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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53화 (5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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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52) - 수정완료

    다시 사는 천재 작가 52

    “이상 작가님... 저, <내외인>을 영화로 만들고 싶습니다.”

    조인후 감독이 말했다.

    <내외인>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당황스러웠다.

    책조차도 아직 나오지 않은 소설인데...

    갑자기 영화라니?

    심지어 그는 한국 최고의 예술영화 감독이다.

    게다가 조인후 감독 영화의 강점은 오리지널리티.

    그는 항상 혼자서 시나리오를 써왔다.

    그런데 원작이 있는 작품을 만들겠다고?

    “많이 놀라신 모양이군요.”

    “...조금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서요.”

    “아시다시피,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시나리오를 못 쓰고 있습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내외인>을 출력한 원고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작가님의 작품을 만난 겁니다. 첫 문장을 보던 순간부터 마지막 문장을 보던 순간까지. 옴짝달싹 할 수 없었습니다. <내외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내외인>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기고 있는 조인후 감독.

    그래서 내 작품이 더 크게 다가갔을지도.

    “아, 물론 제가 시나리오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 궁여지책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럴 사람은 아니지.

    그런 건 그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영화의 문법과 소설의 문법은 다르지 않나요?”

    “다르지요. 닮았지만, 근본적으론 다릅니다.”

    소설이 단순히 이야기를 글로 늘어놓는 게 아니다.

    영화 역시, 이야기를 영상화 한 게 아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영화란 ‘움직임’이죠. 움직임 간의 ‘연결’이고.”

    “잘 알고 계시는군요.”

    조인후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는 영상 속 존재들의 움직임을 미학적으로 보여주는 예술입니다.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는 대사보다 행동을 강조하죠. 거기서 미장센이 탄생하는 거고요.”

    미장센.

    영화 속 장면의 구도를 말한다.

    영화의 가치를 매기는 중요한 척도.

    “중요한 건 장면과 장면의 연결이죠, 호흡이고. 어떤 장면 앞뒤로 어떤 장면을 배치하는가... 그것이 감독의 역량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상 작가님도 이미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신 것 같은데요?”

    그가 종이 뭉치를 손끝으로 가볍게 툭툭 쳤다.

    “바로 이 <내외인>에서요.”

    누가 조인창 교수의 아들 아니랄까 봐.

    귀신같은 눈으로 내 작품을 파악했다.

    <내외인>의 스타일은, 인물의 행동과 장면의 연결성에서 돋보인다.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영화의 문법과 맞아 떨어진다.

    ...흔치 않은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내 소설이 영화가 된다는 것도.

    그 영화를 조인후 감독이 맡아준다는 것도.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감독님께선 원래 협업을 안 하시지 않습니까? 감독님만의 고유한 색이 흐려지진 않을까요?”

    영화는 감독의 파워가 강하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비롯한 모든 걸 집권하기 때문이다.

    한편 <내외인> 역시 색이 강한 작품이다.

    영화에 잘 녹여내지 못하면, 이도저도 아닌 작품이 나와버릴 것이다.

    “맞습니다. 이건 제게도 도전이죠.”

    조인후 감독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작품에 제 손길을 더하는 일.,,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감정이야말로 예술을 만드는 시작점 아니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좋습니다.”

    나는 결국 허락했다.

    조인후 감독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입니까?”

    “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오, 무엇입니까?”

    “시나리오를 쓰시면 제게 가장 먼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의견을 나눴으면 합니다.”

    즉, 어느 정도 수정 권한을 달란 뜻이었다.

    나는 조인후 감독을 믿는다.

    그의 인성도, 실력도.

    하지만 영화 <내외인>이 내 의도와 달라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

    조인후 감독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게 해드리려 했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계약에 대해선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두툼하고 뜨거운 손.

    이 손에 영화 <내외인>이 달려 있는 셈이었다.

    문득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제작을 하려면 제작사니 뭐니 얘기가 복잡해지겠네요.”

    계약이니 돈 계산이니 하는 건 귀찮은데 말이다.

    “제작사요?”

    그는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는 듯 웃었다.

