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57화 (5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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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56)

다시 사는 천재 작가 56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남자1과 남자2가 마주치는 장면.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빛. 그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조인후 감독이 뒤따라 내려오며 대답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허무겠죠. 그 빛이 두 남자를 집어삼킴으로써, 마치 텅 빈 공간만 남은 느낌을 주니까요.”

“맞습니다. 저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문장을 써서 그 허무를 완성시켰죠.”

조인후 감독의 시나리오도 그렇다.

원작 <내외인>을 살리되, 영민하게 영화화했다.

그대로 두어도 훌륭한 작품이 될 거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만큼은 아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오던 조인후 감독이 멈칫했다.

“여긴... 아버님의 방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내가 그를 데리고 온 것은 조인창 교수의 방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과 논문이 쏟아져 내릴 듯한 풍경.

주인을 먼저 보낸 책상과 의자.

좀처럼 켜질 일 없는 먼지 낀 전등.

‘인간’은 사라지고 인간의 ‘인생’만 남은 공간.

“이를테면- <내외인>의 마지막 장면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 방의 이미지일 것 같습니다.”

“흐음...”

조인후 감독이 새삼스럽게 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이 공간을 처음 본 사람처럼.

박물관의 유물을 살피듯 조심스럽게.

나는 그에게 말했다.

“허무함이란 간단한 감정이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히 뭔가가 사라진다고 느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런 많은 흔적을 남겨두는 것에서 허무함이 나온다- 이거군요.”

“네. 그리고 ‘빛’이라는 요소는 소설에서는 그럴듯하지만 영상에서는 어딘지 판타지스러운 느낌이 날 것 같아서요. 오히려 이 방의 이미지가... 훨씬 현실감 있겠죠.”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눈을 감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떴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하셨는지.”

“저는 영화를 잘 모르긴 합니다만, 이미지에는 흥미가 많거든요.”

이미지를 언어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시’다.

전생에 시를 즐겨 썼던 것만큼, 나는 이미지에 예민하다.

조인후 감독은 샤워가운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 날 바라보았다.

약간은, 경계를 하듯.

“...이 방은 언제부터 떠올리신 겁니까?”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읽을 때요.”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문장을 사용한 것처럼, 감독님께서는 이 방을 사용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방식으로건.”

<내외인>에서 서재를 배경으로 하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이미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그런 게 바로 예술영화의 장점이기도 하고.

조인후 감독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날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바꾸는 게 싫을 수도 있다.

어쨌건 영화판의 절대 권력은 감독이니까.

나는 그걸 알면서도 처음부터 수정권한을 요구했다.

남의 손에 <내외인>을 온전히 맡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니.

“...작가님.”

“네.”

“사실... 저는 한 번도 남의 말을 듣고 시나리오를 바꿔본 적이 없습니다. 설사 작가님께서 수정 요청을 하신다 해도, 전 작가님을 설득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방 안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신 이미지가... 전적으로 아름다우니까요.”

전적으로 아름답다.

최고의 칭찬이었다.

예술영화란 결국 영상이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것이니까.

조인후 감독이 말했다.

“그리고, 작가님의 말을 듣고 저도 방금 떠올랐습니다. 영화 <내외인>의 마지막 장면이요.”

벌써?

이 짧은 시간 안에 영감을 받은 건가?

“궁금하네요.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는 씩 웃더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풀어놓은 영화 <내외인>의 마지막 장면은...

더할 나위 없이 멋진 것이었다.

***

장하늘.

한국 가요계의 독보적 감성의 싱어송라이터.

그녀는 오늘도 저녁까지 꽉 찬 스케줄을 소화하고 집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집.

그녀는 비척비척 들어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휴- 힘들어.”

그녀는 작년부터 연기도 시작했다.

오늘도 미니시리즈 마지막 촬영을 겨우 끝냈다.

천진난만하지만 어딘가 우울한 구석이 있는 여고생 역할.

매스컴의 말처럼, 장하늘은 그 역을 ‘찰떡같이’ 소화했다.

물론 그냥 얻어진 결과는 아니었다.

그녀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에 온 감성을 쏟았다.

