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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34화 (3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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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33)

    다시 사는 천재 작가 33

    <무너지는 날>의 모든 배우가 정해졌다.

    여자 배우는 한예린.

    남자 배우는 최오준.

    주연배우들이 모이는 첫 극본 리딩 날.

    나 역시 극본가의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엠플릭스 본사 3층 회의실.

    타원형 탁자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강인춘 PD가 아는 체를 했다.

    “여기- 이 작가님 오셨어요. 다들 인사해요.”

    “오, 안녕하세요. 작가님.”

    “영광입니다. 소문 많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때, 강인춘 PD가 두 남녀를 데려왔다.

    “인사해요. 우리 주연배우들.”

    “극본가님, 안녕하세요. 한예린입니다.”

    “최오준입니다. 영광입니다. 팬이에요, 이상 작가님. 소설도 다 읽었는데... 정말, 정말 팬이에요.”

    한예린은... 태어나서 본 여자 중에서 제일 예뻤다.

    낮은 목소리와 압도적인 우아한 분위기.

    괜히 ‘충무로 여신’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최오준은... 화면보다 너무 잘 생겼잖아?

    배우 안 했으면 억울했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멋졌다.

    방송 카메라란 무서운 거구나.

    이런 사람도 평범하게 비춰지다니.

    “저... <무너지는 날> 기획안 보고 너무 하고 싶어서 잠도 못 이뤘어요. 소설도 다 찾아봤고요. 진짜 꿈같습니다.”

    최오준 배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좋게 봐줘서 고맙습니다. 연기 기대할게요.”

    “자- 인사는 그만하시고 가서 상견례 좀 하시죠.”

    강인춘 PD가 웃으며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 다 같이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리딩 들어가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하고 시작할까요? 저는 <무너지는 날>의 총감독을 맡은 강인춘입니다.”

    강인춘 PD를 시작으로 기획팀을 비롯한 엠플릭스 관계자들이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첫 리딩이라 촬영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도 참석을 한 듯했다.

    다음은 배우들의 차례였다.

    “한예린입니다. 극 중 과거의 일본인 ‘사토미 유우’ 역할을 맡았습니다.”

    “최오준입니다. 극 중 현대의 한국인 ‘김유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여자치곤 살짝 낮은 한예린 배우의 목소리.

    남자치곤 살짝 높은 최오준 배우의 목소리.

    오디오 궁합이 정말 좋았다.

    조연 배우들의 인사까지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무너지는 날>을 집필한 이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특히, 두 주연 배우님께서 이 극을 잘 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두 배우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강인춘 PD가 좌중을 집중시켰다.

    “자, 그럼 시작하시죠. 지문은 내가 읽을게요. 강원도의 깊은 산자락, 카메라는 깊고 어두운 산길을 훑는다. 그리고 나타나는 한 채의 폐가. 에도시대 풍의 가옥이다. 갑갑하고, 음산한 느낌. 그리고 문 열리고 유한의 구둣발 보인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서 유한의 얼굴이 보인다.”

    최오준 배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둠 속에서 경계를 세우는 한 마리 짐승 같은 눈빛.

    그리고 첫 마디를 내뱉는다.

    “아무도 없습니까.”

    나는 극본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끝났다.

    내가 상상하던, 딱 그 ‘김유한’이었다.

    ***

    캐스팅이 끝나자 집필 속도는 더 빨라졌다.

    이미지가 확실하니 장면화도 쉬워진 것이다.

    특히, 최오준 배우를 생각하면 손가락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한예린 배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직접 보니, 극 중 ‘사토미 유우’의 신비로운 이미지가 더 잘 잡혔다.

    그 사이 들어 온 2차 원고료도 큰 힘이 되었고.

    통장의 여유는 곧 마음의 여유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10화 이후부터는 극의 분위기를 살짝 틀어보자.

    10화까지 따라와 준 시청자들은 이미 ‘팬’이다.

    ‘팬’이라면 <무너지는 날>이 대체 불가한 작품으로 남길 바랄 것이다.

    강인춘 PD가 노래를 부르던 ‘예술성’.

    많이도 필요 없다.

    ‘명품’은 한 끗 차이로 만들어지는 법.

    문학적인 대사 한 마디,

    상징적인 소재 한 가지,

    은유적인 상황 하나.

    하지만 대중들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순문학적 요소와 드라마의 융합.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분명, 가치가 있는 작업이다.

