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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42화 (4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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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41)

    다시 사는 천재 작가 41

    정신없는 와중에도 할 일은 넘쳐났다.

    새로운 소설에 대한 고민,

    간간히 오는 강인춘 PD의 사소한 대사 수정 부탁,

    ‘잡문’ 아니 이제는 ‘에세이’ 퇴고,

    그리고 한국대 특강.

    일본에서 돌아온 후,

    한국대 인문대 지하 대강당은 인산인해가 됐다.

    자리가 가득 찬 건 물론,

    계단은 물론이고 단상 앞 바닥에도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대학생이 아닌, 나이가 너무 적거나 많은 사람들.

    듣기론 외부 사람들도 도강을 하러 온 것 같다고 했다.

    차 조교는 말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불편하시면 저희 측에서 학생증 검사해서 들여보낼게요.”

    “아니에요. 강의 도둑은 도둑도 아니죠. 학점 나가는 정식 수업도 아니고 특강이니까, 학교 측에서 허락만 해주면 진행할게요.”

    “조인창 교수님이랑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조인창 교수도 당연히 이렇게 말했겠지.

    그러고 보니 조인후 감독에게서 좀처럼 연락이 없다.

    “배우러 오신 분들 내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죠. 수업 전에 정숙 부탁드린다고 안내나 한 번 해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차 조교는 약속대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공지를 했다.

    “지금 학사팀에서는 특강 수강 인원의 두 배에 달하는 청강생 분들이 계신다는 걸 인지하고 있습니다. 정숙을 약속해주시고 강사님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신다면 따로 학생증 검사 없이 수업 진행하겠습니다. 다만, 수강 신청을 하신 학생들을 배려해야 하는 관계로, 다음 주부터는 지정좌석제를 실시함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공지가 나가자,

    도강생들과 수강생 모두 서로를 이해한다는 듯 가벼운 박수를 쳤다.

    “그럼, 이상 강사님을 모셔보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

    박수소리가 쏟아지는 듯했다.

    부담은 느끼지만, 역시 긴장은 되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이상입니다.”

    나는 바라보는 눈들이 빛난다.

    요즘 난 느낀다.

    한국 사회는 분명, ‘문학’에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문단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 기회를 붙잡아야 할 것이다.

    다시 오지 않을, ‘문학의 붐’을 일으킬 기회일 테니.

    “그럼 오늘의 수업은...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바쁘게 필기를 시작한다.

    “소설이라는 예술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느리고 간접적입니다. 정부 정책이나 사회 운동에 비하면 한없이 미약하죠. 그래요, 소설가는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가난하죠.”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정신적인 영역에서 소설이 남기는 각인은 참으로 효과적입니다. 한 권의 소설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일을 왕왕 볼 수 있죠. 그것은 소설이 말해주는 인간성 혹은 미학들이 독자의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여러분도, 저도, 위대한 그 누구라도 소설이라는 예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어요. 덧붙여...”

    그렇게 오늘도 특강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수업이 끝난 후, 피곤한 몸으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훈에게서 톡이 왔다.

    -형. 미쯔하루 편집장님한테서 메일이 왔어요. 히루키 작가님이 추천사를 다 쓰셨대요. 소설 원고가 올 때까지 못 기다리시겠다나요.

    -벌써? 알았어. 내일 아침에 볼 테니까, 혹시 인쇄해줄 수 있어?

    -물론이죠.

    히루키의 추천사는 물론 궁금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홉 시.

    도착하면 아슬아슬하게 열 시였다.

    추천사를 보면 기쁜 마음에 잠이 달아날 게 뻔했다.

    어떤 경우에도 내 건강을 해치지 않는 것.

    요즘같이 바쁜 시기에는 유난히 지키기 어렵다.

    ***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일어났다.

    한 시간가량 맨몸운동을 하고 학교로 향했다.

    가방 안에는 어제 지훈이 뽑아놓은 히루키의 추천사가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추천사를 읽었다.

    그즈음 되니, 더는 참을 수가 없던 것이다.

    -나는 살면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작가로서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의 글을 읽고 나서, 나는 나와 비슷한 생각과 감성을 가진 이가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그가 적어 내린 글을 보고 있으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정신이 공명함을 느낀다. 그렇게 빠져드는 것이다. 마치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는 나의 형제와 텔레파시를 나누듯.

    그의 에세이는 그가 작가가 되기 전후의 생각을 다루고 있다. 작가라면 이 글을 보라. 작가가 아니어도 이 글을 보라. 무엇인가를 하거나 하고 싶은 사람들은 꼭 이 글을 보라. 천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게 된다면, 당신의 의식의 지평도 한껏 넓어질 테니.

    ...최고의 추천사였다.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그는 나를 ‘형제’이자 ‘천재’로 칭하며, 세상 모든 이에게 나의 에세이를 권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이나 히루키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를 태그하여 짹짹이에 글을 남겼다.

    -최고의 추천사,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언젠가 돌려드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상 배상.

    물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한국어와 일본어로 말이다.

    잠시 후, 국제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제는 익숙한 미쯔하루 편집장의 번호였다.

    “네. 편집장님.”

    -아, 이상 작가님. 히루키 작가님 태그한 글 확인했습니다. 추천사를 마음에 드셨습니까?

    그새 봤구나.

    역시 빠르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더할 나위 없어요.”

    -다행입니다. 저기... 그렇다면 에세이 원고는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마지막 확인을 마치고 오늘 안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역시 작가님이십니다. 빨리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은 얼마나 걸릴까요?

    “음... 이제 곧 시작할 생각입니다만 얼마나 기다려주실 수 있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다음 달 안으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소설 집필은 며칠 내에 들어갈 수 있겠다.

    아직 무엇을 쓸지는 좀 막연하지만...

