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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18화 (18/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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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17)

다시 사는 천재 작가 17

늦은 저녁.

이현강은 와인을 한 잔 마시며 신작 소설을 쓰고 있었다.

한 달 전, 복귀작으로 발표한 소설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아는 평론가 몇 명이 문학잡지에서 언급을 해 준 정도.

필력도 주제의식도 충분하다.

문제는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은 작가의 운명과도 같았다.

때문에 작가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그 부담을 이겨낸다.

책으로, 종교로, 혹은 술로.

하지만 이현강은 방법은 조금 독특했다.

그의 책상에 가득 쌓인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소설들.

이들 중 눈에 띄는 스타일이 보이면, 이현강은 교묘하게 자신의 소설에 가져다 썼다.

표절?

문장이 같은 것도 아닌데 표절을 누가 판단하는가.

학생들의 소설은 어설프다.

결과적으로, 아이디어를 능숙하게 잘 살리는 이현강의 글을 이길 순 없다.

우웅-우웅-

이현강의 눈썹이 꿈틀했다.

‘핸드폰 꺼두는 걸 잊었군.’

창작을 할 때 그는 극도로 예민했다.

게다가 지금처럼 남의 스타일을 가져오려 할 땐 더더욱.

그는 핸드폰을 꺼버리려 하다가, 멈칫했다.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한국대학교 국문과 박 교수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어어. 오랜만이야.”

-이 교수? 잘 지냈어?

“그럼. 자네는? 요즘 한국대 국문과가 꽤 뒤숭숭할 텐데.”

한국대 국문과에서 조인창 교수의 위치는 절대적이었다.

그런 대 학자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과의 분위기가 괜찮을 리가.

-안 그래도 정신이 하나도 없어. 저기, 그거랑 관련해서 자네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말이야.

“부탁?”

이현강이 얼굴을 찌푸렸다.

“뭔데 그래?”

-자네 제자한테 대강 얘긴 들었지? 우리학교 문학창작 특강.

“무슨 얘길 들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상이 얘기 안 해?

“이상?”

갑자기 웬 이상?

이현강은 그렇게 되물으려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김혜경?”

이현강은 황급히 일어나 창문을 벌컥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이마를 쓸고 지나갔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박 교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상황을 다 전달한 후,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자네 제자, 진짜 보통이 아니더구만. 학과장에다가 원로교수님까지 다 넘어갔어. 특강 강의를 기어코 하려나 바.

“자네는 그놈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

이현강이 슬쩍 그를 떠봤다.

-맘에 들고 안 들고 할 게 뭐 있어. 결국 강사 나부랭이인데...문제는 그 자리, 내 후배에게 주기로 했단 말이야. ...까놓고 말할게. 후배놈이 시계를 두 개나 채워줬는데, 내가 별 수 있나.

‘어설프기는.’

이현강이 속으로 혀를 찼다.

불확실한 자리를 약속하며 금품을 받는 것도 어설펐고,

교수나 되어가지고 타학교 대학원생 하나 내치지 못한 것도 어설펐다.

‘그런데 김혜경 이놈... 어쩌다가 조인창 교수와 안면을 튼 거지?’

이현강도 한때는 조인창의 마음에 들어보려 애썼다.

온갖 선물은 물론이며,

상을 받으면 무조건 그의 이름부터 언급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철저한 무관심.

이현강은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그에게 묘한 앙심까지 품고 있었다.

‘흥...노인네가 노망이 나서 그놈에게 넘어간 모양이지.’

“시계는 뭘 받았는데?”

상대는 말이 없다.

이현강의 속마음을 모르지 않았으리라.

-...알았다. 하나는 너한테 넘길게. 이 일만 좀 잘 처리해 줘.

이현강이 픽 웃었다.

“누가 달래? 그리고 내 제자가 제 할 일 알아서 잘 하는 걸 날보고 뭘 어쩌라고.”

-너 계속 이럴래? 너 이상이랑 사이 안 좋은 거 문단 사람들 다 알아. 내숭떨지 말고. 뭘 원하기에 그래?

“원하기는. 난 그런 거 없어.”

-어휴...

