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24화 (24/204)
  • #   24 - 3806961

    #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23)

    다시 사는 천재 작가 23

    엠플릭스 드라마 부문 심사장.

    밤 열 시에 시작했던 심사는 새벽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펄럭-펄럭-

    기획안들이 우후죽순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획안을 떨어뜨리는 심사위원들의 손길도 빨라졌다.

    심사위원들도 지칠 대로 지치고, 지루해졌다는 의미.

    “아후....”

    강인춘 PD가 기지개를 켰다.

    지금가지 그가 떨어뜨린 작품은 백 개는 족히 넘었다.

    건진 건 두 작품.

    그마저도 뽑을 게 없어 개중 나은 것을 고른 것뿐이다.

    강인춘 PD는 펜을 탁, 하고 내려놓곤 짜증을 냈다.

    “대체 뭘 건지란 거야? 이건 뭐 하나같이 멜로물이잖아.”

    극본 작가 송예나가 킬킬거렸다.

    “우리나라는 드라마라고 하면 멜로 생각하니까요.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전문가물이라고 써놨으면 그쪽으로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습작생들이 그게 쉽나요~”

    기획 팀장 이솔이 체념투로 말했다.

    강인춘 PD외에도 다들 뽑을 만한 작품을 찾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세상 경험이 좁아서야...난 시마이! 두 개만 뽑을래!”

    강인춘 PD는 양 손을 들었다.

    어차피 1인분 이상은 해냈으니 쉴 자격이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저기 소파에서 좀 쉬세요.”

    송 교수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송 교수는 이상에겐 자신이 엠플릭스의 심사위원장이나 되는 듯이 굴었다.

    하지만 실상은 심사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초빙교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실권을 잡고 있는 PD의 눈치를 볼 수밖에.

    “예. 교수님. 저는 그럼 좀 쉬겠습니다. 2차 때는 제가 더 열심히 볼 게요.”

    “예예, 그럼요.”

    강인춘 PD는 소파에 벌렁 누웠다.

    ‘머리 아파...올해는 어쩌면 당선작을 못 낼 수도 있겠어. 그럼 제작은 뭘로 하지? 차라리 웹툰 쪽을 뒤져볼까.’

    드라마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콘텐츠였다.

    망하면 리스크가 어마어마하다.

    신인 작가의 극본이란 안 그래도 모험인데, 애매한 작품을 뽑으라고?

    “하아...”

    드라마를 총괄해야 하는 PD로서, 속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어. 뭐라도 더 봐야지. 손 놓고 있을 수야 있나.’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작품들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어차피 떨어진 작품이지만, 혹시 몰라서.

    혹은 이대로 가만히 있기엔 불안해서.

    ‘역시...아니고....아니고...이것도 아니고...’

    기획안들이 빠르게 넘어간다.

    ‘...아니고...역시 어쩔 수 없나...이건...음?’

    <무너지는 날>

    강인춘 PD는 그 기획안 앞에서 멈칫했다.

    ‘건축가물이라. 쉽지 않은 장르지만...가시적인 매력이 커서 영상미가 좋겠지. 중산층에서 인테리어 붐을 일으킬 수도 있고. 내용은 어떻지?’

    “흠...판타지도 좀 섞였고...”

    강인춘은 <무너지는 날>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작품을 누가 떨어뜨린 거지? 분명 저쪽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의 시선이 송 교수의 등에 닿았다.

    그는 송 교수를 차가운 눈으로 빤히 바라봤다.

    ‘다음 심사 때는 저 교수를 부르면 안 되겠어.’

    ***

    “스물 하나...스물 둘....”

    저녁을 먹고 방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던 중이었다.

    하루에 8시간 취침, 1시간 운동.

    운동도 습관이 되니 하지 않으면 허전할 정도였다.

    “스물 셋...스물...넷...”

    우웅-

    문자가 왔다.

    나는 나머지 열다섯 개를 다 채우고 나서 핸드폰을 살폈다.

    -제 2회 엠플릭스 드라마 공모전 결과가 나왔습니다. 홈페이지를 확인해주세요.

    ...맞다.

    나 드라마 공모도 냈었지.

    그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신춘문예 결과를 기다리던 중에 냈던 드라마 기획안.

    심사가 세 달 가까이 걸린다더니, 정말 3월에야 결과가 나오는구나.

    난 바로 컴퓨터를 켰다.

    떨어졌을 수도 있다.

