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37화 (37/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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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36)

    다시 사는 천재 작가 36

    미쯔하루 편집장이 이상에게 전화를 걸기 전날.

    히루키는 도쿄의 도마크 출판사를 찾았다.

    출판사는 비상사태를 맞이했다.

    오키나와로 휴가를 간 히루키가 갑자기 왜?

    미쯔하루 편집장은 오후의 모든 스케줄을 취소했다.

    그리고 제1 응접실에서 히루키를 접대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본가 일로 잠깐 도쿄에 온 김에 들러봤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편하게 있다 가십시오. 휴가는 잘 보내고 계십니까?”

    “그럼요. 간만에 게을러지니 좋더군요. 매일 아침 수영도 하고 러닝도 합니다. 매일 짧은 에세이도 쓰고 있어요.”

    미쯔하루 편집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수영도 하고 러닝도 하고 글까지 쓰는데 게으르다고?’

    역시 일본의 대작가다운 성실함이었다.

    “<신의 서>는 잘 나가고 있나요? 매일 판매 지표를 보고받고 있긴 합니다만... 편집부의 입장은 또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미쯔하루 편집장은 기다렸다는 듯 노트북을 가져와 정갈하게 정리된 판매지표를 보여주었다.

    “보시다시피 역대 최고의 판매 부수를 찍고 있습니다.”

    히루키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일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이제 해외 시장만 남은 거죠?”

    “그렇습니다. 아, 안 그래도 여쭐 게 있었습니다. 이번에 유독 한국 시장에 신경을 쓰시는 것 같은데... 혹시 그 이유가...”

    히루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는 듯.

    “정말 이상 작가 때문인가요?”

    미쯔하루 편집장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한국의 이상 작가는 대단하니까.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문학관을 가진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히루키’인데...

    히루키는 일본 문학의 자존심인데...

    이건 좀 매달리는 꼴이 아닌가? 싶은 것이었다.

    게다가 한국 문학 출판 시장은 하향산업이었다.

    즉, 순문학은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없단 뜻.

    히루키야 그 이름값으로 팔리긴 하겠지만...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미쯔하루 편집장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요.”

    히루키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런 천재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예요.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죠. 아니, 오히려 이건 국가 차원의 문제겠네요. 일본 문학에도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일본 문학에요?!”

    “일본의 문학출판 시장도 점점 작아지고 있어요. 한국보다 속도가 느릴 뿐이지. 우리에게도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요.”

    뼈아픈 말이었다.

    일본의 출판업도 호황기는 지났다는 게 정설이었다.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 그럼 작가님께선 그를 만나보고 싶으신 거죠? 혹시 한국에 가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가능하다면 일본으로 초청을 하고 싶어요. 손님 대접을 하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일본의 독자들에게 그를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요. 사실 그 문제 때문에 도마크에 들린 것입니다만.”

    “혹시 계획이 있으십니까?”

    “그의 책을 도마크에서 내는 게 어떨까요?”

    “예? 하지만 그는 출판사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국 출판사’를 싫어하죠.”

    “...흐음... 하지만 공개된 작품이 단편 두 개밖에 없어서요. 그 외의 작품이 더 있을까 싶습니다만.”

    단편집을 내려면 못 해도 여덟 작품은 필요하다.

    한 작품 당 소요되는 시간은 최소 한 달.

    앞으로 반년은 더 기다려야 원고를 모을 수 있을 텐데?

    “꼭 소설로만 낼 필요 있나요?”

    히루키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다른 글이 있을 것 같습니까?”

    “‘잡문’이 있지 않습니까. 출판시장의 언어로는 ‘에세이’가 되겠군요.”

    “에세이...!”

    미쯔하루 편집장의 얼굴이 활짝 핀다.

    프로 출판인으로서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일본인들은 짧은 글을 좋아한다.

    하이쿠의 전통 때문이다.

    생소한 한국 작가의 글?

    소설보단 짧은 에세이가 훨씬 부담 없이 다가갈 거다.

    게다가 이상 작가의 ‘잡문’은 읽기 쉬우면서도 어딘가 시적인 느낌이 살아있지 않은가!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히루키 작가님!”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비서가 쟁반에 케일 주스를 담아서 가지고 왔다.

    히루키가 왔다는 말에 미쯔하루 편집장이 시부야에서 급히 공수한 것이었다.

    “작가님, 드시지요.”

    “이것 참, 안 주셔도 되는데...”

