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59화 (5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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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58)

다시 사는 천재 작가 58

장하늘.

혜경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티브이에서 하늘색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

몽환적이고 분위기 있는 음색.

재주가 많아서 연기도 잘 한다더니.

내 작품에 참여했을 줄이야.

“뭘 또 뛰어오기까지 해.”

조인후 감독이 친근하게 말을 건다.

“다들 기다리시니까요. 죄송해요. 갑자기 녹음이 잡혀서. 어휴... 바로 촬영 들어갈까요?”

“숨이나 돌리고. 여기도 아직 준비 다 안 됐어.”

“하늘이 왔네?”

최오준 배우도 일어나 다가왔다.

배우들끼리 상견례도 했다더니, 꽤 친해 보였다.

아니면 이미 알던 사이였을지도.

“어, 오빠. 많이 기다렸지? 늦어서 미안.”

“알면 됐다. 아, 인사드려. <내외인> 원작 쓰신 이상 작가님.”

“어머.”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날 신기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실물이 훨씬 나으세요. 못 알아봤어요. 저, 정말 팬이거든요.”

악수를 나누면서도 좀 얼떨떨했다.

내 작품에 비해서... 이미지가 너무 발랄하지 않나?

조금 걱정이 되긴 하는데...

일단 조인후 감독을 믿어봐야겠지.

장하늘 배우가 배시시 웃더니 이런저런 말을 붙인다.

주로 내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다.

팬이라는 말이 립서비스가 아닌 건 둘째 치고,

붙임성이 지훈의 두 배쯤 되는 것 같다.

“싱어송라이터면 노래도 다 만드시는 거죠?”

“다 도움 받아가면서 하는 거죠, 뭐.”

“자, 그럼 슬슬 시작하자고. 다들 준비해.”

조인후 감독이 말했다.

“네. 감독님.”

“네~”

두 배우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간단한 메이크업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시나리오를 확인했다.

나는 다시 카페로 다시 들어갔다.

그새 카페엔 스텝들이 가득했다.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려는데 조인후 감독이 날 불렀다.

“왜 거기 있어요, 여기로 와요.”

그는 자신 옆에 간이 의자를 하나 놓아주었다.

“감사합니다.”

그와 나란히 앉아 있으니, 감독이라도 된 기분이다.

가방에서 시나리오집과 스토리보드를 꺼냈다.

내 <내외인>이 영화가 되어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관찰하고 싶었다.

두 배우가 조인후 감독과의 상의 끝에 문가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바로 감정을 잡는다.

최오준 배우의 표정은 보다 날카롭게,

장하늘 배우의 표정은 보다 처연하게.

막내 스텝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놓는다.

분위기가 잡히고 카페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진다.

마이크와 조명, 촬영감독 등이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조인후 감독은 카메라 화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촬영감독에게 미세한 위치 조정을 지시했다.

“조금 더 가운데로... 좋아. 시작하자고.”

조연출부의 막내가 카메라 앞에 슬레이트를 들고 섰다.

"씬1에 테이크1!"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슬레이트가 내려왔다.

약간의 텀을 둔 후, 조인후 감독이 외쳤다.

“레디- 액션!”

<내외인>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첫 순간이었다.

최오준 배우가 입을 열었다.

“...난 말이지. 이 세상 밖에서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너도 똑같아... 그래서 네가 내 앞에 앉아있는 거야.”

잠시 정적.

장하늘 배우의 눈에 약간의 물기가 어린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연다.

“잘 지냈지? 나 요즘 잠을 한 숨도 못 자. 잠이 안 와. 너는 요즘 잘 자?”

“나도 그래, 나도. 하아... 나 회사에서 잘렸어. 시발... 하다하다 공장까지 기어들어갔는데. 난 잘못한 거 하나 없어. 그런데 그냥,”

최오준 배우가 말을 멈추고 커피를 벌컥벌컥 마신다.

모두 시나리오에 적혀 있는 대로다.

“비슷한 얘기 작년에도 들은 것 같은데... 밥은 잘 먹고?”

“...그래.”

“...왜? 왜 잘 먹어?”

최오준 배우가 장하늘 배우를 빤히 본다.

전혀 통하지 않는 대화들.

대화 대신 쌓여가는 감정.

권태. 원망. 슬픔. 미련. 약간의 사랑.

최오준 배우의 연기야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장하늘 배우의 연기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사실 난 편견이 있었다.

