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31화 (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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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30)

다시 사는 천재 작가 30

사실 극본을 썼을 땐 꼭 ‘상’을 노린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필요한 건 ‘상금’이었으니까.

하지만 ‘대상’의 특혜는 컸다.

추가 심사 없이 제작과 편성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수상작들은 지금부터 쟁쟁한 기성 작가들의 작품과 경쟁을 해야 한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은 작품만이 편성을 받을 수 있겠지.

강인춘 PD의 말이 맞다.

드라마 판은 ‘정글’이다.

<무너지는 날>의 제작 스케줄은 아주 빠듯했다.

나는 상을 받자마자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가야 했다.

드라마도 소설처럼 내 마음대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으면 얼마냐 좋으랴.

처음 해보는 공동 작업이란 골치 아픈 것이었다.

시상식이 끝난 다음 날,

계좌엔 세금을 제한 상금 사천팔백만 원 가량이 들어와 있었다.

다음 순서는 정식 계약이었다.

엠플릭스 기획팀은 나를 본사로 불렀다.

기획팀장 이솔은 계약사항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원고료에 대한 얘기는 들으셨죠? 총 16부작을 창작하셔야 하고, 고료는 회당 오백씩 나갑니다. 총 4회에 나눠서 드릴 거예요. 이번 주 안으로 1차 계약금 이천 만 원이 지급될 거고요. 신인 극본가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고료예요. 단...”

기획팀장 이솔은 스읍, 하고 뜸을 들였다.

“PD님의 동의가 있어야 극본이 패스된다는 거, 아시죠? 엠플릭스 쪽에서 원고에 개입할 수도 있고요.”

내 원고의 질이 떨어지면 그들의 의견에 맞춰 수정을 거듭해야 할 수도 있단 얘기였다.

“알고 있습니다. 기획팀까지 손대지 않도록 강인춘 PD님과 잘 협의하겠습니다.”

“개인 작업을 하셨던 분이라 걱정했는데... 얘기가 잘 통하는군요. 아, 혹시 원하는 배우님이 계신가요? 그분들을 캐스팅 할 수 있단 장담은 못 드리지만, 적어도 비슷한 느낌으로 찾을 순 있으니까요.”

“배우는 잘 몰라요. 그쪽은 맡기는 거로 하죠.”

“그럼 그 부분은 믿고 맡겨주세요. 여기, 사인해주시고요.”

나는 그가 건네는 계약서 여기저기에 사인을 했다.

그는 계약서를 챙겨 봉투에 넣으며 말했다.

“엠플릭스의 극본가가 되신 걸 환영합니다.”

“영광입니다. 이전에 드린 1, 2화는 그대로 진행되는 거겠지요?”

“그럼요. 계속 그렇게만 써주세요. 기획안도 저희 쪽에선 모두 패스입니다.”

“그럼 강인춘 PD님과 잘 협의하는 것만 남았군요.”

“하하... 그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워낙 별나신 분이라서요.”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강인춘 PD는... 생각보다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

첫 번째 극본 회의.

강인춘 PD와 다른 기획 PD들, 제작진 등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그들은 내가 미리 보낸 4회분의 극본을 보고 말했다.

“여전히 좋은데요? 이대로만 쭉 가면 될 것 같은데.”

“이 드라마는 극본이 아니라 씨지 팀에서 문제겠는데? 그쪽에 돈 좀 들이라고 해야겠어. 이걸 다 구현하려면...”

“투자사들 많이 붙어서 괜찮아요. 돈 좀 팍팍 쓰죠, 뭐. 촬영 세트장은 강원도 쪽에서 올리고 있죠?”

“맞아요. 편성이 약속된 건이라 다들 마음 편하게 작업하고 있어요. 아, 이상 극본가님이 그려주신 건물 그림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건축가 선생님도 놀라시던데요?”

“그러게요. 극본가님, 그림 배우셨어요? 엄청 잘 그리시던데.”

건축 기사 시절, 내 강점은 정확한 설계였다.

아직도 웬만한 설계도는 그럴듯하게 그릴 수 있었다.

“건축에 관심이 많아서요. 잘 구현하셨다니 다행이에요.”

내가 기획 PD들과 그런 평화로운 회의를 하는 동안, 강인춘 PD는 내 극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야... 조금만 더...”

“혹시 수정할 부분이 있을까요?”

나는 강인춘 PD에게 물었다.

“다 좋아요, 다 좋은데... 좀 더 예술적인 면에서 욕심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여기, 주인공이 과거로 가는 부분에서도 말이에요... 화면이 그냥 전환되는 게 아니라 상징적인 말을 읊는다거나...”

