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 3849350
#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46) - 수정완료
다시 사는 천재 작가 46
인간의 삶을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해보자.
단편 소설이란 나무를 자르는 일이다.
그 잘린 단면을 보여주며 인생을 상상하게 한다.
장편 소설은 한발 물러나 나무를 그리는 일이다.
뿌리와 기둥의 연결, 기둥과 가지의 연결, 가지와 나뭇잎의 연결을 보여준다.
이 연결을 다른 말로 ‘서사’라고 한다.
단편 소설이 작가의 스타일을 보여준다면,
장편 소설은 작가의 삶을 담는다.
작가가 보는 ‘나무’는 결국 자기 자신이니까.
많은 작가가 살면서 한 번은 장편을 써보려 한다.
자기를 보여주는 일.
작가에게 이보다 더 매혹적인 작업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실패했다.
전생에 한 번도 장편을 써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길게 쓴 소설이라 하면...
<12월 12일>이라는 중편.
장편을 쓰지 못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전생의 나는 시 쓰기에 빠져 있었다.
둘째, 나는 서사보다는 수학적이고 난해한 것에 끌리는 취향이다.
셋째, 무엇보다도 나는... 가난했다.
장편 소설은 오래 달리기와 같다.
순간의 열정으로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돈과 건강 없이는 절대 해낼 수 없는 일.
가난한 폐병쟁이였던 나.
장편 소설은 내게 꿈과 같았다.
언젠가 나만의 장편 소설을 쓰리라 다짐했지만...
죽음이 나를 먼저 데려갔다.
문학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는 지금.
지금이 바로 장편 소설을 쓸 때다.
내 삶의 서사를, 나의 언어로 구축한 소설 말이다.
나는 백지를 앞에 두고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 매일 밤 백지를 남기고 잠들었다.
섣불리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완벽한 글감을 찾을 때까지.
***
오늘 오전,
<거울, 인간>의 번역이 끝났다.
도마크 출판사 메일로 원고를 보냈다.
도마크의 SNS가 바로 움직였다.
도마크의 모든 계정에 올라온 글.
[한국의 천재 작가 ‘이상’의 미공개 특전, <거울, 인간>! 일본의 대 작가 무라카미 히루키의 추천사와 함께!]
지훈은 SNS 페이지들의 결과를 분석했다.
“반응이 엄청난데요? 도마크의 다른 게시글에 비해 좋아요와 공유가 세 배는 돼요. 반 정도는 히루키 효과일 테고... 재일교포들이랑 한국인들도 가세했을 거예요. 발매일은 언제예요?”
“다음 주. 에세이는 일찍이 편집을 마쳤을 거야. <거울, 인간>도 편집만 마무리하면 바로 인쇄에 들어가겠지.”
“크으...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놀랍게도, 지훈의 말은 현실이 됐다.
<다시 사는 일> 발매가 앞당겨진 것이다.
그날 저녁, 미쯔하루 편집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상 작가님. 밤늦게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빨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이상 작가님 에세이집에 대한 SNS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예약 권수가 초판 1쇄의 반에 다다랐습니다.
“네? 하하... 홍보가 제대로 먹힌 모양이군요.”
시작이 좋다.
이렇게 순탄하게 10쇄까지 갔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말입니다.
“네.”
-책 발간을 일주일 당겨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중입니다.
“일주일이나요? 하지만 책 제작에 들어가는 물리적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타이밍이 마침 좋습니다. 지금 도마크 출판 공장에 급한 건수가 없어서 <다시 사는 일>에 동력을 쏟아 부을 수 있거든요. 빨리 편집과 교정을 보고 바로 일을 진행할까 싶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십시오. 저희 쪽에서도 홍보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이상 작가님.
“네. 편집장님.”
-이상 작가님의 <거울, 인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어떻던가요? 일본인의 눈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습니다. 역사란 뭘까... 인간이란 뭘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거울을 보는 것처럼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아주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말없이 웃었다.
소설의 의도가 정확히 먹혔을 때.
작가에게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은 없다.
미쯔하루 편집장의 말은 현실이 됐다.
그 주의 마지막 토요일.
<다시 사는 일>은 일본 전역으로 판매됐다.
가만히 있을 히루키가 아니었다.
그는 나와 <다시 사는 일>을 태그하여 짹짹이에 글을 올렸다.
-이 소설, <거울, 인간>. 첫 장을 읽는 순간 작가가 한국인임을 잊게 되고 마지막 장을 읽을 땐 당신이 일본인임을 잊게 될 것.
