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39화 (3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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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38)

    다시 사는 천재 작가 38

    “제 에세이가 나온다면, 추천사를 써주시지 않겠습니까?”

    “....”

    “그러니까, 정말로 나온다면 말입니다.”

    히루키는 추천사를 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히루키라는 이름에 책을 쓴 작가가 묻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얘길 해드릴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 이상 작가님은 참 나쁩니다. 제가 한국 책에 추천사를 써 달라 했을 땐 거절하시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서운했는데요.”

    “그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책이 아니라, 그 출판사에 제 글을 싣고 싶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다음 작품에 추천사를 실어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면야, 마음을 풀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자신이 있으십니까?”

    “선생님의 추천사에 제 글이 묻힐까 걱정하시는군요.”

    “잘난 척을 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걱정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저는 적어도 선생님의 추천사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왔습니다. 그러니 나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시죠.”

    그러니까, 자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히루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좋습니다. 추천사를 드리기로 하죠. 저 고집 때문에 일본까지 오셨으니, 답례로 드리고 싶군요.”

    “그리고 한 가지 더.”

    히루키는 말해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또 어떤 이야길 꺼낼지 궁금하다는 듯.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시가를 한 개비 가져가고 싶습니다. 제 매니저에게 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요.”

    “하하하... 긴장했습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가장 좋은 거로 골라드리죠.”

    히루키는 제일 큰 시가를 골라 내밀었다.

    나는 주머니에 그것을 넣었다.

    ***

    1시 정각.

    우리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1층 호텔 카페에는 말쑥한 정장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가득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누구일까...

    “어어, 미쯔하루 편집장님.”

    히루키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동그란 안경을 쓴,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달려왔다.

    “히루키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그럼 이분이...”

    “이상 작가님이십니다.”

    “이상 작가님이시군요!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음료를 주문해드리겠습니다.”

    시가의 후유증 때문에 나는 조금 어지러웠다.

    정신도 깰 겸 아이스커피를 부탁했다.

    잠시 후, 호텔 종업원이 자리에 음료를 갖다주었다.

    커피 맛이 낯설었다.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더치커피 느낌이랄까.

    “한국과 좀 다르지요? 일본 아이스커피는 드립식이거든요. 에스프레소는 주로 따뜻하게 마신답니다.”

    “편집장님께서는 한국 문화에 밝으신 모양입니다.”

    “뭐, 공부 좀 했습니다. 기본이지요.”

    섬세한 편이구나, 이 편집장.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내 일본어 실력에 다시금 놀랐다.

    어떻게 그런 ‘예스러운’ 표현들을 잘 알고 있느냐는 거였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며 어색함을 없앨 무렵, 미쯔하루 편집장이 본론을 꺼냈다.

    “저, 이상 작가님. 그래서 저희 출판사에서 에세이를 내는 일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에서도 안 내신 거라서... 여쭙기에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계약 조건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아, 인세와 계약금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들으셔야죠.”

    미쯔하루 편집장이 얼른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이상 작가,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히루키 작가가 물었다.

    “상관없습니다. 아니, 계셔주시면 더 좋지요.”

    미쯔하루 편집장은 내게 출간 계약서의 항목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신인작가 치곤 상당히 좋은 비율이었다.

    도마크 출판사가 이렇게까지 날 챙겨준 건, 그만큼 히루키를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내가 말한 ‘조건’은 이런 게 아니다.

    “돈이야 어떻게 되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

    미쯔하루 편집장은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분명 조건을 보시겠다고...”

    “저는 인세를 따지러 온 게 아니니까요.”

    “그럼 혹시 어떤 조건을 원하십니까?”

    “이름을 원합니다.”

    “이름이요?”

    “예. ‘이상’이란 이름을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의 독자들이 알길 원합니다.”

    미쯔하루 편집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히루키 작가는 흥미롭다는 듯 날 바라봤다.

    “그거야 저희 역시 바라는 바이긴 합니다만... 저희가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지요.”

    “‘다리’ 역할을 해주시면 됩니다.”

    “다리요?”

    “네. 제 책을 영미권과 유럽권에도 발간할 수 있도록, 도마크와 협약이 되어 있는 외국 출판사들에 중개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그에 따라 제 인세를 조절하셔도 무관합니다.”

    미쯔하루 편집장이 입을 떡 벌렸다.

    “이런 말씀이셨군요...”

    히루키 작가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내가 시가룸에서 한 이야기.

    ‘일본’을 딛고 세계문학 시장으로 나아가야겠다는 계획.

    맞다.

