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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5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54
끼이익-
김유한이 문을 여는 소리.
소름이 끼친다.
그를 반기는 건 먼지와 어둠 뿐.
-아무도 없습니까.
돌아오는 건 침묵.
김유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집으로 들어선다.
폐가나 다름없는 일본풍 가옥.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에도식 건물... 용케도 지금까지 버텼네.
그는 복도와 방을 나누는 벽을 만져본다.
거스러미가 후두둑 떨어진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바닥을 본다.
-뭐야, 이거.
정체모를 검댕이 잔뜩 묻어 있다.
그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은 후, 계속 집을 둘러본다.
뚜벅... 뚜벅...
끼익-끼익-
걸을 때마다 울리는 뒤틀린 나무 바닥 소리.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커다란 창 앞.
창밖엔 오랫동안 방치된 정원이 펼쳐져 있다.
수풀은 모두 시들고 벌레조차 남지 않은 정원.
그는 손을 뻗는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정원의 시간은 서서히 과거로 넘어간다.
시들어버린 꽃이 다시 피고,
풍화된 대나무가 다시 단단해지고,
바닥에는 먼지 대신 흰 모래가 깔렸던 시간.
1930년대로.
정원 끝에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서 있다.
저 연기를 한 건 한예린 배우.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얼굴이 없다.
-헉...!
김유한이 눈을 치떴다.
그러나 이내 익숙한 일이라는 듯 집을 살핀다.
이야기는 김유한의 과거로 넘어간다.
이른 바, ‘막장미’를 넣은 그 부분 말이다.
김유한의 유년기.
그는 부유한 부모, 그리고 삼촌과 함께 살아간다.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그의 부모는 창고에서 목을 매달고 죽는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지만 사인은 자살로 판명.
하지만 김유한은 알고 있다.
부모가 자신을 두고 함께 자살할 리 없다는 걸.
몇 년 후.
형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삼촌이 돌아온다.
삼촌을 그를 꽉 안아주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날 밤.
김유한은 곯아떨어진 삼촌의 짐을 정리해준다.
캐리어의 가장 안주머니에서 나온 사진 한 장.
그건 다름 아닌 올가미를 쓴 부모의 사진.
진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김유한의 얼굴.
화면이 멈추고,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1화가 끝난 것이다.
내가 썼지만 잘 만들어진 드라마였다.
분위기와 음악, 영상미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다.
가장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최오준 배우의 연기.
지훈이 입을 틀어막았고 말했다.
“...짱 재밌는데요?”
뿌듯했다.
당연하지. 누가 쓰고 누가 찍었는데.
“재미 포인트는? 너 평론가잖아.”
“첫째. 스릴러적인 분위기. 둘째. 과거를 본다는 판타지적 요소. 셋째. 한국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가족 사연 버프?”
“정답. 완벽하게 파악했네.”
“실시간 시청률 좀 확인하고 올 게요.”
지훈은 후다닥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우웅-
톡이 하나 왔다.
금홍이었다.
-막장을 알려달라고 하셔놓고! 명품을 쓰시면 어떡해요! 너무 재밌잖아요!
-샘도 보셨어요?
-그럼요. 혜경 샘 작품은 무조건 봐야죠.
-감사해요. 기숙사 생활은 어때요?
사무원을 그만둔 금홍은 대한외대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냥 기숙사도 아니고, 사감 노릇을 하며 장학금을 받는 조교로 말이다.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더니.
잘 된 일이었다.
-할 만해요. 조용해서 공부하기도 좋고요. 저는 그럼 인강 들으러 가요~ 안녕!
금홍은 바로 사라져버렸다.
바쁜 시간을 쪼개 드라마를 봐준 게 눈에 선했다.
“형! 형!”
작업실에서 지훈이 날 불러댔다.
왜 저러지? 싶어서 일어나 가려는데,
우웅-우웅-
이번에는 강인춘 PD에게 전화가 왔다.