<거울, 인간>을 완벽에 가까이 이해한 글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런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
내가 퇴근 후에도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이유.
장편 소설 때문이다.
내 삶을 관통하는 장편 소설의 ‘서사’.
그것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12월 12일>은 어땠더라.
이국생활의 가난을 벗어나고자 애쓰는 남자의 이야기.
가혹한 운명을 벗어나려는 그의 시도는 끝내 실패한다.
마치 나의 삶처럼.
이 중편 소설을 쓸 땐 결핍이 너무 많았다.
가난, 인정 욕구, 애정 결핍...
공허한 내 내면을 채우듯 미친 듯이 써내려갔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내면.
결핍이 좀처럼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쓰기가 어렵다.
칸막이 없는 자유 열람실.
내 테이블엔 세계 각국의 장편 소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한국의 등단제는 단편 위주.
문창과 학생인 혜경의 독서 역시 단편에 치우쳐져 있다.
장편에 대한 지식이 단편보다 부족한 당연한 일.
지난 80여 년간 생산되어 온 뛰어난 장편 소설들.
나는 그것을 들이마시듯 읽어대고 있었다.
혹시 그 안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해서.
머릿속에 지식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온다.
하지만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
백지 상태인 내 장편에 대한 답을 주진 않는다.
“형.”
누가 열람실에서 목소리를 내?
고개를 들어보니 지훈이 있다.
이놈 보기보다 매너없다.
“쉿.”
“아무도 없어요. 시험기간도 아닌데 누가 아홉 시 반까지 열람실에서 책 봅니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게. 어느새 나 혼자다.
“으으- 죽겠다.”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테이블에 웬 과자와 음료수, 초콜릿, 메모지들이 한가득이다.
“뭐야, 이거. 네가 갖고 온 거야?”
물으니 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날 본다.
“...형이 받은 선물도 모르면 어떡해요?”
그리고 메모지 몇 개를 내게 내민다.
-이상 작가님, 맞죠?ㅎㅎ 혹시 신작? 파이팅!
-팬입니다, 형님. 건필하십쇼.
-꺄아~ 작가님! 도서관이라 아는 척도 못 하고 쪽지만 남겨놓고 가요. 초콜릿 드시고 힘내세요.
“...전혀 몰랐는데.”
지훈이 의자를 드륵 끌어 내 앞에 앉는다.
“인기인은 좋-겠네요. 앉아만 있어도 이렇게 공양이 들어오고.”
나는 초콜릿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당이 차오른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못 먹었네.
“나머진 너 먹던가.”
“이 형이 진짜...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지훈이 그만하자는 듯 손을 휘휘 젓는다.
그래놓고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기는.
“요즘 유난히 사람들이 알아본단 말이야.”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주전부리가 쌓이고,
카페에 앉아 있으면 마카롱이 쌓인다.
“형이 장편에 심하게 집중하는 것 같아서 제가 며칠 브리핑을 건너뛰었더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죠. 형 요즘 인터넷 안 하죠?
“어. 핸드폰도 끄고 다니는데.”
장편 소설에 집중하고 싶어서 말이다.
지훈은 보란 듯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냈다.
저번 달 월급으로 산 아이패드.
지훈은 유튜브 앱에 접속해 한 영상을 튼다.
“이게 뭔데? 일본 뉴스?”
“보시면 압니다. 사흘 전 뉴스에요.”
사흘 전이라면... <다시 사는 일> 발매일이잖아?
일본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의 인기 작가 이상의 에세이 <다시 사는 일>의 초판을 구매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일본의 시민들이 서점 앞에서 줄을 서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아직 푸른 새벽, 사람들은 서점 앞에서 가지런히 줄을 서 있었다.
-<다시 사는 일>의 1쇄의 반은 예약만으로, 나머지 반은 당일 아침에 모두 팔려버렸습니다. 한국 작가의 책이 불러일으킨 이례적인 열풍. 인터뷰를 통해 그 현장을 느껴보시죠. 이토 기자?
-네, 이토 기자입니다.
마이크를 든 기자가 줄을 선 여학생에게 묻는다.
-지금 누구의 책을 사기 위해 줄을 선 건가요?
-한국의 이상 작가의 책을 사기 위해서예요.
-특별히 이상 작가의 책을 기다린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히루키 작가가 극찬한 작가이기도 하고, SNS를 통해서 본 이상 작가의 행보가 너무 재밌고 멋져서요. 벌써 팬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기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묻는다.
