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35화 (35/204)
  • #   35 - 3826993

    #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3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34

    나는 유한석 건축가와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마침 강인춘 PD와 함께 있는 미술감독을 찾아갔다.

    우리는 그들을 저택으로 데려와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미술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분 말씀에도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화면에 비춰졌을 때, 폐가가 너무 똑바른 상태로 있는 것도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백 년의 세월이 느껴져야 할 텐데요.”

    “그 백 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각도를 유지한다는 데에서 오는 괴기스러움이 있습니다. 극본에서도 그 괴기스러움이 정말 중요하게 다뤄지고요.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세요.”

    드라마의 미장센은 미술감독의 권한이다.

    강하게 밀어붙이면 선을 넘는 게 된다.

    하지만 미술감독이 내 극본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우리의 제안을 모른 척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창밖 조경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 극본을 생각하니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네요. 좋습니다. 집을 고치는 것도 아니고 조경 옮기는 건 금방 합니다.”

    나와 유한석 건축가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뭘요, 현장에선 이런 일 비일비재해요. 강 PD님도 동의하시면 바로 진행하죠. 대신 촬영을 두 시간 정도만 늦춰줘요.”

    “나도 찬성이야. 시간 벌어줄 테니까 얼른 시작하라고.”

    강인춘 PD가 허락을 내렸다.

    유한석 건축가와 미술감독이 조경 수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감각 있는 건축가와 유연한 미술감독.

    믿고 맡겨볼 만했다.

    “오준아, 넌 왜 그렇게 넋 놓고 있어?”

    강인춘 PD가 내 옆에 서 있던 최오준 배우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따라다녔던 건가?

    최오준 배우는 나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작가님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예?”

    “아, 제가 꼭... 나중에 꼭 따로 뵙고 싶어서요. 사실 건축가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몰라서 고민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방금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방식, 시선, 말투... 딱 제가 생각하던 건축가였어요. 이 건물을 어떤 시선을 봐야 할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연기에 대한 순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칭찬은 감사하지만, 저는 건축가가 아니라 작가라서요. 건축가 이미지는 유한석 건축가님에서 따오시는 게 더 자연스러우실 거예요.”

    “아니에요. 작가님.”

    최오준 배우가 내 팔을 덥석 잡았다.

    “분명히 나중에 여쭤볼 게 생길 것 같아서요.”

    강인춘 PD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번호정돈 줘. 이 작가한테 푹 빠졌네.”

    배우들이란 원래 이렇게 자기감정에 솔직한 걸까.

    나는 엉겁결에 최오준 배우와 번호를 교환했다.

    “뭐, 그럼 이 작가는 저쪽에서 나랑 샌드위치나 먹자고.”

    강인춘 PD가 나를 은근슬쩍 그 자리에서 빼냈다.

    우린 버스 옆에 늘어놓은 간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먹었다.

    저 멀리에서 조경 공사가 착수되고 있었다.

    “극본, 어디까지 썼어?”

    “쓰기는 다 썼어요. 다음 회의 때 다 가져갈게요. PD님 좋아하시는 예술적인 대사 좀 넣어봤어요.”

    강인춘 PD가 웃었다.

    “역시.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끝까지 따라 온 시청자분들에 대한 선물이랄까요.”

    “이 작가, 날이 갈수록 이 드라마 판이랑 잘 맞는 것 같아.”

    “PD님이랑 제작진분들이 잘 도와주신 덕이죠.”

    난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극본 다 쓰면, 계획이 어떻게 돼? 히루키 보러 일본 갈 거야? 요새 이 작가 기사엔 히루키 얘기밖에 없던데.”

    “제가 가야 하나요?”

    내 질문에 강인춘 PD의 눈이 동그래졌다.

    잘난 척을 하거나 오만하게 굴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진짜 몰라서 묻는 거다.

    내가 이 상황에서 그를 만나는 게 맞는지.

    유명한 작가가 부르면, 무조건 화답을 해야 하는 건가?

    “글쎄, 보통은 가겠지? 히루키잖아. 이 작가한테도 손해될 건 없지 않아?”