“....”

-좋아. 시계 다 넘길게...내 위신만 좀 세워줘.

“장물로 팔려고 했던 루트도. 내가 먹물이라 그런 쪽엔 영 장님이라.”

수화기 저 너머로,

욕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멍청한 놈. 그러게 하려면 제대로 했어야지. 교수 위신 지키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좋아. 대신 잘 부탁해. 내가 뭘 바라는지 알지?

“당연하지, 명색이 소설간데 친구 마음도 모를까 봐?”

***

아침 9시.

정확한 시간에 교학팀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금홍이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다.

뭐지? 기분이 안 좋은가?

슬쩍 자리에 앉아 오늘 할 업무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금홍이가 잔뜩 낮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혜경 선생님.”

“네.”

“잠깐 얘기 좀.”

...왜이리 분위기가 안 좋지?

나는 금홍이를 따라서 비상계단으로 갔다.

금홍이는 계단의 위아래를 살펴보며 인적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 있어요?”

“먼저, 오늘 아침에 공문이 내려왔어요.”

“공문이요?”

“문창과 대학원 재학생들, 타학교 강의 원칙적으로 금지한대요.”

“뭐라고요?!”

“역시...선생님이랑 관련 있죠? 지금 대학원에서 강의에 나갈 만한 등단 작가는 선생님 밖에 없으니까.”

...이런.

어제 심 교수의 우려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어쨌건 나는 인수대학교 소속이다.

학교에서 허가를 안 내주면 한국대건 뭐건 강의를 할 수 없다.

...한국대 강의를 막는 미친 학교는 들어본 적도 없지만.

침착하자.

“어디서부터 내려 온 공문인데요?”

“학과장님이죠. 과의 자치권으로요.”

송 교수가 그랬다고?

그럴 리가.

그 뒤엔 분명 이현강이 있다.

내가 한국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된 걸 그새 알았군.

“그럼 그 공문, 문창과에만 해당되는 거네요.”

“맞아요. 정확하게는 선생님한테만 해당되는 거겠죠.”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또,”

또?

“학과 개편 보고서,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

“네? 아,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제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사무원인데.”

금홍이는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금홍이를 더 도발하지 않도록, 차근차근 말했다.

“선생님도 눈치채셨다시피, 이 교수님이 절 좋아하지 않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앞길을 막으려 혈안이 되어 있죠. 금홍 선생님을 믿으니까 드리는 이야기지만...대학 강의 관련한 공문도 저 때문에 생긴 거예요.”

“....”

“이런 상황에서 학과 개편 보고서를 써내라는 것도, 제 시간을 뺏으려는 것밖에는 안 되고요. 제 시간도 제 시간이지만, 금홍 선생님 시간을 뺏는 건 더 싫었어요.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해서 말 하지 않은 건데...”

“그래도 말씀을 하셨어야죠.”

금홍이는 단호했다.

“마음은 고맙지만...혜경 샘, 샘은 잘 나가는 소설가지만, 저는 바로 여기가 직장이에요. 돈을 받고 하는 제 일이라고요. 고작 사무원이라 할지라도 제 역할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멋지잖아?

금홍이는 보기보다 훨씬 더 똑 부러지고 성실한 사람이다.

내가 만나왔던 그 어떤 여자들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안해요, 금홍 선생님.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나는 빠르게 사과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허울뿐인 직급이라도 조교는 사무원의 아래였다.

처음부터 이 일을 금홍이에게 밝히고, 함께 해결해야 했다.

내 사과에 금홍이는 화가 좀 누그러진 것 같았다.

“사실 어제...이 교수님께서 제게 엄청나게 화를 내셨어요.”

“이 교수가요?”

나쁜 자식. 감히 금홍이에게.

“네. 학과 개편 보고서 건을 모르는 게 말이 되냐고요. 저도 그 얘길 듣고...당황스럽더라고요.”

그렇게 된 일이군.

안 되겠다. 더 이상 금홍이에게 폐를 끼칠 순 없지.

학과 개편 보고서 건에 관해선 나도 계획이 있었다.

다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생각이 없었던 거지.