    만약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무너지는 날>은 종영이 된 이후에도 오래오래 회자될 것이다.

    ***

    그 사이 배우들과 강인춘 PD는 제작발표회까지 마쳤다.

    인터넷 영상으로 확인해 보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잘 진행된 듯했다.

    <무너지는 날>의 주 촬영지는 강원도 태기산이었다.

    ‘산속에 지어진 옛 일본 가옥’이라는 풍경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결정이라고 했다.

    본격적으로 촬영 일자가 잡히고,

    첫 촬영이 마침 주말인 김에 나도 참여하기로 했다.

    촬영 팀 버스가 있으니 그것을 탈 생각이었는데...

    떠나기 전날 밤, 지훈이 웬 승용차를 끌고 왔다.

    “스타작가님이 무슨 버스입니까. 매니저가 모는 차 타셔야죠.”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그런데 웬 차야?”

    “아버지가 중고로 팔려는 거 가져왔죠. 등단 선물로 주신대요.”

    부러운 놈.

    어쨌건 편안하게 가게 됐으니 잘 됐다.

    다음 날, 우린 새벽부터 강원도로 향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을 하는 지훈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 바쁘지 않아? 게다가 곧 신라문학 시상식이잖아.”

    “시상식은 다음 주예요. 그리고 형이 강원도까지 가는데 매니저가 안 따라가면 업무태만이죠.”

    업무태만이라.

    지훈은 벌써 기합이 들어서, 제법 전문 매니저티를 냈다.

    녀석이 저렇게 흥을 내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이 차, 아버지 다시 갖다 드리고 우린 새 차 하나 뽑자.”

    “네? 아니에요. 이거 제 등단 선물인데.”

    “그럼 두 대 굴려. 각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매니저 시작인데 새 차도 몰아봐야지.”

    지훈이 헤벌쭉 웃었다.

    “그럼 알아볼게요. 하던 대로 3개 안으로 후보 줄일 테니까 결정만 해줘요. 아, 사업자 내고 사는 게 더 이득이려나. 한 번 알아볼게요.”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이제 완연한 아침이었다.

    “어, 해 떴다. 형 안 졸려요? 자도 되는데.”

    “안 졸려. 촬영지 생각하느라.”

    “걱정 돼요?”

    “걱정이 아니라... 궁금함? 1930년대 조선 땅에 지어진 일본의 에도식 건물이야. 구현하기에 쉽지 않았을 것 같아서.”

    “그래도 꽤 유명한 건축가랑 미술감독이 붙었다고 기사도 떴던데요. 그리고 형이 그림도 그려서 줬다면서요. 참고하라고.”

    “그렇긴 한데, 그 시절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실감이 날까 싶어.”

    “에이,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그 시절 살던 사람이 어디 있어요?”

    “혹시 알아? 어딘가에 있을지.”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강원도로 들어섰다.

    태기산의 구불구불한 산자락을 오르니, 탁 트인 촬영지가 우릴 맞이했다.

    촬영 팀 버스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배우들은 아직 도착 전인 것 같았다.

    컨디션 조절을 위해 호텔에서 쉬고 있을 수도 있고.

    잠에서 갓 깬 듯한 강인춘 PD가 날 맞았다.

    “이 작가. 오느라 고생했어. 옆에는 누구셔?”

    “제 매니저예요.”

    “송지훈입니다. 저희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뭔가 부끄럽다.

    강인춘 PD도 지훈의 텐션에 놀란 듯했지만 곧 허허 웃었다.

    “이 작가 연예인 다 됐네.”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저 집인가요? 엄청 크네요.”

    나는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건물을 가리켰다.

    “응. 일종의 세트니까 일반 저택보단 훨씬 크게 지었지. 촬영 팀 다 들어가야 하니까. 하지만 화면에서는 적당한 크기로 나올 거야.”

    “대단하네요. 진짜 한 백 년은 된 건물 같아요.”

    막상 실물을 보니 막연했던 걱정이 싹 사라졌다.

    우리나라 건축 기술, 정말 대단한 수준으로 발전했구나.

    “감독님, 저는 세트장 구경을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어. 괜찮을 거야. 다녀와. 안에 건축가 선생도 있어.”

    건축가? 꼭 만나보고 싶었다.

    내 극본을 이렇게까지 훌륭하게 재현한 건축가라니.

    같은 건축인으로서,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지훈아, 차에 가서 기다려 줘. 쉬고 있어. 이따 올라갈 때 또 운전해야 하니까.”