    “한국에 제작사가 얼마나 많은데요. 고르는 게 골치가 아프죠.”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다운 여유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조인후 감독에게 돈을 대주기 싫은 제작사가 몇이나 되겠는가.

    ***

    학교는 방학을 맞이했다.

    아니, 나의 경우에는 자퇴이려나.

    조교 계약기간도 끝났고 자퇴신청서도 제출한 상태.

    시원섭섭하게 교학팀 사무실에서 짐을 뺐다.

    지훈도 약속했던 대로 조교를 끝냈다.

    듣기론 영문과 외국인 교수들이 그렇게 안타까워한다고 했다.

    한국 행정에 서툰 그들을 많이 도와줬던 모양이다.

    교학팀 식구들은 우릴 위해 소소한 파티를 열어줬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치킨과 케이크를 먹는 정도지만.

    정이 많이 들어서 아쉽다.

    “두 사람 나가면 교학팀 허전하겠다. 매일 아침 지훈샘 브리핑 듣는 것도 재미였는데.”

    “그러게요. 혜경 샘 일본어로 전화하는 것도 신기하고.”

    “지훈 샘 후임은 영문과 신입생이 온다면서요? 문창과는요?”

    “저희도 신입생이요. 다른 학교 문창과 출신 남학생이라던데.”

    그렇게 소소한 파티를 끝내고,

    오후에 기다리던 후임이 도착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상, 아, 아니 김혜경 선배님...아니, 작가님?”

    왜 날 보고 얼굴을 붉혀? 징그럽게.

    “PC는 잘 다룰 줄 아시죠? 조교 일은 딱 두 가지예요. 사무원 샘 말 잘 듣는 거. 자리 잘 지키는 거.”

    “네, 넵! 명심하겠습니다!”

    ...?

    군대 후임인 줄 알았다.

    잘하면 경례도 하겠는 걸?

    나는 조교가 다루는 서류에 대해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그는 바짝 군기가 들어 고개를 끄덕여댔다.

    “신입생이라서 하는 얘기지만, 여기서는 쓸데없는 일 늘리지 않는 게 중요해요. 각 교수실 개인 조교들이 자기 일을 떠넘기면, 딱 거절하세요. 시간 나는 대로 학생 공부하시고요.”

    김혜경은 그걸 못해서 호구 아닌 호구가 됐지.

    그 어떤 조교도 그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란다.

    “넵. 선배님, 아니 작가님.”

    그가 날 초롱초롱한 눈으로 본다.

    “인수인계는 다 됐고... 모르는 거 있으면 연락해요. 연락처 줄 테니까.”

    “연락처를 주신다고요?!”

    ...? 그럼 안 줘?

    “저, 저... 사실 이상 작가님 진짜 팬이거든요. 진짜, 작가님 같은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저 정말 작가님 하나 보고 이 학교 왔어요!”

    ...난 이제 그만두는데.

    하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다음에 연락이라도 오면 밥이나 한 끼 사줘야겠다.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남한테 휘둘리지 말고요.”

    “네! 선배님께서 물려주신 자리. 제가 잘 이어받겠습니다!”

    그는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를 했다.

    그렇게 열혈 조교에게 내 자리를 넘긴 후.

    짐이 가득 담긴 상자를 안고 복도를 걸었다.

    혜경의 몸으로 들어 온 첫 날.

    여기서 김한과 한바탕 했었지.

    이게 진짜 끝이구나.

    이 지겨운 인수대도.

    “혜경 샘!”

    날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나처럼 상자를 들고 있는 지훈과 금홍이 있었다.

    “금홍 샘. 퇴근하신 거예요?”

    “오늘 반차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샘들이랑 파티 하려고요. 교학팀 사무실 탈출 기념 파티.”

    파티?

    웬일로?

    금홍인 요즘 밥 한 끼 같이 하기 힘들 정도로 바빠 보였는데.

    금홍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멜론주, 아직 남았죠?”

    ***

    “오랜만에 오네요. 두 분 집.”

    금홍이 구두를 벗으며 말했다.

    극구 만류를 했지만, 금홍은 치킨을 세 마리나 샀다.

    ‘어디 조교가 사무원 앞에서 계산을 하려 하죠?’

    라는 멋진 멘트와 함께.

