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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54화 (5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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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53) - 수정완료

다시 사는 천재 작가 53

한국대 국문과 회의실.

김진하 학과장을 비롯한 교수진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의 안건은 2021년 2학기 대학원 신입생.

심사를 해야 하는 서류는 총 네 건이었다.

그리고 뽑을 학생 수는, 단 한 명.

김진하 학과장이 회의를 주도했다.

“2차 모집은 등단자나 그에 준하는 업적 보유자만을 위한 전형이니만큼,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안 될 사람부터 가려보죠.”

“심노훈, 이경자. 일단 이 두 사람은 떨어뜨리죠. 이름만 작가이지 이렇다 할 작품 활동이 안 보입니다.”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교수들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두 후보가 탈락했다.

“한중호 이 시인도 안 됩니다.”

원로 교수인 심 교수가 말했다.

“작년에 문하생 성추행 문제로 말이 많았잖습니까.”

“업적이 아깝긴 한데... 시집도 많이 내긴 했고요. 그 일은 가벼운 벌금형으로 끝났죠?”

“벌금형이어도 유죄는 유죄니까요. 그런 논란이 있는 사람을 한국대에 들일 순 없죠.”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2차 전형은 1차 전형보다 따질 게 많았다.

개인의 업적뿐만 아니라 논란 여부, 때로는 인성까지.

“아무튼, 그럼 탈락이군요. 한중호도.”

그렇게 서류가 하나가 구석으로 밀려났다.

“자... 남은 건 하나뿐인가요.”

회의실이 고요해졌다.

그들에 앞에 놓인 단 한 사람의 지원서.

이상.

지원서 상의 이름은 김혜경.

지금 한국 문단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

반년 동안 쉼 없이 새로운 충격을 안겨 준 작가.

심 교수가 피식 웃었다.

“업적만 생각하면 장학금을 줘서라도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에요.”

“작품은 정말 대단하죠. 다만 이전 학교가 있어서...”

“이현강 교수의 제자였죠?”

“그렇긴 합니다.”

“흠... 가라사대 쪽이라. 그렇잖아도 이상은 가라사대와 사이가 좋진 않죠?”

아무리 대학이라 해도, 여기는 국문과다.

대형 출판사를 척지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탐나는 학생을 놓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다시없을 인재라면 더더욱.

김진하 학과장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정리해보는 게 어떨까요.”

“어떻게 말입니까?”

“가라사대가 비난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이 위대한 작가가 되면 됩니다.”

김진하 학과장은 교수들을 둘러보았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우리가 그를 서포트하면 되는 거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섣불리 의견을 내지 못했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심 교수였다.

“그 가능성은 이미 확인한 거 아닙니까? 다들 <내외인>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 작품은...”

“훌륭하죠.”

“맞습니다. 그 점은 이견이 없습니다.”

“난 그거면 된 것 같은데. 다른 분들은 아니신가요?”

심플하면서도 거침없는 의견이었다.

교수들도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가라사대도... 이상을 비난하는 일로 욕을 먹고 있긴 하죠.”

“대형 출판사가 무서워 다들 쉬쉬하긴 하지만요.”

“생각해보면 우리 한국대가 출판사 눈치를 본다는 것도 좀....”

교수들의 의견은, 그렇게 모아진 것 같았다.

김진하 학과장은 펜 끝으로 지원서를 지그시 눌렀다.

그 펜 끝엔 ‘김혜경’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저도 뽑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아니, 사실 이건 한국대의 기회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우리가 해결하고 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교수들이 그게 뭐냐는 듯 김진하 학과장을 바라보았다.

“누가 이상 작가의 스승을 맡으시겠습니까?”

다들 말이 없었다.

국문과 교수라면 모를 리 없었다.

이상의 글에서 풍겨나오는 천재성을.

아무리 한국대 교수라고 해도 천재를 지도한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큼... 저는 고전문학 전공이니 빠지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군요. 나머지 분들께서 합의를 보시길...”

현대문학을 담당한 교수들이 당황했다.

“학과장님께서는...?”

한 교수가 은근히 김진하 학과장을 압박했다.

“허허... 저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때였다.

이상의 지원서를 보고 있던 한 교수가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상의 지도교수, 제가 하지요.”

***

종로의 소줏집.

나는 오랜만에 강인춘 PD를 만났다.

바로 오늘 <무너지는 날> 편집을 끝낸 그는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야구모자 아래도 삐죽대는 덥수룩한 머리칼.

