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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32)
다시 사는 천재 작가 32
“자, 작가님! 이것 좀 보세요. 히루키 작가가 또 태그를 걸었어요!”
“와... 진짜 대박이다...”
“어서 보여드려! 어서.”
학생은 얼른 내게 다가와 휴대폰을 내밀었다.
히루키의 짹짹이 피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상, 그에게 내 신작을 선물하고 싶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내용이었다.
...일단 학생들이 알아채기 전에 도망쳐야겠다.
“작가님, 이거 무슨 뜻이에요?”
“작품 잘 봤다는 거예요,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얼른 가방을 챙길 때였다.
“번역기 돌려봐!”
누군가 그런 멋진 아이디어를 내고 말았다.
학생은 재빨리 글을 복사해서 번역기에 넣고 돌렸다.
“대박! 히루키가 작가님 만나고 싶어 해요!”
“신작도 선물하고요. 짱이다...”
학생들의 눈이 더욱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존경을 넘어 경외감까지 느껴지는 시선들.
“작가님, 히루키 작가를 만나실 거죠?”
“답장도 보내실 거죠? 제발 태그 걸어서 저희도 볼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글쎄요. 일이 바빠서 확신할 수가 없네요. 그럼 다음 주에 봐요.”
나는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 대강당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
나는 강의가 아닌 다른 이유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힘든 수업은, 아니 학생들은 처음이었다.
이런 걸 보면 연예인들도 참 힘들겠다.
저렇게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인간들을 대체 어떻게 감당하는 것인가.
그나저나, 히루키의 두 번째 태그라니.
개인적인 감정을 차치하고서라도, 답을 보내는 게 예의겠지.
나는 짹짹이에 접속했다.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피드들이 날 반기고 있었다.
히루키와 나를 태그한 학생들의 피드였다.
-이상 작가님은 너무 바쁘시다고 한다. 아쉽다. 히루키 작가와의 만남은 결렬인 걸까...
-이상과 히루키. 한일전은 없을 것 같다.
-혼자만의 길을 가려는 이상... 역시 대단하다.
-역시 이상. 원래 천재는 독고다이다. 하지만 히루키와의 만남은 아쉽게 됐다.
...이런...
***
오키나와, 히루키의 별장.
-이상 작가님은 너무 바쁘시다고 한다. 아쉽다. 히루키 작가와의 만남은 결렬인 걸까...
-이상과 히루키. 한일전은 없을 것 같다.
-혼자만의 길을 가려는 이상... 역시 대단하다.
-역시 이상. 원래 천재는 독고다이다. 하지만 히루키와의 만남은 아쉽게 됐다.
짹짹이 피드를 하나하나 번역기로 돌려 본 히루키는 큰 상처를 받았다.
‘이상 작가는 날 만나고 싶지 않은 건가...’
다른 후배 작가였다면 자존심이 상했을 거다.
다신 상종도 하기 싫었을 정도로.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상 작가에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 대뜸 만나자고 했으니 놀랐을 수도 있다. 내가 무례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 또... 한국인 아닌가.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을 수도 있어.’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달래 봐도...
구겨진 마음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히루키는 언제나 그랬듯 선베드에 누워 주스를 홀짝였다.
“역시 덕질이란 힘들구만. 실연당한 기분.”
그렇게 씁쓸하게 중얼거릴 때였다.
우웅-
진동이 울렸다.
짹짹이의 알람이었다.
평소에는 알람이 너무 많이 와서 꺼두는데, 어쩌다가 켜놓은 모양이다.
히루키는 힘없이 짹짹이로 접속했다.
전 세계에서 날아 온 수천 개의 읽지 않은 쪽지들.
그 가장 위에, 익숙한 이름이 하나 떠 있었다.
“이상?!”
눈이 번쩍 뜨였다.
얼른 쪽지를 확인했다.
그 쪽지에는 어딘가 예스러운 일본어로 쓰인 단정한 글이 담겨 있었다.
-오해가 있을까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립니다. 항간에 떠도는 글들에 괘념치 말아 주십시오. 극본 집필 작업과 강의로 시간이 잡혀 있어 부득이하게 일본에 갈 시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당신을 존경하는 독자로서, 신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상 배상.
히루키가 히죽 웃었다.
“역시, 이상 작가가 그럴 리 없지.”
그새 마음이 풀렸는지, 히루키는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신의 서>의 한국어 번역본이 나오면, 바로 선물로 보내야겠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햇빛을 만끽하는 히루키.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히루키는 슬리퍼를 바쁘게 끌며 수영장을 돌아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집필실 탁자에는 신작 <신의 서> 일본어 초판본이 쌓여 있었다.
