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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46화 (46/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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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45) - 수정완료

    다시 사는 천재 작가 45

    <거울, 인간>

    일본에서 발간될 에세이에 덧붙여질 단편 소설.

    나는 그것을 단숨에 써 내려갔다.

    한국의 독자에게만 통하거나,

    일본이 독자에게만 통하거나.

    그렇게 독자의 한계를 짓는 글을 쓸 생각은 없다.

    내 소설은 인간 그 자체에게 통할 테니까.

    사흘 후,

    인문대 교학팀 사무실.

    나는 비로소 <거울, 인간>을 완성했다.

    명실상부 내 소설의 제1독자, 지훈.

    나는 지훈에게 <거울, 인간>의 출력본을 줬다.

    지훈은 <거울, 인간>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걸... 3일 만에 썼다고요?”

    “응. 그렇게 됐어.”

    “미쳤어요, 진짜, 형은....”

    지훈은 <거울, 인간>을 다시 봤다.

    심각한 얼굴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어때? 비평가가 보기엔.”

    “...어떻긴요.”

    지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완벽하죠. 아주 매끈한 소설이에요. 잘 빚어지다 못해 유약을 듬뿍 발라서 빛나는 것 같아요.”

    “그럴 거야. 인물들의 개인 정보는 하나도 나오지 않고 대화로만 이루어졌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이 대화를 통해서 독자는 역사관과 삶을 떠올릴 수도 있고요.”

    지훈은 내게 출력본을 건네주었다.

    “도마크 출판사로 보내셔도 좋겠어요. 일본인들은 복 받았네요. 그런 소설을 제일 먼저 보다니.”

    그렇게 따지면 가장 복 받은 건 지훈이 너 아니냐.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말았다.

    믿을만한 제1 독자가 있다는 건 작가로서 행운이다.

    비평가 송지훈은 매니저 송지훈만큼 쓸모가 좋다.

    고마 신사에서 팔방미인이 되겠다며 부적을 사더니.

    그 소원의 덕을 내가 보고 있다.

    이제 남은 건...

    <거울, 인간>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

    그리고 그걸 도마크 출판사로 보내는 일.

    “혜경 샘. 택배 왔네요?”

    택배를 정리하던 금홍이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두툼한 서류 봉투.

    “저한테요?”

    나는 서류 봉투를 받아들었다.

    발신인 란에 ‘김미소’라는 이름이 있었다.

    혹시...?

    얼른 봉투를 뜯었다.

    갓 찍어낸 새 책 냄새.

    전생이나 지금이나, 나는 이 냄새를 좋아한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역시나 한 권의 잡지였다.

    그녀가 만들었다던 노동문학 계간지 창간호.

    이름은 <노문>

    반가운 마음의 목차와 내용을 살펴봤다.

    한국 노동문학의 역사와 그것의 세대별 의미.

    오늘날 노동문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

    노동 현장을 담은 사진들.

    ... 등등에 이어,

    “나왔다.”

    김미소 작가의 소설, <하이에나>

    나는 그 소설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육체노동자이자 정신이상자인 60대 남성.

    낮에는 고물상에서 고물을 분리하고,

    밤에는 쓰레기장에서 먹을 것을 찾는다.

    그리고 묘하게 중첩되는 두 행위.

    노동을 통한 ‘먹음’과 정신이상자의 ‘아귀’같은 행동.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소설.

    ...역시, 멋지다.

    김미소 작가.

    이 작가도 언젠가 꼭 빛을 봐야 할 텐데.

    ***

    나는 합정동 신라문학 본사 앞에 서 있었다.

    한국 문단의 청탁을 공개적으로 거절한 후,

    출판사와는 그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다.

    그런 내가 신라문학 같은 대형 출판사에 올 줄이야.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가만히 보았다.

    이 안에 들어있는 건 조인창 교수의 마지막 원고.

    이준환 편집위원에게 전화는 해 둔 상태다.

    원고를 직접 가져다준다고 말하자, 그는 굉장히 기뻐했다.

    회전문을 돌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 한쪽엔 신라문학에서 운영하는 카페가, 중앙에는 넓은 계단이 있었다.

