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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55)
다시 사는 천재 작가 55
한국대학교 면접이 끝난 후,
나는 심한기 교수에 대해 알아보았다.
한국대학교의 교수라는 것만으로도 실력은 보장.
특히 1930년대 작가들을 많이 연구한 학자였다.
“흐음....”
작업실에서 그의 논문을 하나하나 살폈다.
주로 작가의 내면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집중한 논문들.
이를테면,
<이효석의 유년과 그의 소설 속 역마살의 상관성>
<김유정의 애정관계와 그의 소설 속 소녀 인물의 상관성>
<정지용의 가족사와 시의 색채 이미지의 연관성>
등등.
전생에서 알고 지냈던 동료 작가들.
그들의 개인사를 아는 입장에서 이 논문들은... 대단히 훌륭하다.
정말 이 작가들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이상’에 대한 논문은 없다.
심한기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이상의 마음속을 꿰뚫어봐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내 마음속이라....”
그 당시의 내 마음속은 나조차도 알기 힘들었다.
그것을 몰라서, 알고 싶어서 글을 썼을 정도니.
심한기 교수.
그의 연구 스타일은 조인창 교수와도 다르다.
조인창 교수는 작품을 작품 자체로 판단한다.
작가의 개인사는 주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심한기 교수는 작품과 작가의 ‘관계’에 집중한다.
작가의 창작 동기에 대해 끝없이 탐구한다.
휴대폰으로 어젯밤 캡처한 인터넷 화면 사진을 열었다.
-2021년 2학기 국어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2차 모집 지원 결과.
[합격]
사실 결과는 심 교수와의 면접에서 정해진 셈이었다.
칼자루는 이제 내 손에 쥐어졌다.
심 교수와 연구를 할 것이나, 말 것이냐.
잠시 후.
나는 기재된 계좌번호로 입학금과 등록금을 보냈다.
한번 해보기로 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내 마음을 잘 꿰뚫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엠플릭스 지하 편집실.
어두컴컴한 그 곳에서 강인춘 PD가 의자에 푹 눌러 앉아 있었다.
전용 키보드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
토끼처럼 핏발이 선 눈.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빵 봉지.
그는 어젯밤에도 이곳을 나가지 못했다.
똑똑...
화면만 바라보고 있던 강인춘 PD가 흠칫 놀랐다.
달칵-
“PD님. 저 오준이예요. 많이 바쁘세요?”
얼굴을 빼꼼 내민 사람은 다름 아닌 최오준 배우였다.
“...딱 죽겠다. 너 근데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조연출님 불러서 졸랐죠. 들어가도 돼요?”
강인춘 PD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좀... 부끄럽긴 하지만 별 수 있나.
“돼지우리 같지만 들어와라.”
“감사합니다-. 이것 좀 드세요. 밤새셨다고 해서.”
최오준 배우는 일식집에서 사 온 도시락을 내밀었다.
강인춘 PD가 씩 웃더니 덥석 받았다.
“너밖에 없다. 근데 너 안 바빠? 요즘 예능이다 뭐다 불러대는 데가 많을 텐데? 극본도 잔뜩 받는다며.”
“예능 쪽은 끼가 없어서 못 해요. 극본은... 좀 천천히 정하려고요. 지금도 좀 체한 기분이라.”
자고 일어나니 톱스타가 되었다는 말.
요즘 최오준 배우는 그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연극배우를 시작으로 오랜 무명을 버틴 최오준.
이 뜨거운 인기가 좋으면서도, 조금은 두려웠다.
“사내놈이 담은 작아선.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그래도 이건 고맙다?”
강인춘 PD는 도시락 뚜껑을 연다.
통통한 새우튀김까지 올려진 돈까스 정식이다.
“어이구 나 호강하네. 너 근데 진짜 무슨 일이야?”
강인춘 PD가 돈까스를 한 입 입에 문다.
최오준 배우는 편집중인 화면을 가만히 봤다.
<무너지는 날> 3화다.