가수 출신 배우는 연기가 어색할 거란 편견.

그러나 그녀를 보니 알 것 같았다.

‘출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나 역시 소설가 ‘출신’으로 이렇게 많은 것을 해보는 것처럼.

그리고 또 한 가지.

조인후 감독의 카메라워킹은 대단히 독특했다.

남자2가 말을 할 땐 여자친구를 비추고,

여자친구가 말을 할 땐 남자2를 비추는 방식.

즉,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을 비춘다.

그것도 롱테이크로 화면을 왔다갔다 하며.

“컷! 좋아! 다음 씬 바로 갑니다!”

조인후 감독이 외쳤다.

“시작이 아주 좋아... 이 작가님. 보시니 어떠세요?”

“놀랍네요. 카메라워킹이라는 거.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듣는 사람의 얼굴에 집중하게 하다니. 이 답답한 상황을 극대화하네요.”

"잘 알아보시는군요."

이게 바로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미학.

<내외인>을 영화화하길 잘한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장면의 촬영이 지난 후,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조인후 감독과 야외 테라스에서 이어지는 장면을 상의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최고조로 올라가는 부분.

대사 전체를 롱테이크로 따야하기 때문에 따져볼 게 많았다.

조인후 감독과 나는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를 다시 살폈다.

우리의 시나리오집 모두, 필기가 가득했다.

어느새 두 배우가 다가와 우리 곁에 앉았다.

그들은 우리의 대화를 경청했다.

가끔 조인후 감독이 뭔가를 추가적으로 지시하면,

두 사람은 바로바로 이해하고 연기에 적용시켰다.

“어? 이거 떨어졌네요.”

장하늘 배우가 바닥에서 뭔가를 주웠다.

그 하얀 노트는... 내 스토리보드였다.

“제 거 같네요. 고마워요.”

“네. 음? 이게 뭐예요? ‘은은’?”

은은?

아차 싶었다.

예전에 금홍이가 일하는 카페에서 쓴 시 <은은>.

“이거 작가님이 쓰신 시예요?”

“아... 그냥 낙서 같은 거예요.”

남 보여주려고 쓴 글이 아닌데.

조금 부끄러웠다.

그녀가 시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눈에 눈물이 맺혔다.

“뭐, 뭐야. 너 울어?”

최오준 배우가 당황에서 그녀를 팔꿈치로 툭 밀었다.

그도 시를 읽었지만... 오히려 더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이게 슬퍼?”

“오빤 이게 안 슬퍼?”

“하늘이 감수성 풍부하네. 나도 봐도 되죠?”

조인후 감독까지 가세했다.

이제 와서 숨길 것도 없지 싶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인후 감독이 시를 가만히 읽었다.

“음... 평소 이상 작가님 글보다 좀 말랑말랑하네. 하지만 추상적인 매력은 살아있고. 난 시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을 나타낸 시예요?”

조인후 감독이 내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장하늘 배우에게 그대로 넘겼다.

“뭘 나타낸 시인 것 같아요, 배우님?”

“마음은 은은하게 번지는데... 보여줄 수도 없고,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고, 그런 거요.”

나는 웃으며 스토리보드를 다시 가져왔다.

“비슷해요. 시 잘 보시네요. 문학적 감수성이 있으신가봐요.”

“얘 연예계 책 덕후잖아요.”

최오준 배우가 말했다.

그저 발랄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연기도 그렇고 감수성이 대단하다.

“자. 눈물바람 그만 하고 다음 컷 들어가자고.”

조인후 감독이 배우들을 몰아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

장하늘 배우는 슬쩍 뒤를 돌아 날 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촬영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촬영이 끝난 후, 식사나 하고 가라는 권유를 극구 사양했다.

오늘까지 도마크 출판사에 <내외인> 번역본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

도마크와 <내외인>의 출간 계약을 한 건 얼마 전.

이미 국제 우편으로 계약서가 오고갔다.

도마크라면 내 책을 믿고 맡길 수 있지.

늦은 저녁.

나는 <내외인>의 번역본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이미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것이긴 했지만...

글이라는 게 원래 뒤돌아서면 오탈자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시간도 늦고 해서, 나는 메일로 원고를 전달했다.