    도마크에서 책을 낸다면, 그 최종 타깃은 세계 시장이다.

    도마크와 같은 대형 출판사는 서구권의 대형 출판사와 협약이 되어 있다.

    단순히 번역서를 내는 게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책을 상호 마케팅하는 관계.

    목적은 단순하다.

    자국 출판 시장의 다양화과 새로운 자극.

    “히루키 작가님, 아까 추천사를 써주신다고 하셨지요. 일본에서 나오는 책은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만약 해외에서도 제 책이 나온다면 추천사도 그대로 번역해서 나갔으면 하는 게 저의 욕심입니다. 부담스러우시다면 굳이 억지를 부리진 않겠지만요.”

    “이상 작가, 당신 정말... 사람을 계속 놀라게 하는군요.”

    히루키 작가는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놀란 사람은 미쯔하루 편집장이었다.

    외국 작가의 책을 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그 책을 또 다른 외국에 소개시켜달라니.

    “그, 그건 조금 곤란합니다. 협약이 되어 있다곤 하나, 소개할 수 있는 책의 수가 정해져 있기에... 저희 쪽에서도 대단히 까다로운 선별 과정을 거칩니다. 또, 그렇게 소개를 해도 그쪽에서 출간을 받아들일 거란 보장도 없고요.”

    “먼저, 오해는 마십시오. 이 조건을 들어주시지 않아도 에세이집 발간은 진행할 생각입니다. 지금 도마크 측에서 제안한 조건들도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살짝 물러났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한숨 돌리는 얼굴이었다.

    “저희는 이상 작가님의 글이 세계 시장에서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시장을 뚫는 건 쉽지 않습니다. 동양의 책들을 은근히 깔보거든요.”

    나는 검지로 테이블을 한 번 쳤다.

    “바로 그 지점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들이 동양의 책을 깔본다는 점 말입니다.”

    히루키 작가는 공감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마케팅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저의 책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마크 같은 세계적 출판사의 힘을 얻고 싶은 거지요.”

    내 홈페이지의 경우도 그렇지 않은가.

    일본은 재일 교포의 힘과 더불어 내 글이 자연발생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영어 페이지의 성적은 아직도 저조했다.

    히루키가 짹짹이에 나를 태그를 해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히루키를 좋아하는 서양인들은 많다.

    하지만 그들은 히루키를 좋아할 뿐, ‘동양 작가’에겐 관심이 없다.

    “떼는 쓰지 않겠습니다. 다만, 편집장님 선에서 단 하나의 가능한 안이라도 고심해주시길 바라는 겁니다.”

    내가 제안한 건 여기까지였다.

    이것은 내가 일본에 온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했다.

    미쯔하루 편집장은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뭔가가 생각나는 듯, 고개를 들었다.

    “잠깐,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보아하니 출판사 관계자들과 이 문제를 상의하는 것 같았다.

    히루키는 내게 말했다.

    “...영리하십니다.”

    “어찌 됐건 도마크와 만났으니, 되든 안 되든 문을 두드려봐야죠.”

    “미쯔하루 편집장은 보기보다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기대해 보죠. 말 잘 꺼냈어요.”

    히루키는 부드럽게 웃었다.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쓸데없는 겸양을 떨다가 길을 돌아가는 것보단 낫죠. 그리고... 세계문학에 대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점도 내심 반갑군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가룸을 다녀오니 용기가 생기더군요.”

    “그러려고 가는 곳이니까요. 시가룸은 실패하는 법이 없죠.”

    히루키가 찡긋 윙크를 했다.

    역시, 그는 말이나 행동에 꽤나 멋을 부렸다.

    내가 그런 쪽에 젬병이라 그런가, 신기하다.

    잠시 후, 미쯔하루 편집장이 돌아왔다.

    아까보다는 좀 편해진 얼굴이었다.

    직감할 수 있었다.

    방법을 찾았구나, 미쯔하루 편집장.

    “후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말씀 중에 실례했습니다. 이상 작가님.”

    “아닙니다. 제가 신세를 지고 있는걸요.”

    “제가 편집장이긴 합니다만, 어찌 됐건 내부의 합의를 얻어야 해서요. 얘기해 본 결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즉, 조건이 있단 소리군.

    “재밌는 방법이었으면 좋겠군요.”

    히루키 작가는 어느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저희 도마크 출판사는 에세이를 찍어낼 때, 그러니까 1쇄를 할 때 8000권씩을 찍어냅니다.”

    미쯔하루 편집장이 결연하게 말했다.