“방영시간 늘어나서 PD님 편집 다시 하시잖아요. 좋은 일이긴 한데 고생하실 것 같아서 한번 찾아왔어요.”
“...그러게 말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에잇, 니들은 웃고 난 우는 거지 뭐.”
<무너지는 날>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하늘을 찔렀다.
‘케이블 드라마의 새 신화’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엠플릭스와 JTBA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무너지는 날>의 방영 시간을 15분씩 늘린 것이다.
그 덕에 발리 행을 꿈꿨던 강인춘 PD는 다시 편집실에 갇힌 것이고.
“정 작품 고르기 힘들면 공중파 드라마 하나 해.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대도 공중파 필모 있는 거랑 없는 거랑은 달라.”
“그게... 마음에 차는 극본이 없기도 하고요.”
“하긴. 너 작품 보는 눈 은근 까다롭지.”
하지만 그게 최오준 배우의 강점이기도 했다.
확실한 작품이면 조연도 가리지 않았고, 어설픈 작품이면 주연도 마다했다.
“얼마나 고르려고? 이번에 들어가는 이 작가 영화 정도는 되어야-”
까지 말하고 강인춘 PD는 입을 다물었다.
‘이크... 아직 비밀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이미 최오준 배우의 눈빛이 달라진 후였다.
“이 작가? 이상 작가님이요?”
“아니, 그게-”
“이상 작가님 영화 쓰셨어요?”
“그게, 확실한 건 아니고-”
“저, 저 할래요. 배우 정해졌대요? 조연도 괜찮은데.”
“아니야. 아무것도 정해진 거 없어. 할지 안할지도 몰라. 야 넌 그리고,”
‘너 이제 티브이 스타잖아. 예술영화는 티브이 스타 잘 안 써.’
라고는 차마 말 못하는 강인춘 PD였다.
최오준 배우가 이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기에.
<무너지는 날>을 찍을 때도 ‘작가님 다음 작품 뭐 안 하신대요?’를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로.
“그리고 뭐요?”
최오준 배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강인춘 PD는 느꼈다.
저 눈빛은 절대 무를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는 걸.
‘...모르겠다, 이미 엎질러진 물.’
“...너 <내외인> 봤지?”
“당연하죠.”
“그거 영화로 나올지도 몰라.”
강인춘 PD는 비밀이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최오준 배우가 물었다.
“감독은요?”
“...조인후.”
“....”
강인춘 PD는 최오준 배우가 흥분해서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의외로 덤덤해보였다.
대신 강인춘 PD를 집요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았다.
“...안 놀라워?”
“...시나리오 나왔대요? 오디션은요?”
“몰라 그건.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저 갈게요. 고생하세요, PD님.”
최오준 배우는 다급하게 외투와 핸드폰을 챙겼다.
“너 갑자기 어디 가?”
“얼른 기획사에 얘기해야죠. 오디션이든 뭐든 최대한 빠르게 알아봐달라고요.”
그렇게 최오준 배우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강인춘 PD는 닫힌 문을 빤히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파이팅이다, 오준아.”
그리고 다시 새빨간 눈으로 편집 화면을 보기 시작했다.
***
-시나리오가 나왔습니다. 이상 작가님.
조인후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바로 다음 날 연희동으로 향했다.
저택에서 만난 조인후 감독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며칠을 깎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
아무렇게나 쓸어 넘겨버린 머리칼.
여름 잠옷 위에 걸친 칙칙한 회색 샤워가운.
하지만 얼굴빛 하나는 확실히 좋아 보였다.
생기, 혹은 활력이라고 해야 하나.
“방금 전까지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와보시죠.”
그는 나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마저 신이 나 보였다.
“시나리오는 잘 써지던가요?”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글을 쓰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사흘 밤을 샜는데 피곤한 것도 모르겠어요.”
사흘 밤?
어쩐지 시나리오가 빨리 나왔다 했다.
작품 집필에 푹 빠진 그는 마치 기인 같았다.
어딘가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고,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커다란 덩치로 그러는 게 좀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자, 들어오십시오.”