    송 교수가 엠플릭스 심사장에서 손을 썼다면 막을 재간은 없을 테니.

    뭐, 떨어지면 다른 곳에 내면 그만 아닌가.

    내 글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부활> 덕분에 지갑도 꽤 두둑해졌으니 괜찮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엠플릭스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상?”

    [대상 : <무너지는 날>_이상]

    ...이건 좀 놀라웠다.

    소설도 아니고, 드라마에서 대상이라니.

    당황한 것도 잠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내가 2021년 대중의 니즈를 읽어냈다.

    이건 내게 있어 의미있는 수확이었다.

    소설을 읽는 독자와 드라마를 보는 대중은 다르다.

    그 독자와 대중이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다른 눈으로 콘텐츠를 소비한다.

    즉, 장르마다 원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

    소설을 소비하는 독자들은 현실의 진실을 알길 원한다.

    드라마를 소비하는 시청자들은 현실을 탈피하길 바란다.

    내가 드라마에 섞은 판타지성이 그 지점에서 먹혔을 거다.

    가장 먼저 김혜경이 생각났다.

    드라마 문법을 이해하는 데에는 김혜경의 공이 컸으니.

    “...하지만 혜경은 없으니...”

    역시 부모에게 알리는 게 제일 좋겠지.

    여담이지만, 나의 부모는 너무 가난해서 날 낳자마자 큰아버지 댁에 맡겼다.

    큰아버지의 엄격함과 큰어머니의 눈칫밥.

    결코 편안하지 않은 환경에서 나는 부모의 정을 느껴볼 새도 없이 어른이 되었다.

    이런 내게 자상한 아들 노릇은 고역이었다.

    어색하고, 뱃속이 뒤틀리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 해 혜경의 부모에게 아들 노릇을 할 것이다.

    그것이 혜경과 그의 부모에 대한 예의니까.

    나는 혜경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드라마 극본 공모전 당선 사실을 알렸다.

    -혜경아...네가 드디어 일이 풀리나보다. 엄마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서울에서 혼자 고생 많았다. 장하다.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상금은 너 다 써. 저번처럼 괜히 우리한테 보내지 말고. 우린 쓸 데도 없다.

    혜경의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의 농사일은 고되기만 할뿐,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요. 오백 정도는 보내드리려고요.”

    -아, 이놈아 됐대두!

    “아니에요. 이렇게 건강하게 계셔주시잖아요.”

    -이놈이...

    혜경의 아버지는 눈물을 삼키는 것 같았다.

    “진심으로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놈아, 부모가 자식 잘 되는 거 기뻐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별 소리를...

    “그래도요. 당연한 게 아닌 거 알아요.”

    전화를 끊은 후, 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들 노릇이 썩 편하진 않았지만...해야 할 일이었다.

    혜경의 부모가 아들의 부재를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돈은 언제 들어오지?

    제작은 언제부터 되는 거고?

    당선 발표 페이지를 뒤적거리던 나는 맨 밑에 있는 글을 그제야 발견했다.

    -수상자분들께는 별도의 연락이 갑니다.

    “별도의 연락이라.”

    그 ‘별도의 연락’이 온 건 한 시간 즈음 뒤의 일이었다.

    우웅-우웅-

    모르는 번호.

    나는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이상 선생님 맞으신가요?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엠플릭스 본사 기획실이고, 저는 공모전 담당 주임 이소연입니다. 이번에 엠플릭스 원작 드라마 공모에 <무너지는 날> 기획안 투고하셨죠? 홈페이지에서 당선자 명단 확인해보셨나요?

    “네.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상 선생님의 <무너지는 날>이 대상 수상을 한 것도 확인하셨죠?

    “네.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소연 주임은 무덤덤한 내 반응에 살짝 당황하는 듯했다.

    하지만 필드에 있다 보면 온갖 사람을 다 만나는 법.

    그녀는 곧 능숙하게 시상에 대해 설명했다.

    -먼저, 대상작의 경우엔 상금 오천만원이 시상식 직후 바로 지급됩니다. 또한 작품 제작에 바로 착수하고요. 그 제작을 위해 PD님을 비롯한 제작진과의 만남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죠?

    PD와의 만남이라.

    그건 좀 구미가 당겼다.

    순문학이 아닌 대중 콘텐츠는 어떤 사람들이 만드는 걸까.

    “괜찮습니다. 기대가 되네요.”