퀭한 눈가에 핏발이 선 눈동자.

얼마나 집에 못 들어간 건지 꾀죄죄한 행색.

“아, 천천히 좀 드세요. 안 뺏어먹어요.”

“야, 나 어젯밤부터 한 끼도 못 먹고 편집만 했어. 네가 PD의 고충을 알아? 아주머니, 여기 계란말이 하나 더 주세요!”

그는 마지막 남은 계란말이를 입에 쑥 넣었다.

나는 그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젓더니 소주잔을 비운다.

“캬아- 살 것 같다.”

“그러다 제 명에 못 사십니다?”

“난 인생에 미련 없다, 임마.”

나는 피식 웃었다.

딱 저런 마음으로 살았던 전생이 떠올라서.

강인춘 PD야 뭐, 말은 저렇게 해도 오래오래 살 것 같지만.

“<무너지는 날> 언제 첫방인지 알지?”

“알아요. 다음 주잖아요.”

“웬일이래? 하나도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신경 쓰고 있었네?”

“당연히 신경 쓰죠. 제가 쓴 글인데.”

“너, 이 작품 얼마나 기대해? 제작은 엠플릭스에서 했지만, 방영은 JTBA랑 같이 하는 거 알지? 시청률 말이야.”

“시청률은 신의 영역 아닌가요?”

“하긴. 그것도 그래.”

하고 강인춘 PD는 입맛을 쩝 다셨다.

아무리 극본이 훌륭해도,

아무리 톱스타가 연기를 해도,

흥행을 보장할 수 없는 게 방송계다.

그러니 강인춘 PD같은 강철 멘탈 아니면 버티기도 힘들지.

“뭐, 그럼 시청률은 신한테 맡기는 거로 하고. 그... 우리 내부에서는 이미 가편집본까지 심사 쫙 했거든?”

“네.”

“이렇게 좋은 드라마는 본 적이 없댄다, 대중성, 예술성. 뭐 하나 놓치는 거 없이. 영상으로 만들어놓으니 더 좋아.”

“감독님이 잘 찍어주신 덕분이죠.”

“어. 그건 그렇지. 아, 계란말이 감사합니다.”

강인춘 PD는 아주머니에게 받아 든 계란말이를 또 한 조각 입에 넣는다.

나는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래서, 자랑하려고 부르신 거예요?”

“아니. 너 마지막 촬영 때도 못 왔잖아. 보고 싶기도 하고.”

“하하... 벌써 취하셨어요?”

“그래. 취했다. 무드 없는 녀석.”

나는 웃으며 홍합을 하나 까먹었다.

“<무너지는 날> 종영하면 좀 쉬시겠어요?”

“그래야지. 가족들이랑 발리나 좀 갈까 해.”

발리. 좋겠다.

사람들은 모르겠지.

이렇게 거지꼴을 한 아저씨가 발리든 어디든 척척 갈 수 있는 부자라는 걸.

“너는?”

“아, 저 장편 소설 썼잖아요.”

“응. 뭐, 이번에는 새로 연 플랫폼에도 올렸다며?”

“네. 읽어보셨어요?”

“아니.”

“무드 없는 사람은 대체 누구랍니까.”

내 말에 그가 좋다고 깔깔 웃는다.

“미안, 미안. 촬영이랑 편집 들어가면 소설은 고사하고 자식들 얼굴도 못 본다. 봐 줘.”

“곧 책으로 나와요. 들고 발리 가시면 되겠네요. 아무튼,”

“아무튼?”

“아직 비밀이긴 한데... 제 소설, 영화로 만들어질 것 같아요.”

“영화?”

그가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다가, 내게 소곤거리듯 묻는다.

“감독은?”

“조인후.”

“허억. 너 진짜 대박이구나? 조인후 감독이랑?”

그는 먹던 숟가락도 내려놓고 내 어깨를 툭 쳤다.

조인후 감독이 좀 유명하긴 하다.

특히 영상미가 뛰어나서, 드라마 PD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다지.

“너, 그럼 이번에 시나리오 작가 되는 거야?”

“아뇨. 시나리오는 감독님께 맡기고, 일종의 검수 작업을 하는 거죠.”

“담도 크다. 조인후의 글을 검수할 생각을 하다니.”

그는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다.

“...할 수 있겠어?”

“어쨌건 원작이 제 거잖아요.”

강인춘PD가 씩 웃는다.

“맞아. 너 원래 그런 놈이야.”