초판본의 의미는 남다르다.
특히 히루키의 초판본은 더욱더 귀했다.
<신의 서>가 출간되던 날, 사람들은 바로 이 초판본을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서점 앞에서 줄을 섰다.
히루키가 가진 초판본도 고작 스무 권 남짓.
그는 그중 한 권을 미련 없이 펼쳤다.
그리고 책의 첫 장인 면지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천재와의 만남을 기원하며. 2021년 04월 29일. 무라카미 히루키 드림]
그렇게 친애의 메시지를 적은 후,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니저 쇼이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히루키 선생님.
“쇼이치. 잘 지내고 있지?”
-예. 선생님께서도 휴가 잘 보내고 계십니까.
“그럼. 내일 들리기로 했지? 국제소포를 하나 보낼까 하는데 대신 부쳐줄 수 있나 해서.”
그런 일은 매니저가 당연히 해야 할 업무였다.
하지만 히루키는 그런 사소한 부탁을 할 때도 꼭 양해를 구했다.
-그럼요. 급한 거라면 좀 일찍 가겠습니다.
“내일 안으로만 부치면 될 것 같아. 그리고 해외 번역서 말인데...”
-예. 순서는 정하셨습니까? 말씀만 해주시면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세계 시장 첫 번역본은 계획했던 대로 미국으로 가. 나머지는 동시에. 어차피 첫 순서가 아니면 홍보의 의미가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시아의 첫 시장은 한국으로 해줘.”
-한국이요?
매니저는 의외라는 말투였다.
한국은 워낙 출판 시장이 작아 투자를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또, ‘아시아에서 처음’이라는 홍보를 굳이?
“날 믿고 그렇게 해 줘.”
-선생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진행하는 게 맞습니다만, 굳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당장은 설명하기 힘들긴 한데... 그냥 내 감이야.”
-감이요?
“한국 콘텐츠 시장에 곧 문학의 붐이 일어날 것 같거든. 누군가가 그 흐름을 만들어줄지도 몰라.”
***
교학팀 사무실에서 극본을 쓰던 중이었다.
우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짹짹이 쪽지 알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히루키의 답장이었다.
-답장을 보내주셔 감사합니다. 전혀, 절대 오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매니지먼트 주소나 댁의 주소를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매니지먼트는... 지훈이?
지훈이 주소가 곧 내 주손데.
그런데 뭘 보내려고 묻는 거지?
내용물을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주소와 간단한 감사 인사를 적어 답장을 보냈다.
잠시 후, 강인춘 PD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PD님.”
-어어, 이 작가. 지금 종로로 올 수 있어? 맨날 가던 소줏집.
강인춘 PD와는 얼마 전 술자리에서 훨씬 더 편한 사이가 됐다.
내가 얄미운 막내 동생 같다나.
“네. 이제 조교 근무 시간도 마무리되어가니까 7시쯤 갈게요.”
-조교 그만해도 되지 않아? 이 작가 돈도 많이 벌면서.
“아뇨. 해야 하니까 하는 거거든요.”
조교 계약은 학기 단위로 이루어진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수료를 할 때까지 죽 할 수 있고.
혜경은 학비를 면제받기 위해 이 일을 힘겹게 구했다.
지금 내가 돈 좀 번다고 해서, 이 자리를 박차고 나는 건 인지상정이 아니다.
학기 중엔 급하게 들어 올 후임을 구하기도 어렵고.
지금 좀 바쁘고 힘들더라도 이번 학기까지는 잘 마무리를 해야겠지.
***
이제는 지겨운 종로의 소줏집.
강인춘 PD는 이미 술을 한 잔 들이켜고 있었다.
“저 왔어요.”
“이 작가. 잘 왔어. 히루키가 사랑한 작가~”
“어휴, 말도 마세요.”
강인춘 PD는 킬킬거렸다.
“인기인이란 원래 곤란한 법이야. 극본은 잘 돼가?”
“8화 마무리 중이에요. 다음 주 회의 때 가져가게요.”
“빨리도 쓰네. 기성 작가들도 글 안 나와서 몇 개월을 삽질하는데.”
“기획안이 있는데요, 뭐.”
기획안대로 쓰면 되는 것을.
오류가 생기면 봐주는 PD들도 있고.
‘글이 안 나오는 상황’이라... 그건 어떤 기분일까.
“그런데 갑자기 왜 부르셨어요?”
“우리 캐스팅. 확정됐어.”
강인춘 PD는 태블릿PC를 꺼내 화면을 하나 띄워주었다.
엄청난 미인의 사진이었다.
