케이블 드라마의 역사를 다시 쓰다.

-<무너지는 날> 최고 시청률 38.2%의 비결은? 탄탄한 복수 서사와 긴장감 넘치는 구성.

-판타지 세계를 넘나드는 <무너지는 날> 드라마계의 판타지 유행 예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이상, 다음 행보는 음악과 영화?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다 거절했지만.

장하늘과의 콜라보레이션의 효과도 컸다.

그녀는 노래 <은은>을, 나는 시 <은은>의 일부와 홈페이지 링크를 같은 시각에 SNS를 통해 공개했다.

지훈은 내가 ‘국민 여동생’과 말도 없이 콜라보레이션을 한 걸 두고 좀 삐진 듯했지만, 하루하루 올라가는 음악차트 순위와 홈페이지의 <은은>결제수를 신나서 보고했다.

그리고 어제 저녁,

지훈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형. 저 아는 평론가가 형 만날 수 있느냐고 묻던데요.”

“갑자기 무슨 평론가?”

“시 평론가예요. 오진우라고.”

오진우 평론가.

문예지를 보는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다.

시를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분석하기 때문이다.

시어를 조각조각내고,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이어 의미를 확장시키는 방식.

항간에는 그를 ‘괴짜 평론가’라고도 부른다.

그렇지 않아도 시는 소설보다 평론 수가 훨씬 적다.

당연히 그에 대한 문단의 주목도도 꽤 높은 상태.

“그 사람이 날 왜?”

“<은은>을 봤다나 봐요. 그 사람도 대한문학상 시 부분 예심 심사위원이라, 몇 번 만났거든요. 그런데 엊그제 저한테 부탁하더라고요. 다른 사람한테 말도 잘 안 붙이는 성격이던데 오죽했으면 저한테 말했을까 싶어요.”

시 평론가라...

만나서 나쁠 건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평소 오진우의 비평 스타일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연락처 주면 내가 연락할게.”

“형 만나보시게요? 의외네.”

“의외까지야. 인터뷰도 아닌데.”

“아, 그 사람 좀 특이해요.”

“특이해? 어떻게?”

“...사교성이 좀...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막말로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서 사교성 좋은 사람 찾는 게 더 힘들지 않나.

오히려 지훈이 특이 케이스지.

하지만 지금, 난 지훈의 그 말을 백번 이해하는 중이었다.

카페에서 나와 마주앉은 오진우 평론가.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절... 만나고 싶다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

뭐하자는 걸까.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또 생각에 잠기고, 다시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마치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주체가 안 되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것도 묘한 문어체로.

“작가님은 시인입니다.”

“...네?”

“등단을 안 하셨어도, 작가님은 시인입니다.”

따져보자면 맞는 말이었다.

혜경의 몸으로 등단을 하지 않았을 뿐이니.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그에게 물었다.

“왜요?”

“작가님의 소설, 드라마, 거리에 흘러나오는 노래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시 <은은>을 봤습니다. 시를 쓰셨다기에, 바로 찾아봤습니다.”

솔직한 편이군.

다른 장르는 거들떠도 안 보고 시에만 빠져 있다더니, 소문이 맞는 것 같았다.

아무튼,

“시 한편을 보고 제가 시인이라 생각하셨다고요?”

흥미로웠다.

이 ‘괴짜 평론가’가 내 시에서 무엇을 봤기에?

나는 일단 살짝 뒤로 물러나보기로 했다.

“한낱 사랑시일 뿐인데요.”

“아닙니다.”

그가 딱 잘라 말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포장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정은 포장지라.

그의 비평관을 잘 알려주는 말이었다.

시의 메시지보다는 언어 자체가 만들어내는 형식의 미학에 집중하는.

“제겐 차라리 장하늘의 노래가 사랑시에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 가사는... <은은>의 가장 쉬운 부분만을 옮겨 쓴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거야, 대중가요니까요.”

“<은은>의 미학적 본질은 따로 있습니다. 시어에 잠재된 전위성이죠.”

나는 대답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언어의 전위성.

전위성이란 기존 형식을 완전히 뒤바꿔 충격을 주는 것을 의미했다.

즉, ‘형식적 새로움’의 일환.