그 캐릭터가 자신이 만든 노래의 주인공이라 생각하며.

뭐든 워낙 잘해내버리는 탓에 이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곤 있지만.

띵-

톡이 왔다.

매니저 언니였다.

-너 잘 들어갔지? 당분간 스케줄 비였으니 푹 쉬어.

-얼마만의 휴식이야ㅠ 언니 나 찾지 마. 나 폰 꺼둠.

-뭔 소리. 내일 너 밥 먹이러 가야지.

“그냥 좀 두지....”

하지만 매니저가 그녀를 혼자 두지 않는 이유가 있다.

얼마 전 장하늘은 한 유명 아이돌과 비밀 연애를 했고,

대차게 차였다.

너무 인기가 많아서 부담스럽다나.

충격을 받은 장하늘은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다.

소속사 입장에선 그녀를 혼자 둘 수 없을 수밖에.

-알았어요ㅜㅜ

-그래. 너 아까 택배 온 거 식탁에 정리해뒀다.

-땡큐! 난 잠!

장하늘은 휴대폰을 침대 구석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 그냥 자버릴까 하다가,

“...화장은 지워야지.”

하고 또 비척비척 식탁으로 갔다.

새로 산 클렌징 오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화장품, 옷, 협찬품, 그리고 몇 권의 신간들.

몽롱한 정신으로 잡다한 물건을 뒤적이던 장하늘.

별안간 생기가 돌았다.

“어? 작가님 책 왔네?”

그렇게 기다리던 <다시 사는 일>과 <내외인>.

그녀는 화장이고 뭐고 소파로 책을 가져갔다.

제일 먼저 할 일.

찰칵- 찰칵-!

책과 함께 사진 찍어 SNS에 올리기.

-드디어 왔다. 이상 작가님의 책. 오늘 밤을 책임져줄 친구. #북스타그램 #이상 #책을읽읍시다 #다시사는일 #내외인

독서는 그 다음.

장하늘은 빠르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미 인터넷으로 다 본 내용들.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워낙 좋아서 곱씹고 또 곱씹어보게 된다.

“아, 이 문장.”

그녀는 포스트 잇 간지를 하나 뜯어 책에 붙였다.

“이 문장도.... 이 문장도.”

책은 점점 간지 투성이가 된다.

삐죽삐죽한 고슴도치처럼.

“버릴 문장이 없네. 다 노래로 만들고 싶다...”

그녀에게 책은 음악을 위한 수단이었다.

가사를 쓰려면 어휘력과 문장력을 길러야 하니까.

그러나 이상의 소설은 수단 그 이상이었다.

그녀의 눈엔 그의 문장은 이미 완성된 가사였다.

멜로디를 붙여서 노래로 부르고 싶은 충동.

빠져나올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글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연락을 해서 콜라보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워낙 바쁘기도 했고,

이상은 문단의 제도를 전면으로 거부한 기인 아닌가.

인터뷰 하나도 따기 힘들다는데, 콜라보?

절대 허락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때였다.

-길을 잃은 아이~ 오오~ 어~디로 저 노~을 너머~

장하늘의 지난 앨범 타이틀곡이 울려 퍼졌다.

휴대폰 벨소리였다.

매니저 언니인가, 해서 받지 않으려했다.

그러나 끈질기게 울리는 전화에 그녀는 툴툴대며 침대로 향했다.

“귀찮게 또 왜... 어?”

휴대폰 액정에는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떠 있었다.

얼마 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특별한 연기 잘 보고 있어요’라고 말 해준 사람.

조인후 감독이었다.

***

신촌의 모 카페.

금홍이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었다.

‘오면 커피를 사주겠다’는 말에 혹한 척 왔다.

지훈을 꼬셔서 저녁 식사 약속까지 잡고.

이렇게라도 안 보면 볼 기회가 너무 없으니까.

특별한 만남을 갖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잘 있는지,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금홍은 정말로 자신의 카드를 포스기에 긁어 커피를 사줬다.

그냥 얻어먹을 수 있나.

쿠키 두 개를 사서 하나는 금홍을 줬다.

