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48화 (48/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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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47) - 수정완료

    다시 사는 천재 작가 47

    부웅-

    내 차가 부드럽게 연희동 언덕을 올랐다.

    저 위에 익숙한 저택이 보인다.

    조인창 교수, 아니 이제 조인후 감독의 집.

    어젯밤.

    조인후 감독은 내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다.

    -그럼요. 그 방은 이상 작가님에겐 항상 열려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후에 스케줄이 있어서 저녁에 들어갑니다. 시간이 맞으면 뵙지요.

    지금은 오후 두 시.

    만나지 못할 확률이 클 듯 싶은데.

    끼익-

    주차를 한 후, 차에서 내렸다.

    여전히 조용하고 고즈넉한 저택이다.

    벨을 누르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상 작가님?

    조인후 감독의 부인이다.

    “네. 맞습니다. 실례합니다.”

    -실례는요. 어서 들어오세요.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철컹, 하고 대문이 열린다.

    정원을 가로질러 부인이 마중을 나온다.

    우리는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양반한테 얘기 들었어요. 편하게 있다 가세요. 마실 걸 드릴게요.”

    “갑자기 들이닥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아버님 방은 작가님께서 물려받으셨는데요.”

    부인은 정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백화점에서 사 온 생과일음료를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수야 있나.

    “어머- 이런 걸 다. 감사해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우린 어느새 조인창 교수의 방 앞에 서 있었다.

    부인은 주방으로 가고, 나는 혼자 남았다.

    굳게 닫힌 문.

    “후우....”

    심호흡을 했다.

    이곳에 과연 답이 있을까.

    나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훅 불어오는 책 냄새.

    오래된 나무 냄새.

    희미하게 남아 있는... 사람의 냄새.

    천천히 걸어가서 그 방의 가운데에 섰다.

    나, ‘이상’에 대한 모든 자료가 모인 이곳.

    이곳이야말로 나의 창자가 또아리를 튼 곳.

    즉, 나의 뱃속이 아닌가.

    그 조용한 공간을 천천히 걸었다.

    산처럼 쌓인 책과 책 사이를,

    몇 바퀴고 몇 바퀴고.

    그렇게 몇 바퀴를 도는 동안,

    부인은 주스를 가져다주었고 나는 열댓 권의 책을 골랐다.

    <이상 김해경 평전>

    <이상의 비화>

    <시대의 외인, 이상>

    <일제강점기의 이방인들> 등등.

    조인창 교수의 원목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그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제 3자의 눈으로 본 ‘이상’들.

    나조차 잊고 지냈던 나의 삶.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나의 기억과 조금씩 다르긴 해도, 떠올려보면 떠올리지는 일화들.

    큰아버지의 집에 얹혀살던 일.

    건축기사로 일하며 ‘지루해 죽겠다’고 말한 일.

    때때로 기생들과 놀아난 일.

    씻지도 않은 봉두난발로 거리를 쏘다닌 일.

    나는 피식 웃었다.

    “...나도 참 사람 됐군.”

    남자와 도망간 여동생에게 ‘잘 살라’고 편지를 쓴 일.

    친구 김유정과 막역한 우정을 나눴지만...

    우리 둘 다 요절한 일.

    도망을 갔던 금홍1과 재회했지만...

    허무하게 안부만 확인하고 다시 헤어진 일.

    도쿄 거리를 홀로 걸어 다닌 일.

    나는 책을 덮었다.

    “....”

    잊고 있던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 외로움.

    내가 잃은 것은 가난도 폐병도 아니었다.

    환생을 한 후, 나는 외로움을 잃었다.

    곁을 지켜주는 믿음직한 지훈.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편안한 금홍.

    스승, 조인창.

    동료, 김미소.

    사람들의 관심과 성의, 등등...

    나의 인생은 반년 만에 급변했다.

    포만감이 느껴질 정도로 만족스러운 삶.

    당연히 ‘나’의 내면에 분열이 올 수밖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밖에.

    순간 머릿속에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얼른 펜과 종이를 꺼내 그것을 적었다.