    그러면서도 히루키는 싱글벙글 주스를 받아든다.

    그리고 그 상큼한 주스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마실 것도 있겠다...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볼까요?”

    ***

    -혹시, 저희 출판사에서 책을 낼 의향이 있으신지요.

    미쯔하루 편집장이 전화 너머로 말했다.

    “책... 이요? 무슨 책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선생님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일본 독자들이 정말 많습니다. 특히 재일교포 쪽에서 말이죠. 이번에 일본에서 에세이를 내시면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만.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한국에서도 안 낸 책이다.

    한국의 문학 출판은 너무나도 하향산업이다.

    산업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그 내리막길에 내 책을 싣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일본은 그나마 상황이 좀 낫다.

    문학 출판 시장이 ‘아직은’ 활발하고 영미권과 유럽권 출판사와의 연줄도 좋으니.

    물론 그들도 언제까지 ‘책’ 문화를 지킬 수 있을 진 미지수지만.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일본에 들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히루키 선생님께서도 이상 작가님을 꼭 뵙고 싶어 하셔서요. 두 분의 만남을 주관하고, 에세이를 내신다면 출간행사도 저희 쪽에서 진행하고 싶습니다.

    “히루키 작가님과의 만남이라...”

    -예. 이상 작가님께서 오케이 하신다면, 바로 스케줄을 잡겠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그래.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좋습니다. 그럼 회동을 하도록 하죠.”

    나는 선선하게 대답했다.

    담백한 대답에 미쯔하루 편집장이 되레 놀란 듯했다.

    -정말이십니까? 제안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물론 왕복 비행기 티켓과 호텔은 저희가 다 부담할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오십시오.

    “혹시 티켓을 두 장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제 매니저와 동행을 해야 해서요.”

    -물론입니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그럼 내일 안으로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미쯔하루 편집장님.”

    -감사합니다, 이상 작가님. 아, 그리고 일본어가 정말 고상하고 훌륭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럼 일본에서 뵙지요.”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난 그렇게 일본에 방문하게 됐다.

    ***

    일본 일정은 사박 오일.

    그중 주말이 끼어 있지만, 나머지 사흘은 평일이었다.

    교학팀 업무는 사유서를 내는 거로 대신하게 됐다.

    조교의 목적은 ‘학생의 안정적인 학업’이다.

    학업과 진로에 관련한 외부 일정은 학교 쪽에서 양해해주는 게 원칙이고.

    그래도 출발 전날은 조금 바빴다.

    나와 지훈은 보조 테이블에 앉아 사흘 치의 일을 빠르게 처리했다.

    물론 두런두런 수다를 떨며.

    “그래도 형 덕에 공짜 여행도 가 보네요. 일정은 다 잡혔어요?”

    “하루는 도착하고 쉬고, 이틀 스케줄 진행하고, 나머지 하루는 관광하고 돌아와야지. 맞다, 도마크 출판사에서 한국어로 된 임시계약서 보냈더라. 도착하기 전에 확인 좀 해줄래?”

    “맡겨두세요.”

    “너 근데 차기작 준비는 하고 있어? 비평.”

    “네. 한지온 작가 글로 해보고 있어요.”

    “한지온 작가? 좋은 글을 쓰는 작가야. 잘 해봐.”

    “넵. 헤헤.”

    지훈이야 잘할 거다.

    요즘 청탁도 좀 받는 것 같고.

    또, 이 녀석도 날 따라다니느라 무척 바빠졌다.

    “지훈아, 너 괜찮으면 조교는 이번 학기로 마무리할래? 나도 그럴 생각인데.”

    내 말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이제 학비 낼 돈도 충분하고요. 전 형이 이번 학기 다 채우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조교는 학기 단위로 계약한다.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지만... 학기 중에 후임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혜경이 학비를 위해 어렵게 구한 자리이니만큼, 내가 끝맺음을 잘 해줘야지.

    “조교 이번 학기까지만 하신다고요?”

    자리에 앉아 있던 금홍이 뒤를 돌아 우리를 보았다.

    “아무래도요. 외부 일정이 많아지면 매번 사유서를 쓸 순 없잖아요.”

    “아... 그러시겠구나.”

    금홍이가 아쉬운 얼굴을 한다.

    “금홍 샘, 우리 가니까 아쉽구나?”

    지훈이 장난을 건다.

    금홍이 그런 지훈을 밉지 않게 흘긴다.

