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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43)
다시 사는 천재 작가 43
“저, 신라문학의 이준환 편집위원입니다.”
네모난 무테안경을 낀, 상당히 멀끔한 신사.
나이는 일흔쯤 되었을까.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다음에 또 뵙죠.”
김미소 작가가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가 떠나고, 이준환 편집위원이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짤랑...짤랑...
동전이 떨어지고 커피가 나오는 소리.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이상 선생.”
“그러시죠.”
“감사합니다.”
그는 자판기 커피를 한 손에 쥐고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라문학의 편집위원.
명실상부한 한국 문단의 권력자 중 한 명.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사람들이...”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책을 읽지 않아요.”
생각지도 못한 말.
동시에... 맞는 말.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는 더 읽지 않겠죠.”
“...동의합니다. 편집위원님.”
“저희 세대의 탓일까요.”
“그렇습니다.”
“....”
“다른 이유들도 있겠으나... 일단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준환 편집위원이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 선생. 가능하다면 좀 더 이야기를 들어봐도 될까요.”
“...별로 듣고 싶지 않으실 이야기일 텐데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들을 필요가 없는 말.
그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한국문학의 황금기를 누렸을 것이다.
이야기를 찾는 사람들이 문학을 즐겨 읽던,
즉, 문학이 대중콘텐츠였던 그 시대.
그는 이제 은퇴하면 그만이다.
과거의 영광을 안고 여생을 잘 보내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건...
일말의 책임감일까.
“저는 알고 싶습니다. 가장 뜨거운 젊은 작가들의 생각이요.”
이준환 편집위원이 말했다.
“나이가 들고 그럴듯한 자리에 오르면, 아무도 그런 얘길 해주지 않거든요.”
“재차 말씀을 드리지만, 기분이 나쁘실 겁니다. 저를 건방지다 생각하실 테고요.”
“저희 세대의 잘못이라면 욕을 먹어야 마땅하지요.”
나는 그를 빤히 봤다.
그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속는 셈 치고, 쌓아놨던 말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문학의 황금기를 누리셨던 시절에... 선배님들은 예측하셨어야 합니다. 시대가 변하리라는 걸요. 사람들이 책을 읽는 게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올 거라는 걸요.”
“....”
“미래에 대한 예측 없이 낡은 시스템에만 의존한 결과가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으니 문학 계간지가 잇달아 폐간하고, 청탁을 줄 수 있는 출판사가 줄어들고... 그러니 젊은 작가들은 더욱 청탁에 목메게 되지요. 자신의 글을 내보일 수 있는 시스템이 다양하지 않으니까요. 윗세대의 게으름의 여파를, 지금 오롯이 젊은 세대가 지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내내 진지하게 내 말을 들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적어도 오늘날 한국 문학의 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걸.
“...또 다른 문제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상 선생.”
그는 또 물었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시대의 강력한 변화입니다. 온갖 대중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는 세상이죠. 특히 영상에 비해 문자는 자극성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대중적 수요만 두고 따지면 순문학과 대중문화는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독서량이 많이 떨어진 추세이고요. 어쩔 수 없는 흐름도 없지 않다는 겁니다. 다만... 예상을 했다면 어떤 방법으로건 이 흐름에 맞설 수 있었겠죠.”
“동의합니다... 말씀하신 것 모두.”
이준환 편집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세대는 늑장을 부렸습니다. 세상이 변할 거란 예상을 왜 못했겠습니까. 다만, 이렇게 말씀드리면 변명 같겠으나... '독자'를 믿었다기보단 ‘문학’을 믿었던 거지요. 좋은 문학이 존재하는 이상 독자도 남아있을 것이다, 우린 장사꾼들이 아니니 상업성에 목메어서는 안 된다... 돌이켜 보면... 참 나이브한 발상이었지요.”
안다.
좋은 문학가들은 대부분 순진하다.
그저 좋은 글을 쓰면 다인 줄만 아는.
상업적인 머리를, 독자를 끌어 모으려 머리를 굴리는 것을 터부시하고.
“이상 선생, 당신이 등장하고 이제 반 년 정도가 되었죠? 우리 신라문학이 당신과 관련한 이슈에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아 서운했을 겁니다.”
“서운하기보단... 궁금했습니다.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건지. 동의도, 비판도, 비난도.”
“그동안 우리 내부에서 계속 회의가 있었다고 했죠?”
저번 통화에서 그가 내게 한 말이었다.
“우리끼리 참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점점 작아지는 문학 시장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당신이 등장했으니까요. 누군가는 당신의 발언에 동의를 표해 힘을 싣자고 했고, 누군가는 혈기 넘치는 신인만 믿고 총대를 멜 수 없다고 했습니다. 긴 싸움이었습니다. 신라문학은 나이가 많은 출판사입니다. 늙은이들 고집이란 이만저만 아니니까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런 회의가 계속되고 있었다니.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게 아닌가, 이들도.
“그리고 이제야... 결론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바뀌어야겠습니다. 저희부터라도.”
“...바뀐다 하심은,”
“당신의 말에 동의를 표할 겁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건요. 당신의 책을 내도 좋고, 인터뷰를 해도 좋고... 가장 먼저, 우리의 회의록을 모아서 어떤 과정을 통해 당신에게 동의하게 되었는가를 밝힐 겁니다.”