...이쯤 되니 감이 온다.
<무너지는 날> 시청률, 대박났구나.
“여보세요.”
-이 작가!!
“PD님. 드라마 잘 봤어요. 고생 많이-”
-19프로!!!
“네?”
-시청률 19프로나 나왔어! 지상파도 아닌데 이 정도면 초대박이야!! 지금 여기 난리도 아니다, 으하하하!!!
“19프로나요?!”
“형, 왜 안 들어와요? 지금 19프로...!”
지훈이 참지 못하고 달려 나왔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작업실로 갔다.
지훈이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놓은 창.
그 창엔 실시간 시청률 그래프가 떠 있었다.
들쭉날쭉하지만... 최고 시청률 확실히 19.2프로.
“...진짜네요.”
-그럼 가짜겠어?! 내가 말했지?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이거 초대박이라고! 고마워, 고마워 이 작가!
“와... 이거... 말이 잘 안 나오네요. 아직 1화인데 어떻게 이런 시청률이 나오죠?”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초반에 영상미랑 막장미를 동시에 잡았는데 어떻게 시청률이 안 나오겠어? 어? 어허허허!!
강인춘 PD는 하늘이 뒤집어져라 웃는다.
나도 웃음이 비식비식 나온다.
-아, 이 작가. 내 생각엔 내일부터 이 작가한테 인터뷰 엄청 갈 거야.
“안 그래도 드라마 홍보 시작하고 나서 계속 와요. 귀찮아 죽겠어요.”
-앞으론 더 귀찮아질 걸? 아무튼 잘 숨어있으라고? 껄껄...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음 날부터 전화, 메일, 문자, 톡 등 별의 별 수단으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물론 모두 거절했다.
내가 인터뷰를 하지 않아도 기사는 우후죽순 쏟아졌다.
<천재 소설가의 유쾌한 변신>
<신개념 건축 판타지 드라마? 드라마 판을 접수한 소설가, 이상>
<한계를 모르는 작가, 장르를 넘나들다>
등등.
그렇게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진행될 일들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신라문학에서 내 책들,
에세이 <다시 사는 일>과 장편 소설 <내외인>이 출간된 것이다.
많은 작가들은 책이 나오면 출판사에 간다.
싸인본을 만들어 문학 관계자들에게 보내기 위해서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택배로 책을 받았다.
한 품에 안을 만한 상자 두 개.
그 안엔 나의 새 책들이 가득했다.
나는 지훈과 금홍, 김미소 작가, 조인후 감독, 강인춘 PD, 최오준 배우와 한예린 배우 등의 책을 따로 뺐다.
그들에게는 책에 싸인을 해서 보내줄 생각이었다.
<다시 사는 일> 그리고 <내외인>
그 두 권의 책을 책장에 가운데에 꽂았다.
조인창 교수의 유작 <위대한 문학에 대하여>의 옆자리에.
그렇게 책 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우웅- 우웅-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인터뷰 요청을 하는 기자인가 싶었지만, 일단 받았다.
“여보세요.”
-김혜경 선생님 되시죠?
내 본명을 부르네? 누구지?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여기 한국대 국문과 사무실인데요. 이번에 2021학년도 2학기 대학원 박사과정 2차 모집에 지원해주셨죠?
“아, 예. 맞습니다.”
벌써 결과가 나왔구나.
드라마다 책이다 해서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일단 서류는 합격 하셨고요, 이틀 뒤 수요일 오후 2시에 면접을 진행할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서류 심사 통과라니.
일단 첫 번째 산은 넘었다.
***
이틀 뒤, 수요일 오후 1시 50분.
나는 한국대학교 국문과 회의실 앞에 앉아 있었다.
회의실 문 앞에 붙어 있는 A4용지.
‘2021년 2학기 국어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2차 모집 면접장’
참으로 긴 이름이다.
그리고 분위기로 보아하건데... 후보는 나 한 명이군.