    “내부적으로 ‘이 책 성공했다’는 기준이 10쇄 중쇄입니다. 만약 이상 작가님의 에세이집이 10쇄를 넘기면, 저희 도마크 출판사의 이름을 걸고 미국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보죠.”

    그러니까, 최소 8만 부.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하지만 해볼 만하다.

    이 정도 조건도 없이 해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한 가지 더.”

    미쯔하루 편집장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일본 특전 단편소설을 원합니다.”

    “단편소설이요?”

    “예. 홈페이지에 공개하지 않은 단편소설을 하나 써주십시오. 그리고 에세이 뒤에 덧붙이는 겁니다.”

    난 멈칫했다.

    생각지도 못한 조건이었다.

    “내일 히루키 작가님과 함께 언론사 인터뷰가 잡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이름을 알리시고, 책을 내기 직전에 특전 기사를 풀면 굉장한 마케팅 효과를 볼 것입니다. ‘일본에서 최초공개’니까요. 향후 해외에서 책을 내실 땐 이 특전은 빼셔도 좋고요.”

    ‘일본에서 최초 공개’

    재밌는 발상이었다.

    일본에 대해 묘한 감정을 갖고 있는 내가 어떤 소설을 쓸지, 나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볼 만했다.

    아니, 해보고 싶었다.

    “좋습니다.”

    “오케이 하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예. 저야말로,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상 작가님의 책이 잘 되면, 저희 출판사도 영광이니까요. 외국 작가의 책을 잘 팔아야 그 출판사의 격이 높아지는 법입니다. 그럼 내일 아침, 언론 인터뷰 전에 제가 계약서를 들고 다시 찾아뵙죠.”

    “고생스럽게 직접 오실 필요 없습니다. 편집장이시면 바쁘실 텐데요.”

    “아닙니다. 작가님은 제가 끝까지 책임지고 대우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미쯔하루 편집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힘차게 악수를 나눴다.

    성공적인 미팅이었다.

    ***

    도쿄의 규동 가게.

    나는 지훈이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계약 사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10쇄요?”

    지훈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와... 한국에서도 에세이가 10쇄 뚫기 쉽지 않은데... 괜찮을까요?”

    “밑져야 본전이잖아.”

    “형 근데 협상 정말 잘하시는데요? 웬만한 담력 아니면 그런 소리 못 꺼낼 것 같은데...”

    너도 두 번 살아봐라.

    성공 앞에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건 전생에서 충분히 해봤다.

    죽고 나서야 깨달은 것.

    그것은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계약서는 너한테 보낸 거랑 똑같아. 다만 방금 말했던 조항이 하나 들어갈 뿐이야. 잘 숙지해 둬.”

    “예, 형님. 제가 매일 도마크 쪽 판매지수 파악할 거예요.”

    지훈이 눈을 빛냈다.

    순간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맞다, 야. 선물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지훈에게 주었다.

    “엇...? 이게 뭐예요?”

    “시가.”

    “그러니까요. 갑자기 웬 시가?”

    난 히루키가 날 시가룸에 데려간 사실을 말해주었다.

    시가 향을 킁킁 맡고 있던 지훈이 얼어붙었다.

    “그, 그러니까 이게 히루키가 직.접 골라준 시가라고요?”

    “내가 직.접 들고 온 시가라는 생각은 안 하냐?”

    지훈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가를 조심스레 감쌌다.

    “형은 맨날 보잖아요. 저 이거 못 피워요. 이거 이제부터 송씨 집안 가보입니다. 대대로 물려줘야지.”

    지훈은 시가를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무라카미 히루키, 생각보다 되게 괜찮은 분 같은데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또... 같이 있다 보니 동지의식 같은 게 생겼달까.”

    “동지의식?”

    “같은 동양의 작가잖아. 세계문학 안에서 한국은 진짜 변방이야. 일본은 사정이 좀 낫겠지만... 세계문학은 서구권이 꽉 잡고 있고, 동양 문학은 여전히 ‘하위 문학’이라고.”

    “뭐야... 치사하잖아요. 인종차별도 아니고.”

    “그걸 뚫는 방법이 뭘 것 같아?”

    “글쎄요. 이민이라도 가야 하나.”

    지훈이 기분이 상했는지 툴툴거렸다.

    “아니. 내가 터를 옮기는 건 의미 없어. ‘한국 작가’라는 꼬리표는 언제나 따라붙어.”

    “그럼요?”

    “그 꼬리표가 빛나게 해야지. ‘한국 문학계’를 어떻게든 새롭게 뒤집어 엎어버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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