    숙성시켜놨던 멜론주와 함께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음~ 술이 달아졌어요. 형, 진짜 맛있지 않아요?”

    “어. 이거 오늘 다 먹겠다.”

    “다음에 또 담가 드릴게요. 저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역시 조교 챙기는 건 사무원밖에 없다니까요! 자자, 드십시다!”

    “두 분 다 시원섭섭하시겠어요. 특히 혜경 샘은 학교를 아예 그만두신 거잖아요.”

    “뭐, 그렇죠.”

    “형. 한국대에 원서는 넣었어요?”

    “넣었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 비슷한 계열 학과에서 자퇴한 박사 대학원생, 받는 거 쉽지 않은 일이거든.”

    냉정하게 생각하면, 확률은 반반.

    떨어질 걸 감안하고 넣은 거다.

    “에이. 형은 될 거예요.”

    “안 된다고 해도, 괜찮아요.”

    금홍이 말했다.

    “안전한 변화라는 건 사실 없잖아요. 변하고 싶은데, 편하고만 싶은 건 말이 안 되죠.”

    지훈과 나는 치킨을 먹다 말고 멈칫했다.

    방금, 엄청나게 진지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금홍 샘, 갑자기 웬 멋진 말?”

    어색했는지, 지훈이 우스갯소리를 한다.

    금홍이 지훈을 휙 돌아본다.

    “분위기 다운시켜서 죄송해요. 사실 저한테 하는 말이었어요.”

    “신변에 변화라도 있어요?”

    내가 물었다.

    금홍은 멜론주를 한 잔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저, 사무원 그만둡니다.”

    “네? 왜요? 우리가 그만둬서?”

    “아니거든요, 지훈 샘.”

    금홍이 지훈을 장난스럽게 흘겨보았다.

    그런데 진짜 왜 그만두는 거지?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바리스타 1급 준비하는 게 아닌가?

    “저, 통번역과 대학원 붙었어요.”

    “...네?”

    대학원? 갑자기?

    “안 붙으면 말 안하려고 했는데... 사실 얼마 전에 발표 났어요... 대한외대.”

    “대한외대 대학원이면 영문과 애들도 많이 떨어지는 곳인데...”

    지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한 학기에 한두 명씩은 타과 출신 뽑거든요. 그 틈바구니에 운 좋게 낀 거죠. 아, 혜경 샘이랑 했던 작업을 포트폴리오로 냈는데 그거 점수가 좋았어요.”

    “그럼 운이 아니라 실력 같은데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뭐예요? 그리고 바리스타는요?”

    “바리스타 일은 주말에도 계속 하고 있어요. 생활비 때문에라도 해야죠. 음... 번역을 하다보니까, 즐겁더라고요. 저는 문창과 다니면서 한 번도 제 문장으로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번역도 일종의 문학이잖아요?”

    금홍의 말이 맞다.

    문학 번역은 일반 번역과 다르다.

    외국어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학적 감각’ 역시 필요하다.

    “사실 저도 확신은 안 서요. 혼란스럽기도 하고요. 뒤늦게 늦바람이 든 건지 어쩐지... 될 대로 되라! 하고 원서를 넣고 면접을 봤는데... 붙어 놓고도 한참 고민했어요. 좋다고 가는 게 맞는 건지 어떤 건지.”

    나는 말없이 금홍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녀는 천재나 수재는 아니다.

    지훈만큼 환경이 좋지도 않다.

    다만,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바리스타 공부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갑자기 방향을 트는 게 쉬운 결정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혜경 샘 번역이 아니더라도... 그냥, 계속 이 작업을 해보고 싶다, 남들보다 느려도 끝까지 해보고 싶다. 제가 즐거우니까요. 뭐, 그렇게 생각하니 답 나왔어요.”

    금홍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해보려고요.”

    “...잘 했어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잘했어요. 금홍 샘 다워요.”

    금홍이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대신 아주 활짝 웃어주었다.

    인수대 교학팀에서 반년을 함께한 ‘팀 이상’.

    어쩌면 지금이 ‘팀 이상’의 2막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지훈은 인수대에서, 금홍은 대한외대에서.

    그리고 나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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