그는 자신의 작업실로 날 안내했다.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내외인>의 출력본이 쫙 붙어 있는 화이트보드.
책상 위엔 내가 우편으로 보낸 책 <내외인>.
그 책은 벌써 손때가 타고 간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우리는 방 중앙의 응접 소파에 마주앉았다.
그는 먼저 세 장짜리 종이를 내밀었다.
“대략적인 시놉시스입니다. 봐주십시오.”
시놉시스는 소설 <내외인>의 이야기와 동일했다.
“<내외인>의 짜임새가 워낙 좋아서요. 내용은 거의 손 보지 않았습니다.”
말인 즉슨, 연출에서 손을 봤단 소리.
“시나리오를 봐도 될 까요?”
“그럼요, 허허... 이거 참 숙제검사 받는 기분입니다.”
그는 두꺼운 시나리오 뭉치를 내밀었다.
종이가 아직 따뜻했다.
“방금 출력한 겁니다. 필요하시다면 작가님의 책도 함께 드리겠습니다. 비교해보시죠.”
“아, 그건 괜찮습니다. 시나리오만 보겠습니다.”
내가 쓴 작품 정도는 이미 머릿속에 담겨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읊으라면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워낙 퍼즐 같은 장면이 가득한 소설.
장면을 잘 자르고 잇는 것이 관건일 텐데.
나는 시나리오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일.
단순히 소설의 내용을 영화로 반복하는 게 아니다.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플롯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내가 만들어 둔 <내외인>이라는 퍼즐.
조인후 감독은 그 퍼즐을 완전히 해체하고,
그것을 영화의 문법에 맞게 다시 맞추었다.
그 과정에 탈락되는 퍼즐들은 과감하게 배제.
대신 강조해야 할 퍼즐은 두드러지게 배치했다.
나는 점점 시나리오에 빠져 들어갔다.
베테랑만이 짤 수 있는 구조.
영화에 맞게 다듬어진 대사와 장면들.
한 눈에 쏙쏙 들어오는 지문들.
...웬만한 감독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수준.
“어떻습니까?”
“훌륭하네요.”
나는 계속 시나리오를 읽어갔다.
이야기 자체는 소설 <내외인>과 동일했다.
그러나 연출의 차이가 컸다.
내면의 흐름을 서술할 수 없는 영화의 특성 상,
인물들은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특히 후반부에서 처음으로 남자1과 남자2가 스치는 순간.
그 순간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출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강인춘 PD의 말이 떠올랐다.
‘그림으로 된 스토리보드만 봐도 너 느낌 확 올걸? 이 사람, 거장은 거장이라고.’
스토리보드까지 갈 것도 없었다.
글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정도인데, 영화계 사람들에겐 정말 질투의 대상이겠군.
나는 그를 흘긋 보았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남자1과 남자2의 눈이 마주친다.
그들의 뒤에서 하얀 빛이 쏟아지고,
두 남자는 사라진다.
소설 <내외인>을 그대로 살린 마무리.
나는 그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다 읽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어떻습니까.”
“멋지네요. 과연 감독님이세요.”
“후우... 긴장했습니다. 마음에 안 차실까 봐. 아, 제작사는 결정됐습니다. 제작비도 충분히 지원받을 수 있을 것 같고요. 배우는...”
“배우는 감독님께 맡기겠습니다. 드라마를 할 때도 그렇게 했거든요.”
“여배우는 이미지에 맞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남자 배우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캐릭터가 워낙 기묘하다보니. 오디션을 봐야 할지도요. 일단 기다려 주십시오.”
“정해지는대로 알려주세요. 아 그리고...”
“네, 작가님.”
나는 시나리오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마지막 장면 말입니다.”
“네. 중요한 부분이니만큼 원작을 확실히 살리는 방향으로 갔습니다만.”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아쉬웠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의 얼굴에 순간 긴장이 차올랐다.
“다르게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나는 설명을 하려다가,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조인후 감독에게 말했다.
“...따라오세요.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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