한국 문학에서 ‘언어의 전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

그것은 1930년대에 내가 쓴 모든 작품이었다.

숫자와 도표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그린다거나,

건축과 기하학 수식을 이용하여 사물의 존재를 증명한다거나.

<은은>은 편안하게 쓴 시다.

눈에 드러나는 전위성은 없다.

나는 다만 장난을 치듯, 그런 전위적 요소를 숨겨두었다.

나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교묘하게.

언어의 배열을 바꾸거나 퍼트리는 식으로.

그것은 일종의 유희였다.

그 유희야말로 시의 중요한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

뭔가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 이상임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동시에, 궁금해졌다.

“그럼 오진우 평론가님이 보기에, 제 시의 어디가 전위적입니까?”

그는 또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대단히 빠른 말투로 내게 말했다.

“예컨대... <은은>은 ‘은은’이라는 단어를 빼고 보면 시행들이 기하학적 비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일부러 대칭을 피하신 거죠. 사랑이 ‘은은’하게 퍼진다는 아름다운 감상 이면에 모종의 불편함도 함께 담아놓은 것이 아닙니까.”

...조금 놀랐다.

굉장히 치밀한 눈을 가진 사람이다.

“얼추 맞습니다. 시 전문 비평가는 다르시군요.”

“하지만 이건 빙산의 일각입니다. 가장 쉬운 전위성이죠. 음... 이걸 계속 말로 풀어내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글로 풀어낼 순 있습니다. 아니, 글로 풀어내는 것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그 말은....”

“제가 <은은>의 비평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나는 하하하, 하고 웃었다.

“어려운 일이실 텐데요. 시 비평은 많으면 시집 한 권 이상, 아무리 못해도 세 편 이상이 필요하지 않나요?”

“<은은> 하나만으로 할 이야기는 충분합니다. 하나의 전위적 형식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비평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제게 굳이 허락을 받으시려는 이유는요? 작가의 허락 없이 비평을 하는 건 평론가의 특권 아니던가요?”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작가님이 아직 시인이 아닌 것으로 보아 시인이 될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의 시를 함부로 비평할 순 없습니다.”

아직 시인이 아닌 것으로 보아 시인이 될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다, 라.

“제가 시인이 되길 거부한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군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시인으로 등단할 수 있을 거란 뜻이었습니다.”

“....”

“그래서 허락을 구하는 바입니다. <은은>의 해석이 세상에 드러나길 바라지 않으신다면, 제 비평은 실례가 될 뿐이니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번 생은 시인보다는 소설가의 삶을 살고 싶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첫째, 시는 돈이 안 된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선 소설에 집중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둘째, 전생에 내 시는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나는 내 시의 의미를 묻는 물음들이 피곤했고, ‘난해하고 모호하다’는 비난이 지겨웠다.

셋째, 내 시의 언어를 이해할 평론가가 있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전생에서도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했으니.

나는 고민에 빠졌다.

오진우 평론가의 비평은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마치 전생의 내 시처럼.

그의 비평이 평온한 내 일상에 던져진 돌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나의 한계에 대해 많이들 묻는다.

소설, 드라마, 영화, 가사에까지 손을 댄 내가 또 뭘 할지 궁금해 한다.

...어쩌면 내가 이번 생에 깨트려야 할 진정한 한계는, ‘시’일지도 모르지.

‘21세기의 이상’의 시.

그 시는 독자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시는 소설보다 독자들에게 더 멀리 있다.

내 시는 더더욱 그렇다.

즉, 독자들과 나 사이를 연결해 줄 비평가가 필요하다.

오진우 평론가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그때였다.

우웅-우웅-

전화가 걸려왔다.

번호를 보니, 미쯔하루 편집장이었다.

나는 바로 직감했다.

<다시 사는 일>이 10쇄를 넘겼다는 것을.

조만간 일본에 다녀와야 한다는 것을.

순간,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오진우 평론가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비평을 해주세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저는 조만간 일본에 다녀올 겁니다. 그 곳에서 두 편의 시를 더 써오겠습니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세 개의 시를 묶어서 함께 비평해주세요.”

나의 시 세계를 보여줄 때가 됐다면...

“할 거면 제대로 하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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