금홍이 씩 웃었다.

“고마워요.”

“카페에 손님이 많이 없네요?”

“대학 근처잖아요. 샘 작품 영화화 된다면서요? 기사 봤어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대학원 오리엔테이션 했겠네요?”

“음...네. 그런데... 교학팀에서 샘들이랑 같이 웃고 떠들었던 게 좀 그립긴 하네요.”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아팠다.

대한외대 대학원도 텃세가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대학원에서 괜히 기 싸움 할 필욘 없지만... 그래도 기죽진 말아요.”

“기 죽다뇨. 그럴 일 절대 없어요. 저, 샘들한테 보고 배워서 대학원 생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아요.”

“하하... 우릴 보고 배웠다면 걱정할 거 없겠네요.”

“그런데 지훈 샘은요?”

“평론가들 모임 있대요. 곧 올 거예요.”

“그 성격에 아는 사람이 좀 많을까요.”

금홍의 얼굴이 밝아보였다.

다행이었다.

나는 카운터 안쪽을 흘끗 보았다.

태블릿 피시에는 자막 없는 외화가 나오고 있었다.

“일하면서도 공부하는 거예요?”

“노느니 틀어놓는 거죠.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쿠키 나왔습니다. 편하신 자리에 앉아주세요~”

금홍이 쟁반에 커피와 쿠키를 담아 건넸다.

나는 눈인사를 하고 쟁반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카운터와 꽤 떨어진 창가 자리였다.

슬쩍 보니 금홍은 설거지를 하며 외화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훈이 오지 않는다.

약속 시간인 4시에서 10분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

우웅-

지훈의 톡이 왔다.

-형. 죄송해요. 버스 타고 가는데 택시랑 살짝 스쳐서 ㅡㅡ 지금 다음 버스 기다리는 중이에요.

이런.

-괜찮아?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진짜 살짝 스친 거라 괜찮아요. 한... 삼십 분 걸릴 것 같은데요.

지금부터 삼십분이면 애초에 늦게 출발했구만, 이 놈.

그나저나 어쩐다.

읽을 책 하나 안 가져왔는데.

금홍은 바쁜 것 같고.

가지고 있는 거라곤 조인후 감독이 보내 준 스토리보드와 펜 뿐.

스토리보드는 시나리오를 만화처럼 표현한 계획표다.

조인후 감독은 그림도 꽤 잘 그려서 스토리보드마저도 재밌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도 이미 마르고 닳도록 봤다는 거.

나는 손으로 펜을 돌돌 굴리다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다가,

쿠키를 좀 먹다가,

어쩐 일인지 금홍1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떠오른 금홍1.

이젠 그녀 생각을 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금홍1과의 사랑은 불꽃같았다.

안달 나게 사랑하고, 죽일 듯 싸우고.

이렇게 잊어갈 줄도 모르고.

반면 카운터의 금홍이.

그녀를 좋아하긴 하지만...

열렬이 사랑한다고도 못 하겠다.

그녀도 나도 누굴 사랑하기엔 아직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걸지도.

다만, 때가 되면 보고 싶어졌다.

안부를 알고 싶고, 항상 건강했으면 했다.

은은하게.

“....”

나는 스토리보드 뒷면에 작게 적었다.

<은은>이라고.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것도 시라고 해야 하나.

내 마음과 영감을 정리하는 글에 가까웠다.

사랑할 여유가 없는 마음.

그럼에도 은은하게 번지는 애정 어린 마음.

그 소중함과 씁쓸함에 대하여.

끄적끄적 적어 내려가는 시.

그 시가 종이의 반을 넘어설 때였다.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지훈이 막 들어오고 있었다.

“죄송해요, 형.”

“생각보다 빨리 왔네?”

“빨리요? 그런가? 이열~ 금홍 샘! 오랜만이네요.”

지훈이 신나게 인사를 하며 카운터로 갔다.

시계를 보니 4시 50분.

어느새 40분이 뚝딱 가버렸다.

“형, 저녁은 뭐 먹을까요? 금홍샘이 카레 먹자는데요?”

지훈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래, 그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얼른 스토리보드를 가방 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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