    신라문학 사무실은 2층이었다.

    2층에 올라가 반투명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그때였다.

    사무실의 모든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날 봤다.

    ...엄청난 정적.

    동그랗게 뜬 눈들.

    긴장과 신기함이 섞인 표정들.

    ...미어캣들인가.

    “...원고를 드리러 왔습니다만. 이준환 편집위원님 계십니까?”

    “이, 이리 오세요. 편집위원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직원 하나가 나를 얼른 안내했다.

    내가 복도를 걸어가자,

    사람들의 시선도 나를 따라 움직였다.

    “왜 다들 저를 저렇게 보시죠?”

    “이상 작가님이잖아요.”

    하고 직원이 씨익 웃었다.

    그는 나를 복도 끝 사무실로 들여보냈다.

    이준환 편집위원과 그와 동년배로 보이는 남자가 마주앉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상 선생.”

    “또 뵙습니다. 편집위원님.”

    우리는 악수를 했다.

    그는 남자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박조운 편집장입니다. 나와 함께 신라문학을 창립한 멤버 중 한 명이죠.”

    두 사람은 퍽 편해 보였다.

    편집장과 편집위원은 그저 직함뿐이라는 듯.

    오랫동안 이 출판사를 이끌어 온 동료일 테지.

    “...박조운이요.”

    “이상입니다.”

    부리부리한 인상.

    작은 키에 땅땅한 체격.

    ‘고집’이라고 적혀 있는 듯한 얼굴.

    난 일단 이준환 편집위원을 향해 돌아섰다.

    “편집위원님. 말씀드렸던 것처럼, 조인창 교수님의 원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이쿠. 고맙습니다, 이상 선생.”

    “마지막 문장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제가 마무리했습니다. 그 부분은 별도로 표기를 했으니 신라문학 쪽에서 잘 기재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귀한 원고로군요.”

    그는 서류 봉투를 서랍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럼 저는 원고를 전해 드렸으니...”

    “아, 이상 선생. 이왕 오셨으니 커피나 한잔 하고 가시지요.”

    “그래요. 긴히 상의드릴 것도 있소만.”

    박조운 편집장도 날 붙잡았다.

    긴히 상의할 것?

    신라문학이 내게?

    나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이준환 편집위원은 캡슐머신에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박조운 편집장은 날 빤히 보았다.

    “그러니까, 그쪽이 그 유명한 이상 선생이다- 이거군.”

    “예. 제가 이상이 맞습니다만.”

    “당신을 두고... 준환이, 우리가 한 반년쯤 싸웠나?”

    박조운 편집장이 이준환 편집위원에게 물었다.

    커피를 내리던 이준환 편집위원이 말했다.

    “그쯤 됐지. 그리고 자네가 졌어.”

    “흥.”

    박조운 편집장은 툴툴거렸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반 이상 파의 수장이시군요.”

    내 말에 그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준환 편집위원이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맞아요. 저이 고집이 쇠심줄이거든.”

    알 만하다.

    한 분야에 평생을 바친 원로의 고집.

    원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준환 편집위원처럼 생각이 유연하고 진보적인 타입.

    박조운 편집장처럼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타입.

    전자는 세상의 박자에 맞춰가는 데에 용이하고,

    후자는 소중한 가치를 지켜가는 데에 용이하다.

    “...쇠심줄은 무슨. 난 인정해. 길고 긴 토론 끝에, 내가 졌소.”

    “그런데, 지다뇨?”

    “이준환 편집위원을 필두로 많은 이들이 그러더군. 이제 문단도 변할 때가 됐다고. 청탁과 계간지 시스템은... 작가들을 힘들게만 할 뿐이라고 말이오.”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상 당신이 한국 문단의... 롤 모델이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소.”

    ...뭐, 듣기는 좋군.

    롤 모델이라.

    그나저나 어떤 ‘롤’을 염두에 두기에?

    이준환 편집위원이 말했다.

    “우리가 이상 작가를 좀 따라 하려고 합니다.”

    “네?”