    ‘분열. 두 개의 인생. 하나의 인간’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비로소 찾은 것 같았다.

    내 소설의 ‘키워드’를.

    종이 한가운데에 세로 선을 주욱 그었다.

    왼편에는 남자1의 인생을,

    오른편에는 남자2의 인생을.

    거침없이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남자1의 삶은 모든 것이 빈곤하다.

    돈도, 사람도, 사랑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건 외로움뿐이다.

    그는 외로움밖에 모르기에, 언제나 허기가 진다.

    남자2의 삶은 모든 것이 풍요롭다.

    돈도, 사람도, 사랑도 한순간도 비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건 외로움뿐이다.

    외로움을 모른다는 것이, 그에게 허기로 다가온다.

    남자1과 남자2는 같은 인물이다.

    다만 상황이 다를 뿐이다.

    이 두 남자의 서사를 마치 퍼즐처럼 엮어보자.

    두 남자의 움직임은 아주 바쁘다.

    다른 환경과 다른 조건.

    그러나 두 사람의 행동은 어딘지 비슷하다.

    묘하게.

    두 남자의 행동을 번갈아가며 장면화한다.

    남자1의 행동을 남자2가 이어받듯이.

    남자2의 행동을 남자1이 이어받듯이.

    중요한 건 연결.

    이 연결에서 나 ‘이상’의 스타일이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감을 느낀다.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두 남자는 사라지고 없다.

    나는 눈을 뜬다.

    “...됐다.”

    이젠 소설을 쓸 수 있겠다.

    그때였다.

    불현듯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놀랍게도 창밖은 이미 어둑했다.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일곱 시.

    소설 생각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구나.

    손도 대지 않은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가방에 종이와 펜을 밀어놓고 얼른 방을 나섰다.

    한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이 슬슬 희끗희끗해지는 남자.

    조인후 감독이었다.

    “작가님, 끝나셨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오래 있었죠?”

    “무슨 말씀을요. 밤을 새셔도 됩니다. 작가님 방인 것을요.”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어딘지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내 물음에 그는 멈칫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작가님. 식사부터 좀 하시겠습니까?”

    “음... 방금 주스를 마셔서요. 그리 배가 고프지 않은데요.”

    “그럼 저와 커피나 한잔하고 가시죠. 집에 보리로 만든 디카페인 커피가 있습니다.”

    그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도 조인후 감독이라면 얼마든지 좋았다.

    우리는 소파에 마주앉았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커피와 빵을 가져다주었다.

    “아, 원하신다면 술을 드릴까요? 좋은 와인이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술은 잘 하지 않습니다. 감독님께서는...”

    풍채만 보면 술을 아주 잘할 것 같긴 한데.

    “그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많이 마셨더랍니다. 그 덕에 집사람이랑 의사한테 많이 혼났죠. 지금은 금주 중입니다.”

    저런.

    그러고 보니 안색도 많이 안 좋다.

    “상심이 크신 모양입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제가 아버님을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 봅니다.”

    나 역시 그렇노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더 클 것 같아서.

    그는 손을 불안하게 놀리더니, 테이블의 담배를 잡았다.

    “죄송합니다만, 한 대만 태워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었다.

    “후우... 지금 제가 굉장히 안 되어 보이겠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상을 당하셨으니 그 마음이야 여북하시겠습니까.”

    “상도 상이지만 고민이 있습니다. 작품적으로요.”

    순간 흥미가 동했다.

    한국 최고의 예술영화 감독의 고민이라.

    “무엇입니까.”

    “작품이 써지질 않아요.”

    “영화 시나리오 말입니까?”

    “예. 저는 지금까지 시나리오 작가 없이 영화를 찍어왔습니다. 아버지와 대화를 하면 여러 영감이 쏟아졌거든요. 그것이 언제나 제 영화의 시작이었고요.”

    이 사람, ‘시작점’을 잃었군.

    저 방에 들어가기 전의 나와 닮았다.

    “혼자 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확신이 안 서는 것이겠죠.”