    -네. 그리고 투고를 하셨을 때 이미 동의를 해주신 부분으로, 드라마 제작을 위한 극본 집필 시 편당 고료를 오백만 원으로 책정하여 드립니다. 또한 해외에 판권을 파는 경우 업계 통상적 계약 조항에 따라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있고요.

    편당 고료와 해외 판권.

    확실히 대중 매체로 가니까 돈이 훅 뛰는구나.

    앞으로 16화의 대본을 더 쓸 것도 기대가 되고.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궁금한 건...

    “좋네요. 그럼 PD님은 언제 만나 뵈면 될까요?”

    -제가 따로 연락처를 전달드려도 될까요? 원래 엠플릭스 측에서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해드리는데, 이번에는 PD님과 극본작가님께서 이상 선생님을 따로 뵙고 싶다고 하셔서요.

    “극본 작가님까지요?”

    -네. 앞으로 16화까지의 극본을 집필하실 때, 극본작가님의 도움을 받게 되실 수도 있거든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그런데 PD님 성함이 어떻게 되죠?”

    -강인춘 PD님입니다.

    강인춘 PD.

    나는 노트에 펜으로 ‘강인춘’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혜경의 기억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현재 드라마판에서 가장 잘 나가는 PD 중 한 명이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선생님. 혹시...소설 쓰시는 이상 선생님과 같은 분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어머! 정말이었네요. 설마설마했는데...저희 엠플릭스 쪽에서도 소설이나 문단 쪽에 관심이 많거든요.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혹시...저희가 선생님 작품에 대한 표절 여부나 방송 심의 기준 여부에 대한 확인을 마치면, 선생님에 대한 부분을 기사에 내도 될 까요?

    “제 부분이라면 어떤...?”

    -뭐...이를테면, 소설가 이상이 드라마 판을 접수한다? 뭐 이런 내용 아닐까요?

    “아..아하하하!! 하하하...”

    그것 참, 귀여운 표제였다.

    나의 수상으로 드라마 홍보를 하고 싶다는 말이구나.

    뭐, 나쁠 것 없지.

    내가 드라마를 쓴다는 사실을 숨길 일도 아니고.

    “좋습니다. 다만, 제 기사를 주로 써주시는 기자분이 계신데...가능하면 그 분께 맡겨도 될까요?”

    -음...가능하면 그렇게 해보도록 할게요. 어떤 분이시죠?

    “Y일보의 서인희 기자님이십니다.”

    -오...Y일보면 큰 일간지네요?

    ‘신인 주제에 제법이네?’하는 듯한 말투였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뭘요. 다시 한 번 당선 축하드립니다, 이상 작가님.

    긴 전화가 끝났다.

    나는 침대에 벌렁 대자로 드러누웠다.

    “극본이라...아무래도 당분간은 그쪽에 집중해야겠네.”

    지망생과 프로는 다르다.

    학생이었던 혜경의 지식만으로는 프로의 글을 쓸 순 없다.

    유명 극본들을 작파하고 PD와도 얘길 나눠봐야겠지.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좋은 건 상금과 원고료.

    방송가는 문단과 다르다.

    자본의 운용이 유연하고, 투자자도 무궁무진하다.

    상금과 16화 원고료를 합치면...세금을 떼도 1억이 넘는다.

    돈 생각이 난 김에 핸드폰으로 홈페이지에 접속해 봤다.

    <부활> 한국어 페이지의 접속자는 사천.

    일본어 페이지의 접속자는 오백 이십.

    돈으로 환산하면 천만 원 가량.

    한국은 워낙 판이 작으니 <부활>의 구매율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일본 시장을 잘 잡는다면?

    “...괜찮은데?”

    당분간 돈 걱정은 없겠다.

    ...마음이 너무 편하다.

    평생 동안 날 따라다녔던 가난의 그림자가 서서히 가신다.

    돈 걱정 하지 않고 밥을 먹고,

    돈 걱정 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니.

    이미 작가로선 부러울 것 없는 삶이다.

    지금 난 난생 처음으로 ‘만족’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마음 안에서 퍼져가는 이 안정감과 편안함...

    흠...다음 소설은...‘만족’에 대한 새 글을 써볼까.

    그렇게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문득,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집이 너무 작은 거 아닌가?

    색종이만한 거실,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방.

    혜경이 틀어박혀 있던 우울과 고독과 가난의 공간.

    그래. 조만간 이사부터 가자.

    천재의 집이 이래서야 쓰나.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