누군가 슬쩍 내 곁에 선다.
특강에서 여러모로 날 챙겨준 차 조교였다.
학과 일을 도와주러 온 모양이다.
“여기서 뵙네요, 작가님.”
“차 조교님.”
“긴장되세요?”
그는 이온음료를 한 병 내밀었다.
시원하게 목을 축이니, 날서있던 신경이 가라앉는 듯했다.
“후보는 저 하난가 보죠?”
“그런 것 같아요. 후우... 제가 다 긴장이 되네요.”
그때, 면접장 안에서 다른 조교가 나왔다.
“김혜경 선생님, 들어가세요.”
“네.”
자리에서 일어서자, 차 조교가 주먹을 꽉 쥐고 속삭였다.
‘화이팅’ 이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면접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전 날, 특강을 허락받기 위해 왔을 때에는 여덟 명의 교수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한국대 국문과의 원로. 심한기 교수.
반년 전 내 특강을 유일하게 찬성했던 사람.
그러고 보니 한국대 앞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지.
구식 소나타를 몰며,
‘자네, 지도교수 이현강이랑 사이 안 좋지?’
라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뭘 그리 멀뚱하게 있어요? 앉으세요.”
“아, 예. 죄송합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1대 1면접.
왠지 더 긴장이 되는데?
“자기소개부터 해보지요.”
“김혜경입니다. 필명은 이상이고, 낸 책으로는 <다시 사는 일>과 <내외인>이 있습니다. 인수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소개는 간략하게 준비했다.
이 이상 할 말도 없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심 교수는 안경 너머로 날 빤히 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예.”
“우린 이상 선생을 뽑고 싶어요. 이상 선생을 뽑음으로써 감당할 리스크보다, 선생이 탐나는 게 더 큽니다.”
나는 감사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선생의 ‘스승’이 되고 싶어하진 않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선생은... 조금 부담스러운 존재니까요. 긍정적인 의미로요. 이해하십니까?”
“아니요. 전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그가 끌끌 웃었다.
“괜한 겸양은 떨지 마세요. 선생에게 가르칠 건 없어요.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뭘 더 가르친단 말입니까?”
...이대로 떨어지나 싶었다.
그것도 이런 황당한 이유로.
내가 뭐라고 말을 하려던 때였다.
심 교수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저는 선생의 지도를 맡고 싶습니다.”
“예?”
심 교수가?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 이상 선생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르칠 필요도 못 느끼겠고요.”
“그렇다면 왜...?”
“이것 때문입니다.”
그는 내 지원 서류의 연구활동계획서를 꺼냈다.
연구활동계획서란 곧 논문계획서였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계획서를 읽었다.
“이렇게 쓰셨더군요. 1930년대 작가와 작품의 연결고리를 파악하고 싶다. 특히,”
그는 날 슬쩍 보았다.
“1937년에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 ‘이상’을 중심으로. 이렇게 쓰신 게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필명도 그렇고... 이상을 정말 많이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많이 좋아합니다.”
“제가, 꿈이 하나 있습니다.”
꿈?
“이상에 관한 논문은 많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논문은 극히 적어요. 조인창 교수님의 것 정도일까요. 작품이 난해하고 또... 이상이란 사람이 워낙 똑똑했죠. 그래서 공부해야 할 양이 방대해요. 이상의 마음속을 꿰뚫어봐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나의 마음속을 꿰뚫어본다...라.
“제가 은퇴가 3년 남았습니다. 은퇴하기 전에 조인창 교수님의 ‘이상 연구’를 잇는 논문을 남기고 싶어요. 지도제자의 논문을 통해서라도요.”
“저와 함께 ‘이상 연구’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맞아요. 하지만 당장은 아닙니다. 적어도 일 년 후에나 시작할 듯싶으니까요. 하지만 그때까지 각자 준비는 해야겠죠.”
그는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곤, 내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저와 한국대에서 ‘이상 연구’를 해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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