“여배우는 정해졌어. 한예린. 알지?”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예린은 알지.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는 여배우 아닌가.
특유의 낮은 음색과 긴 생머리.
신비롭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주는 매력적인 배우다.
나는 내 상상 속의 <무너지는 날>과 한예린의 이미지를 합쳐보았다.
“...잘 뽑으셨는데요?”
“한예린도 극본 보자마자 콜했어. 너무 좋다고. 걔 극본 보는 눈이 진짜 좋거든.”
“남자 배우는요?”
“야. 그거 진짜 골 아팠다. 지금 주가 제일 높은 배우, 윤지상. 알지?”
강인춘 PD는 사진을 넘겼다.
엄청나게 수려한 남자의 사진이 나왔다.
“많이 본 것 같아요.”
“많이 본 정도가 아닐걸? 소속사도 빵빵해서 엄청나게 밀어주거든. 보다시피 마스크가 정말정말 괜찮고. 대중적 인지도도 좋아. 연기도 뛰어나고. 다 가졌지. 극본 보자마자 자기가 하겠다고 먼저 이쪽으로 직접 연락했어.”
“감사한 일이네요. 그래서 윤지상이에요?”
“좀 더 들어봐. 그리고 이 배우.”
강인춘 PD는 사진첩을 넘겼다.
윤지상에 비하면 평범하고 수수한 배우의 사진이었다.
“최오준. 연극판에 오래 있다가 영화판 와서 명품 조연 소리 듣는 친구야. 소속사가 신생이라 서포트가 어설픈데 배우 본인이 워낙 열심히 해. 근데 필모가 좀 세. 좋은 의미로 센 게 아니라 너무 거칠다고 해야 하나. 살인마, 악역, 정신이상자... 이런 역할을 많이 했어.”
그런 역할을... 할 법한 마스크긴 했다.
그의 눈에는 어딘가 광기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뭔가에 집요하게 파고들어 꿰뚫어버릴 것만 같은 눈빛.
“솔직히 말하면 흥행 보증 수표는 윤지상이야. 최오준은 복불복이고.”
“피디님들 의견은 어떤데요?”
“나 빼고 2대 2.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최오준 뽑았어.”
둘 다 훌륭한 배우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강인춘 PD가 최오준 배우를 뽑았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오준 배우를 뽑은 이유는요?”
“이건 직업물이잖아. 건축가라는 전문가물. 너무 예쁘고 잘생긴 얼굴보다는 뭐 하나에 미쳤을 법한 얼굴이 더 잘 맞아.”
“뭐 하나에 미쳤을 법한 얼굴...”
“물론 초반 홍보가 아쉬울 순 있어. 그만큼 엠플릭스 쪽에서 애써 봐야지. 그리고 한예린과의 캐미도 그래. 여자 주인공, 대단히 신비롭잖아. 이 신비로운 배우를 살려주는 건 상대 배우의 아우라야. 아우라 면에서 최오준이 윤지상보다 낫지.”
아우라.
그것은 예술품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힘을 뜻했다.
윤지상의 느낌이 고급 기성품이라면, 최오준의 느낌은 마니아들이 열광할 만한 예술품이다.
강인춘 PD는 <무너지는 날>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나 역시, 처음 이 드라마를 구상했을 때 집념이 느껴지는 남자의 얼굴을 상상했다.
강인춘 PD라면... 그의 안목에 걸어보자.
“좋네요. 저도 찬성이에요.”
강인춘 PD가 씩 웃었다.
“PD님, 저번에 말씀하셨던 예술 어쩌고 했던 거 말이에요.”
이 말을 하니 싹 삐진 표정으로 돌변한다.
“그거, 왜. 안 해준다며.”
“...해 보게요. 대신 후반부에.”
“뭐? 정말이야?”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초반은 막장미로 시작하게요. 하지만 10화 이후론 해볼 만하죠. 그때까지 함께 한 팬들의 몰입도는 초반과 다르니까요. 좀 더 깊이 있게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맞아! 맞아.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야, 이 작가. 나 아무한테나 그런 부탁 하는 사람 아닌 거 알지? 너니까 하는 거야, 너니까. 너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순문학과 드라마의 융합.
강인춘 PD는 오랫동안 그걸 바라왔댔다.
그러니 이렇게 좋아하는 거겠지.
“단, 이 경우엔 배우가 정말 훌륭해야 해요. 막장도 해내야 하고, 명품도 해내야 하니까.”
“배우는 걱정 마. 내 눈을 믿어.”
“좋아요. 그럼 막장으로 시작해서 명품으로 끝내보죠.”
나는 강인춘 PD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한예린과 최오준... 과연 어떤 배우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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