-이상 작가에 대해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요?
-그가 홈페이지에 소설을 연재할 때부터요.
-원래 한국 소설에 관심이 있었나요?
-아뇨. 전혀요. 그런데 친구가 재일교포라, 그의 홈페이지를 접하게 됐어요. 그리고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그런 소설도 있구나... 싶어서요.
-초판본을 굳이 사시려는 이유는요?
-그는 앞으로 더 유명해질 테니까요. 초판본을 갖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홈페이지로도 그의 에세이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특전으로 된 소설은 책으로만 볼 수 있거든요. 나중에 홈페이지로도 풀린다고 하지만... 소장의 가치라는 게 있잖아요. 또, 히루키 작가의 짹짹이를 보면 음... 한일 간의 미묘한 감정을 멋지게 다룬 소설일 것 같아요. 기대돼요.
장편 소설로 은근히 쌓여 있던 고민들.
이들의 인터뷰로 한 번에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할머니부터 남중생까지.
다양한 독자들이 내 책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아, 이거.”
“이미 캡쳐해서 커뮤니티에 가져다 날랐습니다.”
“...그래서, 잘했다고.”
“이것도 날랐지요.”
지훈이 몇 개의 사진을 동시에 띄운다.
그것은... 한국 언론의 기사들이었다.
<한국 문단의 풍운아, 일본 독자들을 사로잡다>
<이상의 에세이, 일본의 베스트셀러로?>
<한국 문단은 언제까지 이상의 성공을 외면할 것인가>
<이상 붐, 한국으로 역수입?>
“넌 정말 이 시대의 인재다, 송지훈.”
“크흠... 형, 이렇게 일 잘하는 동생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죠.”
“부탁?”
“일주일 후에 논문 발표회 있잖아요. 같이 좀 가주시면 안 돼요?”
“아, 너 예비발표지?”
안 될 건 없다.
송지훈은 대학원 아웃사이더.
같은 아웃사이더인 내가 가줘야지.
“그래. 가줄게.”
“정말요? 아싸!”
“안 가줄 줄 알았어?”
“아니, 이현강 교수도 올 테니까요. 오희라 선배가 이번에 본발표를 하거든요. 신경 쓰이시면 안 오셔도 되고요.”
“됐어. 오건말건 상관없어.”
이현강이야 당연히 오겠지.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것보다, 오희라가 논문을 썼다고?
그게 더 놀랄 일이군.
***
집으로 돌아온 후.
간단한 운동 후 샤워를 했다.
고민이 많아서 그런지, 머리가 개운하지 않다.
현관에서 들고 온 택배를 다시 자세히 살폈다.
하나는 일본에서 온 국제 택배.
“이게 이제야 왔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일본판 <다시 사는 일>이었다.
서른 권쯤 보내줬군.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예뻤다.
앞면은 부드러운 파스텔 블루.
뒤쪽은 같은 채도의 먹색이었다.
표지의 글자는 모두 흰색.
마치 파도와 조약돌을 보듯 마음이 평안해지는 디자인.
내가 일본에서 첫 책을 내다니...
사람 일이란 참 모를 일이다.
<다시 사는 일>을 책장 한가운데에 꽂아놓았다.
그리고 다음 택배.
신라문학에서 온 것이었다.
...혹시?
바로 포장을 뜯었다.
들어있는 것은 역시나.
조인창 교수의 <위대한 문학에 대하여>
조인창 교수의 유작이 세상에 나왔다.
물론, 이미 읽은 원고였다.
하지만 침대에서 한 번 더 그 내용을 훑어보았다.
장편 소설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었을지도.
조인창 교수가 살아있었다면, 분명 물었을 테니까.
“자아... 전 어떻게 할까요, 교수님...”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문장 좋네.”
한 장 한 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을 무렵.
나는 한 문장 앞에서 멈칫했다.
-문학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창자를 파보이는 일이다.
작가 자신조차 몰랐던 바로 그 내면을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란 반드시 해체되어야 하는 존재다.
그것이 겁이 난다면 소설을 쓸 수 없다.
특히나 삶이 서사를 여실히 보여줘야 하는 장편 소설은 더더욱.
“...!”
창자를 파보이는 일.
그 문장을 보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한 장소가 떠올랐다.
그래. 내겐 내 뱃속 같은 곳이 있지 않은가.
나는 급히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이상입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혹시 내일 ‘그 방’에 가도 되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