“금홍 선생님, 학과 개편 보고서, 없던 일이 되도록 제가 해결해 볼게요. 그래도 괜찮겠죠?”

“해결만 된다면야...그런데 이 교수님 찾아가시려고요? 아니면 송 교수님?”

“아니요.”

나는 금홍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

“총장님을 찾아가야죠.”

***

대학 총장.

한 마디로 대학의 최종 결정권자를 의미한다.

일반 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인물.

총장과 학생의 독대?

그것도 교내 신문에서나 볼 법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난 무작정 행정관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총장실은 10층 꼭대기.

잡아 놓은 약속은 당연히 없었다.

무례한 일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혜경이 이 학교에 퍼부은 돈과 노동이 얼만데.

총장이 제대로 된 경영자라면, 이런 충성 고객을 모른척하면 안 되지.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도착했다.

‘총장실’이라는 문패가 보였다.

노크를 하니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비서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물었다.

안을 슬쩍 보니 일반 사무실과 다르지 않았다.

여긴 아마도 ‘비서팀 사무실’이겠군.

그리고 이 방의 끝에 ‘진짜’ 총장실이 있겠지.

“총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약속을 잡으셨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전화나 서면으로 약속을 잡으셔야만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얘기하는 걸 보니, 총장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전 이 학교 사무조교입니다.”

“...네?”

“이 학교 학생이란 말입니다. 학생이 대학의 총책임자를 만날 수도 없는 게 말이 됩니까. 총장님이 근무시간이시라면, 당연히 학생을 만나셔야죠.”

비서는 ‘또 왔군, 이런 놈이.’하는 얼굴이었다.

하긴, 나 같은 논리를 펼치는 학생이 한둘이었겠나.

성격 좀 있다 하는 학생들이 학교에 불만을 품으면 이런 식으로 총장실에 쳐들어가겠지.

“그럼 얘기만 좀 전해주시죠. 전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문예창작학과에서 ‘이상’이 왔다고 전해주세요.”

“아. 그럼 그쪽이...”

그는 날 알아봤다.

문학에 관심이 있다기보단, 학교 여기저기에 붙은 등단 축하 현수막 때문일 거다.

그 현수막은 금홍이가 학과 차원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비서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용한 복도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 방법이 먹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총장이 문학에 문외한이거나, 권위주의자라면 콧방귀도 안 뀌겠지.

하지만...지금은 이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이상 선생님, 들어오시죠.”

일단 대문은 통과.

나는 비서를 따라 비서팀 끄트머리에 있는 ‘진짜’ 총장실로 들어갔다.

총장은 생각보다 젊은 중년의 사내였다.

아쉽게도 혜경은 학교 내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총장의 모교나 출신학과를 알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안녕하십니까, 총장님. 문창과 조교 김혜경입니다.”

“어어. 잘 알고 있어요. 우리 문창과의 천재 아니신가.”

천재.

그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칭찬일까 조롱일까.

일단 나는 그가 건네는 악수를 반갑게 받았다.

“앉으세요. 갑자기 학생이 찾아오는 경우는 없어서 말이에요. 좀 당황스럽긴 하군요.”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약속을 잡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마침 시간이 난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많진 않지만요.”

보통의 권위의식.

그리고 작가에 대한 보통의 호기심.

애매한 상대다.

“그래, 등단작가께서 저를 왜 찾으셨습니까?”

또 이런 식의 묘한 말투.

교수들은 순진한 데가 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경영자들은 다르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것이 그들의 특기다.

총장의 이런 말투도,

앞으로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느냐에 따라

칭찬과 조롱으로 바뀌어버릴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학자로서 상의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학자? 이상 선생은 작가 아닌가요?”

“작가는 대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대학원에 온 건 문학 학자로도 활동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강의를 하기 위해서죠.”

총장이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애매한 시간을 끌어봐야 소용없다.

“얼마 전, 조인창 교수님을 만나 뵀습니다.”

총장이 조인창 교수를 아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의 이름을 안다면 말이 바로 통할 테고,

모른다면 설명할 게 많아진다.

“조인창 교수님이라...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이 사람, 문학에는 문외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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