“음... 그러면 멋진 사족이 되지 않을까요? 확실하게 드라마적 상품성을 확보하는 게 먼저일 것 같아서요.”

“드라마적 상품성은 이미 충분하잖아요, 이상 작가. 이렇게 좋은 작품인데, 아깝지 않아요?”

강인춘 PD의 불타는 눈을 보라.

<무너지는 날>에 빠져도 너무 빠졌다.

“강 PD님 또 시작이시네...”

기획팀장 이솔이 킥킥 웃는다.

“아니, 이렇게 좋은 작품을! 아깝잖아요. 조금만 더 예술적으로 나가보자고요, 응?”

...막장미를 넣으라 할 땐 언제고.

“이건 드라마잖아요. 시청자들이 원할만한 걸 해주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요.”

“막장미는 그대로 두고, 예술성을 살짝 가미해주는 거지. 이상 작가, 소설가로서 그런 욕심 안 들어요?”

“...전 지금 극본가라서요.”

이쯤 되니 다른 기획 PD들이 으하하 웃는다.

“강 PD 원래 좋은 작품 만나면 없던 예술성 찾아요. 이상 작가가 이해해요.”

“맞아요. 웬만한 작품에는 저렇게 억지 안 부리는데 <무너지는 날>이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네.”

“오히려 이상 작가님이 PD 같은데요?”

“좀 쉬었다 합시다. 강 PD, 나랑 같이 나가서 머리 좀 식혀.”

사람들이 강인춘 PD를 데리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이솔 기획팀장이 내게 슬쩍 말했다.

“강 PD님 때문에 귀찮죠? 워낙 변덕도 심하고 불같은 인간이라.”

“아니, 뭐... 귀찮은 것보다, 갑자기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강 PD님 머릿속엔 <무너지는 날>이 완성됐거든요. 그래서 그 이상을 바라는 거예요. 하지만 걱정은 마세요. 강 PD님이 저렇게 나온 작품들, 실패한 거 단 하나도 없거든요.”

“하하... 공동 작업의 묘미라고 생각해요. <무너지는 날>이 저만의 작품이라 생각하지도 않고요.”

“여담이지만... 강 PD가 한때 소설가 지망생이었거든요.”

“네?”

강인춘 PD가 소설가 지망생이었다고?

“전공이 방송문학이긴 해요. 하지만 신춘문예도 도전하고 최종심까지 간 적도 있대요. 지금은 그 꿈 깨끗하게 접었지만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말했었지.

자기가 남들보다 소설을 몇 배는 읽었다고.

“저한테 딱 한 번 술 먹고 이런 얘기 한 적 있거든요. 드라마의 대중성과 순수문학의 고아함을 융합해보고 싶다고요. 그런데 그게 좀 위험하잖아요. 어정쩡해질 수도 있고. 본인도 그 점을 알긴 하는데,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죠.”

그때, 강인춘 PD와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마요. 신춘문예 낙방한 거 창피해하니까.”

이솔 기획팀장은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곤 자리로 돌아갔다.

회의는 다시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잘 달랬는지, 강인춘 PD는 극본을 오케이 했다.

좋다. 이로써 <무너지는 날>의 도입부는 픽스.

이제 중후반부가 남았다.

기획은 더 건드릴 게 없다.

다만 세세한 표현의 문제가 남았다.

드라마의 대중성과 순수문학의 고아함. 그리고 그 융합.

그의 그런 포부 아닌 포부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문학의 지도’를 하나로 합치고 싶은 내 욕심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고.

중후반부에 그런 시도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리스크다.

그의 의견을 수용해서 한 번 더 모험을 해볼 것인가.

아니면 이미 안전하게 깔아놓은 길을 갈 것인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우여곡절 중에도 극본은 한 편씩 완성이 되어 갔다.

이제 다음 순서는 배우들을 고르는 것.

***

신변의 변화가 한 가지 더 있었다.

고대하던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학교 근처에서 움직이는 것이라 일은 적었다.

우린 반나절 만에 사는 곳을 뚝딱 옮겼다.

지훈이가 구한 집은 학교 후문에서 멀지 않은 신축 빌라.

깨끗하고 넓은 내부가 꽤 마음에 들었다.

각각의 방을 하나씩 정한 후, 남은 방 하나는 작업실로 꾸미기로 했다.

글을 쓰고 번역과 홍보 작업을 하는 곳이랄까.

짐을 정리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교학팀에서 퇴근한 금홍이가 찾아왔다.

“샘들- 저녁 사 왔어요.”

“밥이다! 형! 금홍 샘 왔어요.”

방에서 책을 정리하던 나는 바람같이 튀어 나갔다.