-미쯔하루 편집장님. 평안하신지요. <내외인>의 번역본을 송고하는 바입니다. 필요한 선에서 어투와 문법을 교정하셔도 좋습니다. 홈페이지에 <내외인> 원고를 계속 유료공개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의 재회를 기대하며. 좋은 밤 되십시오. 이상 배상.

길고 긴 하루 일과에 노곤함이 몰려왔다.

컴퓨터를 끄고 막 작업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휴대폰으로 SNS 메시지가 들어왔다.

-미쯔하루입니다. 메일을 받았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연락드리기 죄송합니다만, 기쁜 소식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보냅니다. 이상 작가님의 에세이집 <다시 사는 일>이 8쇄에 들어갔습니다. 이 속도라면 저희의 계약조건이 곧 실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편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미쯔하루 올림.

도마크 출판사와의 계약조건.

그것은 <다시 사는 일>이 10쇄를 넘기면 협약된 외국 출판사에 책을 소개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8쇄라니.

빠르긴 빠른 속도였다.

이대로라면 올해 안으로 10쇄를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슬슬 그 이후의 계획을 짤 때가 됐다.

즉, 서구권의 ‘어느 나라’로 보낼 것인가.

그 결정에 따라 내 작품의 미래가 달렸다.

그때였다.

우웅-

최오준 배우에게 톡이 하나 왔다.

-작가님. 저 지금 촬영 끝나고 하늘이랑 스텝분들이랑 술 한 잔 하고 있는데. 하늘이가 작가님 번호 알려달라고 난리예요ㅠ 이상한 짓 안 할 거라고는 하는데... 알려줘도 될까요?

장하늘 배우가?

별일 있겠나 싶어서,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작가님. 저 하늘이에요. 혹시 전화 가능하세요?

...전화?

-그러세요.

우웅-

답장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네. 여보세요?”

-작가님!

어딘가 들뜬 목소리.

“아, 예. 촬영은 잘 끝내셨나요?”

-네! 그럼요!

부웅-하고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와 통화를 하기 위해 잠시 나온 것 같다.

장하늘 배우는 이런저런 촬영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변죽을 울리더니 조심스럽게 용건을 꺼냈다.

-저기, 작가님. 다름이 아니라... 아까 그 시요.

“네? 시요?”

-<은은>이요.

“아. 그거요.”

-그... 혹시 시집에 실으실 건가요?

“아뇨. 시집을 낼 마음은 없어서... 그건 그냥 시간이 좀 떠서 쓴 거예요. 그런데 왜요?”

-그럼 그거... 제가 노래로 불러도 될까요?

노래로?

“하지만 그건 가사로 쓴 게 아니라서요.”

가사와 시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시는 운율감이나 각운을 숨겨버리는 반면,

가사는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니까.

내 시가 아무리 좋아도 그걸 그대로 갖다 쓸 순 없을 텐데.

-사실 제가 이상 작가님 소설 몇 번이나 가사로 써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긴 글이라 엄두도 안 나고, 허락해주실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아까 그 시는 정말 마음에 와 닿아서... 아 물론, 작사는 당연히 작가님 이름으로 올릴 거예요! 당연히요. 제발 허락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만들어놓은 멜로디 중에 정말 잘 어울리는 게 있는데 한번만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저 지금 진짜 용기내는 건데...!

장하늘 배우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다.

그런데 허락해줄 것 같지 않다는 말은 뭘까.

내가 그런 이미지인가.

“음...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았어요?”

사실 아까부터 궁금했다.

그녀처럼 구김살 없는 사람이 내 시에 공감하는 이유가.

-전화로 자세하게 풀어놓기는 뭐하긴 한데요...

그녀는 좀 망설였다.

-음... 혹시 시간 되실 때 제 작업실에 한 번 와보시겠어요?

“제가 가도 돼요?”

-그럼요! 저 친구 초대 되게 많이 해요! 부담 갖지 말고 오셔도 돼요.

“그럼 그 편이 낫겠네요. 갑자기 정하는 것보다는.”

우리는 간단히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덥석 시를 주는 것보단, 그녀와 대화를 하는 게 먼저겠지.

나는 유튜브에서 장하늘 배우의 공연 영상을 찾아봤다.

배우가 아닌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장하늘은...

화려하면서도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감미로운 목소리.

어딘가 우울한 감성.

세련된 발성과 몽환적인 분위기.

가창력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감성 자체를 드러내는 음악.

얼떨결에 오고간 이야기지만... 왠지 기대가 되는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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