    “<신라문학>이 운영하는 웹진을... 작가들이 자유로이 글을 올려 판매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운영해보려 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대형 출판사들은 웹진을 하나씩 끼고 있다.

    하지만 충분히 상용화되지 않는 실정.

    “저의 홈페이지를 벤치마킹하셨군요. 하지만 초기에는 손해를 많이 보실 텐데요? 수수료라도 받으실 건가요?”

    “작가에게는 아주 조금만 받으려 해요. 지금은 일종의 실험 단계니까요. 계간지도 웹진의 형식으로 함께 올라갈 겁니다.”

    “하긴. 이런 실험을 하려면 신라문학 정도의 체급은 되어야 하겠죠.”

    군소 출판사들은 시도하기도 힘든 실험.

    이들 원로들도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고 있다.

    “우리로선 모험입니다. 물론 출판사 격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

    박조운 편집장이 말했다.

    “하지만... 길게 보기로 했소. 한국 문단의 내리막길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면 뭐든 할 거요.”

    그의 말이 맞는다.

    한국 문단에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

    작가가 청탁과 관계없이 글을 팔 수 있는 판로.

    동시에 출판사가 글을 팔 수 있는 판로.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나쁘지 않은 실험.

    “좋은 생각이십니다. 응원하겠습니다.”

    “아직 얘기가 끝난 게 아니오.”

    박조운 편집장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준환 편집위원이 이번 계간지 여름 호에 지난 반년의 회의록을 넣는다고 말했죠?”

    “들은 바 있습니다. 저의 행보를 지지한다는 글 말씀이지요.”

    “맞소. 플랫폼을 만드는 것과 연장선상이지. 그 글 역시 플랫폼에 웹진의 형식으로 올라갈 거요.”

    그는 검지를 들어 올렸다.

    나는 그 부리부리한 눈에 대고 물었다.

    “편집장님은... 정말,... 진심으로 절 지지하시는 겁니까?”

    사람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가.

    그는 평생을 한국 문학에 몸담은 사람이다.

    나는 분명 눈엣가시 같은 신인이었을 텐데.

    그가 검지를 접고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성격은 좀 괴팍하고 고집은 세도... 현실 파악은 제대로 하는 사람이오. 한국 문단에 대한 당신의 판단... 마음 아프지만, 당신이 옳아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에게 글을 한 편 줄 수 있겠소?”

    글을 달라고?

    “지금 청탁을 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이상 선생.”

    이준환 편집위원이 끼어들었다.

    “청탁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 만들 플랫폼에 소설을 한 편 올려줬으면 해요.”

    “네?”

    “시간은 충분합니다. 오픈은 한 달 이상 남았으니까요.”

    청탁과 비슷하지만, 묘하게 다른 제안.

    신라문학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글을 내보이지만...

    원고료가 아닌 독자들의 결제료를 받는 시스템.

    “신라문학이 플랫폼을 만들면 많은 작가가 글을 올릴 겁니다. 굳이 저여야만 하는 이유가...”

    이준환 편집위원은 고개를 저었다.

    “다르죠. 이상 선생이 글을 싣는다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상징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이상이 글을 싣는 플랫폼.

    새로움을 ‘상징’하면서도 여론의 관심을 이끄는 ‘사업’적 가치가 있단 뜻이로군.

    하긴. 출판사도 어쨌건 사업이니까.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무리 온라인일지라도 대형 출판사와 손잡는 것.

    이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이들은 분명 있을 거다.

    예컨대 가라사대라던가.

    하지만 이들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고 싶기도 했다.

    또, 내가 힘을 실었을 때,

    이 문단에 어떤 변화가 찾아오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좋습니다. 글을 올려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이준환 편집위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요?”

    “저의 홈페이지에도 동시에 글을 올리게 해주십시오.”

    “마음대로 하시오. 상관없소. 당신이 글을 올리는 것 자체가 중요하니까.”

    박조운 편집장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 쳤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최소 여덟 편에서 최대 열 편을 올릴 생각입니다.”

    사무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루에 한 편씩, 연달아서요.”

    이준환 편집위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박조운 편집장은 자신이 들은 걸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소?”

    “오래전부터, 장편 소설을 써보고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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