“오셨어요?”

“짐이 되게 많네요. 회 드시죠? 회 사 왔는데.”

“안 사 오셔도 괜찮은데. 진짜 잘 먹을게요.”

취준생이 돈이 어딨다고...

금홍이는 착해도 너무 착하다.

우리는 대충 바닥에 앉아서 회를 먹기 시작했다.

몸 쓰는 일을 하느라 허기가 졌던 터라, 잘도 넘어갔다.

“집이 진짜 크네요.”

“형이랑 제 돈 다 털었어요. 잘 구했죠?”

“네. 지훈 샘은 진짜 정보력이 최고인 것 같아요.”

“제가 이쪽에 머리가 트였다니까요. 혜경 형 혼자서는 절대 못 찾았을걸요?”

지훈이 깔깔대며 잘난 척을 했다.

할 말이 없긴 했다.

지훈이 없었더라면 난 아직도 그 작은 자취방에 있었을 거다.

“저... 이사 선물도 가져왔어요.”

금홍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생수병만 한 유리병이었는데, 그 안에 가득한... 멜론조각?

“멜론주예요.”

금홍이 내게 멜론주를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걸 받았다.

“어... 이거 직접 담그신 거예요?”

“네. 저번에 시상식 끝나고 한번 담가봤어요. 두 달은 더 있어야 맛이 완전히 들겠지만... 축하주로 지금 한 잔씩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금홍이가 담근 멜론주라니.

너무나 완벽한 조합에 할 말을 잃었다.

“컵 가져올게요.”

지훈이가 얼른 종이컵을 세 개 가져왔다.

그리고 그 담금주를 조금씩 따랐다.

“진짜 고맙습니다, 금홍 선생님.”

금홍이가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사실 저한테도 축하할 일이 있거든요.”

“무슨 일이요?”

“저 바리스타 자격증 2급 붙었거든요.”

“금홍 샘! 진짜 축하해요! 난 샘 될 줄 알았다니까.”

지훈이 금홍이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 시험에 붙었구나.

“축하해요. 제 극본 잘 된 것도 금홍 샘 덕분인 거 알죠?”

“에이, 아니에요. 제가 뭘 도왔다고.”

“어? 금홍 샘이 형 극본 도와줬어요?”

“어. 현대 한국의 극본에서 가장 중요한 ‘막장미’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지.”

“으하하하하!! 금홍 샘 대단하잖아요!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요?!”

“드라마 좀 열심히 봤어요. 됐어요? 아, 그만 좀 웃어요, 지훈 샘!”

금홍이가 발끈해서 지훈을 타박했다.

나는 지훈이 더 까불다가 금홍이에게 맞기 전에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작업실 다 꾸몄는데 구경이라도 하시죠.”

“그래요. 지훈 샘, 이따가 봐요?”

“아아, 미안해요. 안 놀릴게요.”

우리는 작업실로 들어갔다.

세 개의 테이블은 각각의 벽에 붙어 있었다.

그 중앙에는 작은 원형 테이블을 두었고.

“여기서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글도 쓰고, 번역도 읽고, SNS 홍보 작업도 하고 홈페이지도 관리하고 또, 회의도 해요.”

“저는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 없는데... 번역만 하면 되는데요.”

금홍이는 좀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책상 하나 더 놓은 건데요, 뭐. 필요하시면 샘 바리스타 자격증 공부도 하세요. 1급 따실 거잖아요. 그렇죠?”

알아보기론, 1급과 2급은 천지 차이라고 했다.

정신 사나운 교학팀 사무실에서 그 공부를 하게 할 순 없지.

“... 그거야 그렇지만... 믿기질 않네요. 이런 공간까지 마련해주시고.”

“그걸 빨리 따셔야 맘 놓고 번역도 하시죠. 금홍 샘이 그만두실 때까진 계속 번역 맡길 생각이니 이쪽 일은 걱정 마세요.”

“고마워요, 혜경 샘... 1급도 꼭 붙을게요.”

금홍이는 진짜 고마웠는지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한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힘겹게 내려야 했다.

그때였다.

우웅-우웅-

누군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훈이었다.

“누구지? 모르는 번혼데... 여보세요?... 네. 아, 네 맞는데요.... 네?! 제가요?! 왜요!?... 예?!... 아, 예... 예... 아... 예. 네... 그럼... 예... 가, 감사합니다...”

지훈은 그렇게 더듬거리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넋 나간 표정으로 허공만 바라보는 것이다.

“뭐야, 누구기에 그래?”

“형...”

“어.”

“...나 신라문학에 비평 낸 거... 당선됐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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