    -그럼 표지는 미리 만들어놓겠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느낌이 있으신지요?

    내 첫 책의 표지.

    생각해놓은 바가 있었다.

    “앞면과 뒷면의 색이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뒷면은 회색이었으면 합니다.”

    -아... 회색이요? 에세이집인데 너무 어둡지 않을까요?

    “앞표지는 어떤 색을 쓰셔도 상관치 않겠습니다. 아마 무채색은 피하시겠지요. 그럼 너무 장례식 같은 느낌이 될 테니까요. 하하... 앞 색은 알아서 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네, 뭐. 좋습니다. 그럼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또, 생각해 놓은 제목이 있으신지요.

    “예. 있습니다.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오, 무엇입니까?

    “<다시 사는 일>입니다. 괜찮은 것 같나요?”

    -다시 사는 일... 다시 사는 일... 평범한 삶에서, 작가로 다시 사는 일을 의미하는 건가요?

    “그런 셈입니다.”

    ‘김해경’에서 ‘김혜경’으로 다시 사는 삶이기도 하고.

    -좋습니다. 일본어 발음으로도 아주 간결하고요. 한국어로는 어떻습니까?

    “한국어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럼 일단 내부 회의를 좀 더 거치겠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이상 작가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진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회의 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아마 날 완전히 이해하진 못할 것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그는 내가 어떻게 김혜경의 몸을 얻었는지 모르니까.

    에세이.

    그것은 나의 삶을 진솔하게 담은 글이다.

    그 책에 담길 잡문 50편은 작가가 되기 전후의 글.

    다른 말로 하면... 김혜경의 몸으로 들어 온 직후의 글들.

    책의 뒷면이 1930년대 이상의 불행한 삶을 의미한다면, 앞면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상의 밝은 미래다.

    그것이 내가 ‘책’이라는 것으로 보여줄 수 있는 또 다른 내 삶의 모습이다.

    ***

    그렇게 도마크 출판사와 합을 맞춘 날 저녁,

    나는 일본어 원고를 갈무리해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신라문학’ 출판사였다.

    신라문학.

    가라사대와 자웅을 다투는 대형 출판사.

    동시에 나에 관한 이슈에 대해선 내내 침묵했던 곳.

    하지만 조인창 교수가 꾸준히 글을 싣고,

    내 소설을 다룬 지훈의 비평을 뽑은 출판사이기도 했다.

    -이상 선생, 저는 신라문학 편집위원 이준환이라고 합니다.

    중년이 갓 지난 듯한 점잖은 남자의 목소리.

    “이상입니다. 어쩐 일로 전화를 하셨는지요.”

    -먼저... 일본에서 진행하신 선생님의 인터뷰를 잘 보았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열띤 반응과 달리,

    한국 문단은 내 인터뷰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었다.

    가라사대는... 히루키가 얽힌 일이니 비난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런데, 신라문학이 갑자기 관심을 보인다고?

    “그러셨습니까.”

    -먼저, 이렇게 전화를 드리는 것이 매우 염치 불고하다는 걸 압니다.

    “아니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다소 놀랍긴 합니다. 연락을 주신 이유가 궁금하군요.”

    나는 긴말 하지 않고 물었다.

    편집위원은 출판사의 고위 임원이다.

    그가 ‘직접’ 연락을 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할까요.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껏 신라문학 내부 회의가 얼마나 오랫동안, 치열하게 이어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더는 늦출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늦출 수 없다?

    대체 무엇을?

    -이상 선생, 저희 신라문학은 이상 선생과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무엇에 관해서 말입니까?”

    -한국 문단의 미래라고 한다면... 너무 거창할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과연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한 이들을 믿을 수 있을까.

    물론 가라사대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었지만...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죠.”

    신중해야 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단은 지훈과 상의하자.

    지훈은 신라문학에 등단한 후로도 그쪽에 몇 번 들락거렸으니 분위기를 알 것이다.

    나는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지훈을 불렀다.

    그리고 방금 전 전화에 대해 말했다.

    지훈은 내심 반기는 눈치였다.

    “음... 저는 형이 한국 출판사와 아예 척을 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긴 해요. 다들 형 글을 읽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형은 한국 문단을 바꾸고 싶은 뜻이 있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대로 세계문학에 진출하면, 변방의 문학 불모지에서 운 좋게 눈에 띈 작가에 불과하게 돼. 또, 다른 작가들도 더 좋은 환경에서 창작 활동을 해야만 하고.”

    “그래서 만약 저라면... 출판사 중 그나마 괜찮은 곳을 골라야 한다면, 신라문학을 고르겠어요.”

    “흠... 왜?”

    “제가 등단하고 시상식장에서 심사위원분들께 여쭤봤거든요. 어떻게 ‘이상’ 작품을 주제로 한 글을 뽑으셨냐고요.  그러자 한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심사위원들끼리도 엄청나게 싸우고, 토론한 끝에 뽑은 비평이라고요. 이를테면, ‘친 이상 파’와 ‘반 이상 파’가 갈려서 싸운 거죠.”

    “그 편집위원도 신라문학 내부에서 오랜 회의가 있다고 했어.”

    “결과적으로 ‘친 이상 파’가 이긴 거 아닐까요?”

    지훈이 씩 웃었다.

    “어찌 됐건, 그동안 변화를 위해 내부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이거겠지?”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좋아. 내일 얘기를 해봐야겠어. 주말이니 문자 정도 해놔야지.”

    “잘 생각했어요, 형.”

    그러나 나는 다음 날 이준환 편집위원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전화가 먼저 걸려왔기 때문이다.

    조인창 교수의 아들 조인후 감독이었다.

    -...조인후입니다. 아버지께서 많이 위중하십니다. 지금...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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