“뭐가요?”

“너 처음에 드라마 쓸 때 기억나지? 송예나가 네 극본 같이 고치자고 했을 때 네가 극구 사양했잖아.”

음... 그랬었지.

‘막장미’가 부족하다는 말에 금홍이에게 ‘막장 강의’도 전수받았고.

“그때 네가 했던 말 기억 나?”

“PD님이 한 말은 기억나요. ‘드라마판은 정글이다’.”

“네가 그 말 듣고 우리한테 그랬잖아. 정글이고 나발이고 어려워도 내가 하겠다고. ‘내 거니까’.”

맞다.

나는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 작품을 남에게 절대 맡기지 않겠다고.

“이 작가. 조인후 감독은 나보다 훨씬훨씬 대단한 사람이야.”

뭐 그런 말을.

“PD님도 대단하세요.”

“그렇긴 한데, 난 비빌 것도 아니지. 예술 영화계의 천재 아니냐. 너도 배울 게 많을 거다. 그림으로 된 스토리보드만 봐도 너 느낌 확 올걸? 이 사람, 거장은 거장이라고.”

그가 내 소주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분명 아까 차 갖고 왔다고 했는데. 은근슬쩍.

하지만 왠지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네 중심을 잃지 마.”

그는 취기가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도 네 작품을 잘 지키란 말이야.”

“...명심할게요.”

강인춘 PD는 좋은 어른이다.

언젠가 또 합을 맞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두어 시간 후.

우리는 소줏집을 나섰다.

“대리 불렀어요. PD님 댁 들렀다 갈게요.”

“아냐, 아냐. 나 택시 탈래.”

태워준대도 고집을 부린다.

그는 비틀대면서도 용케 카카호 택시를 불렀다.

“이 작가.”

“왜요?”

“네가 나 설레발친다고 욕할 것 같아서 이 얘긴 안 하려고 했는데... 너 내년 봄에 기대해라.”

내년 봄?

이제 여름인데 웬 내년 봄?

“백상예술대상... 난 네가 대박날 것 같아.”

“네?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내가 촉이 와. 촉이. 어어, 택시 왔다. 난 간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붕 가버렸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신없기는.

그나저나 백상예술대상이라니.

TV, 영화, 연극을 총괄하는 종합 시상식 아닌가.

“...설레발치시기는.”

***

또 한 주가 지났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무너지는 날>의 첫 방영일이다.

10시.

좀 늦은 시간이긴 하다.

매회를 제시간에 볼 순 없겠지만,

1화 정도는 본방송을 봐줘야겠다.

거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켰다.

사놓고도 시간이 없어 못 보던 티브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하겠구나.

광고가 하나둘 씩 지나갈 무렵, 외출했던 지훈이 돌아왔다.

숨을 헉헉 몰아쉬는 게, 차에서 내려서 뛰어왔나 보다.

“아직 시작 안 했죠?”

“숨넘어가겠다.”

“늦는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보내주질 않아서.”

지훈은 문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이렇게 한 번 모임에 나가면, 도망치기 힘든 모양이다.

지훈도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제가 다 긴장되네요.”

“이거 보면, 바로 시청률 파악할 수 있어?”

“가능할 걸요? 끝나고 찾아보죠.”

“그래. 부탁한다.”

그때. 마지막 광고가 끝났다.

...드디어 시작한다.

어둡고 침침한 산 속.

최오준 배우가 연기한 김유한이 산을 오른다.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

숨소리.

벌레 소리.

그의 가방에 비죽 나와 있는 ‘건축조감도’

-하아...

그가 한숨을 쉰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은 듯 다시 걸어간다.

미끌-

-으앗!

험한 산세에 그가 넘어질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는 그.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

-그 집. 허물고 다시 지으려고. 믿을 만한 건축가를 찾다보니 딱 네가 떠오르지 않냐. 그 땅, 더는 놀리기 아까워. 팬션이라도 하나 딱 지어놓으면 얼마나 좋아. 하나밖에 없는 삼촌 부탁 들어주는 셈 치고, 잘 부탁한다. 조카?

-...하나밖에 없는 삼촌이라.

김유한이 중얼거린다.

그의 얼굴에 은은한 달빛이 쏟아진다.

그가 고개를 들면,

산 중턱 평지에 거대한 일본식 건물이 한 채 서있다.

그 건물 위에 떠오르는 듯한 로고.

<무너지는 날>

...멋진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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