    “음... 개인적인 문제가 좀 있어서요. 아무튼 히루키 일은 좀 보류예요. 아, 그리고 저, 오늘 촬영만 보고 당분간은 여기 안 와요. 멀기도 멀고.”

    “왜 안 와, 최오준이 널 저렇게 좋아하는데.”

    “배우들이 벌써 제 눈치 보잖아요. PD님 눈치 보는 것도 바쁠 텐데. 팀의 균형을 깨고 싶지 않아요. 대사 수정 시엔 바로 연락 주세요. 제 매니저 번호도 알려드릴게요.”

    나는 지훈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강인춘 PD는 내심 아쉬운 얼굴이었다.

    “나머진 PD님께 믿고 맡겨요. 잘 구현해 주세요.”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공동 작업이잖아요. 대박작으로 만들면 만족해요. 그러려고 극본 쓴 거니까.”

    “잘났다, 인마. 너 바빠서 그렇지? 새로운 글 쓰고 싶을 거 아냐.”

    난 대답 대신 웃었다.

    맞다.

    이제 슬슬 다음 작품을 쓰고 싶었다.

    특히 소설을 쓰고 싶은 열망이 울컥울컥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꼭 또 드라마 해. 나랑 같이.”

    “기회가 되면요. 조경 공사 좀 보고 올게요.”

    “그래라.”

    나는 샌드위치 껍질을 구겨서 비닐봉지에 넣었다.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 창 앞에 섰다.

    밖에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미술감독과 유한석 건축가의 표정이 나쁘지 않다.

    협의가 잘 된 모양이다.

    천천히, 몇 걸음 물러났다.

    창틀과 창밖 조경의 비율과 각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좋아.”

    완벽하다.

    비로소 마음 편하게 <무너지는 날>을 이들에게 맡길 수 있게 됐다.

    ***

    강원도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잤다.

    촬영이 어찌나 길던지, 다들 집중을 유지하는 게 대단했다.

    특히 한예린을 비롯한 여배우들.

    어떻게 그렇게 마른 몸으로 그 긴 대장정을 버티는 걸까.

    프로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촬영 분위기도 좋았다.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웃음.

    강인춘 PD는 베테랑답게 그 분위기를 주도했다.

    “형, 형! 다 도착했어요.”

    “으... 으음... 몇 시야?”

    “새벽 한 시예요. 들어가서 주무세요.”

    역시. 10시가 지나니 귀신같이 잠이 왔구나.

    지훈은 오후 내내 차에서 잔 터라 아직도 쌩쌩해 보였다.

    “아이고, 택배 많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우리가 현관 앞에 쌓인 택배를 주섬주섬 챙길 때였다.

    “형, 이거 국제 택배 같은데요?”

    “뭐? 누구한테 왔는데?”

    “형한테요. 영어로 LEE SANG이래요.”

    “그래? 그럼 줘.”

    대수롭지 않게 택배를 받아 왔다.

    해외에서 내게 택배를 보낼 일이 있던가?

    피곤하니 생각하기도 귀찮다.

    방으로 돌아와 택배 상자를 살폈다.

    보낸 이는 J-A엔터. 발송지는 JAPAN.

    “...일본?”

    뭔가 느낌이 왔다.

    얼른 택배 상자를 뜯어보았다.

    그리고 내용물을 본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신의 서>.

    무라카미 히루키의 신작 소설이었다.

    게다가 아직 국내에서는 나오지도 않은 일본어판.

    그리고 J-A 엔터는 히루키의 매니지먼트였다.

    책을 이리저리 만져봤다.

    일본 책 특유의 가벼운 무게와 부드러운 질감.

    확실히 한국 책과 느낌이 달랐다.

    책장을 펼치니 첫 내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천재와의 만남을 기원하며. 2021년 04월 29일. 무라카미 히루키 드림]

    천재와의 만남을 기원하며.

    ...히루키는 나를 ‘천재’라고 불렀다.

    ***

    다음 날, 난 하루 종일 <신의 서>를 읽었다.

    훌륭한 작품이었다.

    8, 90년대 일본 버블경제 타격을 입은 세대.