    “알았어요, 형.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

    나는 지훈을 보내고 저택을 향해 갔다.

    끼이익...

    삐걱대는 나무문의 소리,

    어두침침한 실내,

    나무 창살로 만든 격자무늬 창,

    천장을 가로지르는 좀먹은 대들보,

    거스러미가 잔뜩 올라온 다다미,

    중앙 다다미방을 사각형으로 감싸는 나무 복도.

    ...꼭 1930년대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다다미방을 가로질러 죽 걸었다.

    복도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말소리를 따라서 가니, 넓은 창 앞에 최오준 배우와 마흔 초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최 배우님.”

    “아. 이상 작가님. 어서 오세요.”

    “벌써 오셨어요?”

    “저는 버스 타고 왔어요. PD님한테 연기 지도를 좀 받을 게 있어서요.”

    연기파에 노력파이기까지.

    보면 볼수록 멋진 배우다.

    최오준 배우는 옆의 남자를 두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하세요. 유한석 건축가님이세요.”

    젊은 나이에 이런 옛 건물을 재현하다니.

    대단한 건축가였다.

    “안녕하세요. 극본가 이상입니다.”

    “아이고, 소문으로만 듣던 작가님이시군요. 유한석입니다.”

    우리는 짧은 악수를 나눴다.

    건축가에 어울리는 거칠고 딱딱한 손이었다.

    “멋진 집을 지으셨어요. 제가 상상한 그대로입니다.”

    “그려주신 설계도가 거의 전문가 수준이라... 그대로 따라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는 뭔가를 우려하는 듯 마음이 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자꾸만 창밖을 향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이게... 아닙니다.”

    “집에 관련한 문제인가요?”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유한석 건축가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어서요.”

    “이 집에요? 제가 보기엔 훌륭한데요.”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딱히 눈에 보이는 하자는 없다.

    “예. 뭐...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창밖의 풍경이 좀...”

    “흠...”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넓은 나무 창틀과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원은 망가지고 시들어 볼품없었다.

    ‘2021년대까지 남은 1930년대의 정원’이기에 당연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도...

    이 집, 정말 문제가 있었다.

    조경이 아주 조금 비뚤어진 것이다.

    나는 다시 앞으로 다가가 밖을 보았다.

    비뚤어진 느낌은 오간 데 없었다.

    ...조경이 비뚠 게 아니었다.

    “이 집, 혹시 약간 기울게 지으셨습니까? 아주 조금 말입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각도를 살피는 건 건축기사의 기본이다.

    그는 그제야 사실을 털어놓았다.

    “하아... 사실 미술 감독님과 합의 끝에 이렇게 된 겁니다. 폐가가 너무 똑바르면 위태로운 느낌이 안 든다고요. 저야 지시대로 집을 짓는 입장이니까 그렇게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계속 마음에 걸려요.”

    “백 년이 지난 집이기 때문에 약간 기운 게 자연스럽다, 이건가요?”

    “그렇죠.”

    “말도 안 됩니다. 이런 형태의 가옥은 백 년으로는 기울지 않아요. 게다가 당시 조선 땅에 지어진 가옥은 더 튼튼합니다. 조선 땅에서 뿌리를 박을 작정으로 만든 거거든요. 또.. 일본 건축의 우월함을 뽐내기 위해서라도 본국의 건물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썼어요.”

    나는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특히 조경이 전면으로 보이는 이쪽 창은 반드시 똑발라야 해요. 안에서 창밖의 조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들어와야 하는데요.”

    유한석 건축가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시, 신기하군요. 사실 강점기 시절, 게다가 일본 건물의 건축 자료가 많이 없어서 애를 먹었거든요.”

    나는 대답 대신 그냥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창밖을 가리켰다.

    “덧붙이자면, 조경도 집과 너무 가까워요. 일본 건축은 정원과의 거리감이 중요해요. 조선, 아니 한국 전통 건축보다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조경과 집의 거리를 일 미터쯤 더 벌려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야 이 집에 어울려요.”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조경을 일 미터 정도 밀어버리되, 집이 기운 각도에 맞춰서 함께 틀어보시죠. 그럼 바르게 보일 겁니다.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애먼 씨지 팀이 고생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유한석 건축가의 얼굴이 비로소 피었다.

    “조, 좋습니다! 그렇게 설명을 하면, 미술감독님도 오케이 하실 것 같군요. 혹시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우리는 서둘러 미술감독과 강인춘 PD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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