신라문학이 나를 지지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한국 문단에서의 고립도 어느 정도는 해결되겠지.
하지만 이 일은 오히려 신라문학을 문단에서 고립시킬 수 있었다.
특히, 가라사대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텐데.
“힘을 실어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나, 손해를 보실 텐데요.”
이준환 편집위원은 읏샤, 하더니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우리 세대의 책임이니 손해는 감수해야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상 선생의 일본 인터뷰를 보고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한국 문단을 밀어내기도 했지만, 우리 역시 당신을 밀어냈다는 것을요.”
솔직히 말하면... 이건 엄청난 기회였다.
신라문학의 저명한 비평가들과 문학 연구자들, 그리고 출판 기획자들...
그들이 내 편이 되어준다고?
“힘든 일이 되리란 거, 압니다. 하지만 이 일을 후배 세대에게 넘겨버릴 만큼 뻔뻔하진 못해서요.”
그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다 늙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힘이 남아있습니다. 이 문단에서 은퇴하기 전에, 남은 힘을 제대로 써봐야지요.”
나는 그를 따라 일어섰다.
창을 통해서 따뜻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죠. 말씀드렸던 것처럼 신라문학의 여름호 계간지에는 이상 선생에 대한 내부의 회의록을 실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 편집위원 선생님들의 언쟁이라. 기대가 되는군요.”
나는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래.
이들의 믿어보고, 지켜보자.
그들이 내게 한 발 다가와준 것처럼.
“편집위원님. 저는 그래도 한국 문학에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슬슬... ‘문학의 붐’이 일어날 가능성이 보인다는 겁니다.”
이준환 편집위원은 활짝 웃었다.
“그것 참 반가운 말씀입니다.”
***
추도식이 다 끝나고 지훈과 회랑을 나섰다.
사람들을 피해 다니느라 외진 뒷길을 통해 몰래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혼자 기다리느라 심심했지? 뭘 하고 있었어?”
“친한 비평가 선생님들이랑 얘기했어요.”
“벌써 친구가 생겼어?”
지훈은 친화력, 대단하다.
난 김미소 작가밖에 모르는데.
그것도 깍듯하게 존대하는 사이.
아, 그리고... 이젠 이준환 편집위원도 알게 됐군.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조인창 교수님 얘기도 하고... 형 얘기도 했어요.”
“내 얘길? 그런 걸 왜 해.”
“튕기지 말아요. 그 사람들 딴 데서 만나도 형 얘기밖에 안 한대요. 출판사에서 그런 글을 못 싣게 해서 그렇지.”
알 만하다.
이런 얘길 들으니 이준환 편집위원과의 대화가 더 절박하게 다가온다.
그때였다.
“이상 작가님!”
익숙한 목소리가 날 불렀다.
검은 양복을 입고 상주 완장을 찬, 조인후 감독이었다.
“감독님.”
“하이고... 한참 찾았습니다. 왜 이런 외진 곳으로 다니십니까.”
그는 그 큰 덩치로 헉헉거렸다.
그래도 그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였는지, 한결 마음이 편해 보였다.
그는 양 손으로 내 손을 꽉 쥐었다.
“추모사를 맡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려고요.”
“바쁘신 중에... 전화로 말씀하셔도 됐을 텐데요.”
“그것 말고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사실, 아버님의 유산에 관한 겁니다.”
“유산이요?”
“어어... 저는 자리를 좀 피할게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지훈이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조인후 감독이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돈에 관한 게 아니라서요. 괜찮습니다.”
나와 지훈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떤...?”
“음...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혹시 지금 시간이 되십니까?”
“아, 예. 됩니다.”
직접 봐야 할 유산? 그게 대체 무엇일까.
“그럼 연희동의 아버님 댁에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요?”
“예.”
“하지만 가족 분들이 다 여기 계신 걸요. 빈 집에 제가 어떻게...”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계셔서 괜찮습니다. 이미 말씀도 드려 놨고요.”
조금 당황스러웠다.
조인후 감독이 나를 다시 설득했다.
“들러주십시오. 일단 가시면 아주머니께서 안내를 해주실 겁니다.”
***
그렇게 지훈과 나는 난데없이 조인창 교수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연희동 언덕을 운전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연희동이군요. 동네 좋네...”
“교수님 댁은 좀 더 올라가면 있어.”
“알겠어요, 형. 그런데 유산이라는 게 대체 뭘까요.”
“글쎄다. 워낙 알 수 없는 양반이라서 말이야.”
그 사이 차는 익숙한 저택 앞에 멈췄다.
“형 다녀오세요.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먼저 가도 돼.”
“바쁜 일 없어요. 다녀오세요. 길도 넓어서 차 세워놔도 될 것 같아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그렇게 말하곤 저택의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저... 이상이라고 합니다.”
-아, 네! 들어오세요.
삐익-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내가 기척을 내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단정한 차림의 아주머니가 날 맞이했다.
“오셨군요.”
아주머니는 웃고 있었지만 눈가가 붉었다.
아마 조인창 교수의 죽음 때문이겠지.
“따라오세요.”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서 거실을 지나 조인창 교수의 방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시면 돼요.”
“저 혼자 들어가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아주머니는 한 번 웃어보이곤 자리를 떠났다.
문득, 처음으로 조인창 교수를 보러 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이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이 방 앞에 섰던 것 같은데...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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