    바로 그 세대의 자녀들이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이야기였다.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나아가 일본을 넘어 인류의 미래에 대해 논하는 담대한 메시지.

    계획적이고, 사회적이고, 메시지적인 소설.

    천재의 감각으로 쓴 소설은 아니었다.

    다만 잘 닦여진 대가의 솜씨였다.

    한평생을 소설가로 살아 온 예술가의 원숙한 글이랄까.

    작가로서, 이런 선물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나는 <신의 서>를 덮자마자 간략한 감상을 써내려갔다.

    -<신의 서>의 ‘신’은 일본이라는 국가, 세계, 나아가 인류의 역사 그 자체다. 그 가운데에서 태어난 개인은 운명에 반한 길을 얼마나 걸어갈 수 있는가. <신의 서>의 야오야마가 가는 길을 보라. 그 길 끝에 보이는 태양의 밝기를, 그의 등 뒤를 밝히는 서늘한 달의 그림자를 보라. 그 달이 한때는 태양이었다는 것을 야오야마는 모르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 역시 한때는 모두 태양이었다는 것을 우린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야오야마가 그렇듯, 우리 역시 역사라는 길을 걸을 뿐이다.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삶이라는 순례자처럼.

    나는 이 글을 일본어로 한 번 더 번역했다.

    그리고 지훈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모든 SNS에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올려줘. 나, 히루키 그리고 <신의 서>를 태그로 넣고. 히루키가 보내준 책도 사진으로 찍어서 줄 테니까 첨부해줘. 되도록 빨리 부탁해.”

    다음 날, SNS는 난리가 났다.

    발매되지도 않은 <신의 서>를 내가 읽었다는 점,

    그리고 그 책을 히루키가 선물했다는 점이 큰 이슈가 되었다.

    일본도 반응은 비슷했다.

    다만 일본인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히루키가 인정한 ‘천재’의 화답.’이라고

    그리고 며칠 후, 가라사대 출판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상 작가님. 여기는 가라사대 번역서 출판부입니다.

    가라사대?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현강의 입김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들은 나에 대한 비난을 계속해오지 않았나.

    “무슨 일이십니까?”

    -하하... 다름이 아니라 이상 작가님께서 요즘 무라카미 히루키 작가와 특별한 우정을 쌓고 계시지 않습니까?

    “....”

    -사실 저희가 이번에 히루키 작가의 신작 <신의 서>를 출간하게 됐습니다. 저희 출판사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이번 신간을 출간하는 것이니만큼,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히루키의 신작을 내다니.

    가라사대는 확실히 자본력이 좋았다.

    못 해도 몇억의 계약금과 선인세를 안겨줘야 했을 텐데.

    -그래서 말입니다. 저희가 이번 신간을 낼 때 이상 작가님의 추천사로 실어도 될까 해서요.

    “추천사라고요?”

    추천사란 책 뒷면에 들어가는 짧은 글이었다.

    주로 평론가와 동료 작가의 우호적인 글이 실리기 마련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분의 추천사를 실으세요.”

    -네, 네?

    편집부 직원은 당황했다.

    가라사대의 책에 추천사 한 조각을 싣고 싶어 안달 난 이들이 적지 않다.

    게다가 히루키라는 대가의 신작.

    보통 작가였다면 그만한 영광이 없겠지.

    “히루키의 책에는 언제든 추천사를 실어드릴 수 있지만, 가라사대 책에는 싣고 싶지 않군요.”

    -하, 하지만 작가님, 히루키 작가님도 원하시는 바라서... 이렇게 거절하시면 이상 작가님도 곤란하시지 않겠습니까.

    가라사대 인간 아니랄까 봐.

    은근슬쩍 협박을 던지는 꼴이라니.

    “장담하건대, 히루키 작가님은 그런 속 좁은 오해를 하실 분이 아니실 겁니다. 중간에 이간질이나 하지 마십시오. 히루키 작가의 책을 계속 내고 싶으시다면 말입니다.”

    -저, 그...

    “저는 제 뜻을 다 전했습니다. 가라사대 책, 가라사대의 홍보물에 제 글을 단 한 글자도 싣지 마십시오. 그럼 끊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