    나도 금홍이와 함께 일하는 시간이 주는 건 아쉽다.

    하지만 조교를 안 한다고 못 보게 되는 건 아니니까.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저, 금홍 선생님. 혹시 미신 믿으세요? 부적 같은 거요.”

    “부적이요? 글쎄요.”

    “일본 신사에서는 부적을 팔거든요. 오마모리라고도 하는데, 종류가 다양해요. 아픈 걸 낫게 해주는 부적, 돈 많이 벌게 해주는 부적, 만사형통 부적 등등... 그 부적을 한동안 가지고 있다가 소원이 이루어지면 다시 신사에 반납하는 식이긴 한데... 기념품으로 하나 사다 드릴까 해서요. 어쨌건 사흘이나 자리 비우는 것도 죄송하고요.”

    “죄송하긴요. 일도 미리 하고 가시는데. 그나저나 일본인답네요. 신사의 부적이라. 딱히 그런 걸 믿진 않는데 낭만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하나 사다 드릴게요. 어떤 부적을 원하세요?”

    금홍이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혜경 샘이 골라주세요.”

    “네? 하지만...”

    “제게 필요할 것 같은 걸로요.”

    장난스러운 말이었다.

    어쩐지 진심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실망시킬 수 없지.

    “좋아요. 그럼 맡겨요. 멋진 걸로 골라볼 테니까.”

    “퇴근 시간 다 되어가네. 오랜만에 셋이 저녁 먹을까요?”

    지훈이가 말했다.

    그런데 금홍이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오늘은 갈 데가 있어서요.”

    “뭐예요~ 우리 가서 아쉬운 거 아니었어요?”

    “아니거든요, 지훈 샘~.”

    금홍이 서류를 챙겨 다른 사무원에게 간다.

    사무원들끼리 상의할 게 있는 모양이다.

    지훈이 내게 슬쩍 말했다.

    “금홍 샘, 요즘 일 끝나고 학원 다니는 것 같아요.”

    “학원?”

    “네. 저번에 사무원 선생님들 얘기하는 거 살짝 들렸거든요. 어떤 학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쁜가 봐요.”

    학원이라...

    아무래도 바리스타 학원이려나.

    ***

    며칠 후, 우린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비즈니스 클래스.

    짧은 비행이었지만 쾌적하게 일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본 나리타 국제공항.

    정신없이 입국 수속을 마쳤다.

    공항을 나설 때 즈음엔 온몸이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일단 호텔로 가시죠. 가는 길 알아놨어요.”

    지훈은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일본에 자주 와봤다고 했다.

    기차역으로 앞서가는 걸음이 능숙하다.

    이렇게 물 만난 물고기 같은 녀석이,

    어째서 일어는 하나도 못 읽는 건지.

    나는 창가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나의 시간으로만 따지면...

    2년 만에 도쿄, 즉 내가 죽은 땅에 돌아온 셈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때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버블 경제 등.

    이 나라도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본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모두 사라졌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얻어갈 것들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

    단순히 책 출판과 히루키와의 친교를 위해서만은 아니니까.

    우리는 호텔에 도착한 후 짐을 풀었다.

    5성급 호텔이라 그런지 두 개의 침대가 제법 널찍했다.

    “이야... 좋은 호텔 잡아줬네요. 일본에서 이 정도 크기의 방이면 진짜 좋은 거거든요.”

    “그래? 난 와 본 적이 없어서.”

    “일본은 호텔 방이 워낙 작거든요. 일단 나가서 식사부터 하시죠?”

    “룸서비스 시켜 먹으라던데. 도마크 편집장이.”

    “형... 진짜 스타네요. 저 그럼 먹고 싶은 거 다 시킵니다?”

    “마음대로 해라.”

    지훈은 신이 나서 룸서비스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주문은 내가 해줄게.”

    “아니에요. 영어로 하면 되죠. 영문과 조교 하면서 간단한 회화는 늘었어요. 그리고 이런 일은 매니저가 해야죠.”

    지훈은 너스레를 떨며 전화로 이러쿵저러쿵 음식을 시켰다.

    나는 피곤한 몸을 벌렁 침대에 눕혔다.

    그때였다.

    로밍을 해 온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생소한 번호였다.

    일본 번호 같은데.

    “네. 여보세요.”

    -아, 이상 작가님 되십니까.

    중후하지만 명랑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

    그리고 일본어.

    “네, 맞습니다. 누구십니까?”

    -저, 무라카미 히루키라고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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