    “고통스럽죠. 그런 거.”

    “오늘도 시나리오 작가를 구하기 위해 미팅을 하고 오는 길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시나리오를 남에게 맡길 마음의 준비가 안 됐나 봐요. 계약을 못 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아주 답답해요.”

    그리고 또 한숨처럼 연기를 뱉어내는 것이다.

    “저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만... 교수님의 방이 도움이 많이 되던걸요.”

    “저 방이야 저도 들어가 봤지만...”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눈에 보일 듯했다.

    그가 조인창 교수의 책상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는 모습.

    그리고 터덜터덜 나오는 모습.

    “작가님도 글을 준비 중이신 모양이군요.”

    “네. 장편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소설가의 정수를 보여주시길 기대해야겠네요.”

    그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조인창 교수를 닮았다.

    “이상 선생이라도 영감을 얻어서 다행입니다. 저도 언젠가는 시나리오를 다시 쓸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겠죠. 충분히 마음을 다스리고 쉬실 시간이.”

    그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그래, 어떤 영감이 왔는지 얘길 들어봐도 될까요?”

    내는 내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을 풀어놓았다.

    아직은 거친 단계.

    그래도 말로 풀어내다보니, 머릿속 서사가 한층 정리가 된다.

    그는 어느새 몸을 내 쪽으로 쭉 빼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한 눈을 하고.

    내 입속으로 빠져들 것처럼.

    “...여기까지입니다.”

    그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더니,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그것 참... 참... 허허...”

    “어떻습니까?”

    “솔직하게 말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세상에. 질투가 날 정도예요. 그 정도로 멋진 이야기입니다. 특히 그 ‘연결’ 방식이요. 정말 잘 짜여진 퍼즐이에요.”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심이 되는군요.”

    빈말이 아니었다.

    조인후 감독의 영화는 대단하니까.

    해외 영화제에서 받은 상만 하더라도, 이 테이블을 가득 채울 거다.

    그는 내 이야기를 다시 곱씹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처럼... 우리는 언제 외로움의 구렁텅이로 빠질지, 또 언제 구원을 받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는 벌써 내 소설을 자신의 방식대로 의미화했다.

    확실히, 똑똑한 사람이군.

    “저는 이 소설을 구상할 때, 이런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남자2가 있는 곳은 안온한 안쪽의 세계. 남자1이 떠도는 곳은 매서운 바깥 세계라고요.”

    “확실히 그렇군요. 이를테면, 내인內人과 외인外人일까요.”

    이번엔 내가 흠칫 놀랐다.

    내인과 외인.

    내인과 외인.

    그 말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저... 괜찮다면 방금 말씀하신 걸 제 소설의 제목으로 정해도 되겠습니까?”

    “네?”

    “<내외인>. 내외인이란 단어가 생각이 났습니다.”

    내외인이란 단어는 없다.

    즉, 그 역시 소설과 호응하는 일종의 퍼즐.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단박에 내 의도를 이해한 것이다.

    “...멋집니다. 정말...”

    그가 말끝을 흐리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나는 멈칫했다.

    혹시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안 그래도 작품의 난항을 겪는 사람이다.

    성급하게 들떠버린 걸지도.

    그러나 그는 어느새 단단한 눈으로 날 봤다.

    “이상 작가님. 감사합니다.”

    “네?”

    “작가님이랑 대화를 하니... 작가님의 작품에 이렇게 빠져들고보니, 저 역시 가슴 속에서 뭔가가 들끓는 듯합니다.”

    그의 얼굴에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돌았다.

    “오늘 밤은, 뭐든 쓰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아요. 이런 기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이에요.”

    조인후 감독의 집을 나올 무렵.

    그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좋은 작품 기다리겠습니다.”

    “감독님도요. 좋은 작품 쓰시리라 믿어요.”

    우리는 손을 꽉 잡았다.

    연희동을 벗어나는 길.

    나는 가슴이 간만에 후련해진 걸 느꼈다.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어서 가서 소설을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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