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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13화 (1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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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12)

    다시 사는 천재 작가 12

    “안녕하세요. 이현강 교수님의 새 조교 장선미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그새 조교가 바뀌었구나.

    그러고 보니 왠지 낯이 익다.

    아, 떠올랐다.

    ...오희라의 무리 중 한 명이 아닌가.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다름이 아니라요. 이현강 교수님께서 선배님 등단 축하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싶다고 하셔서요. 시랑 평론, 방송문학 교수님들도 함께요.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대단히 사근사근한 말투였다.

    모르고 만났다면 상냥함과 그 귀염상의 얼굴이 싫지 않았을 정도로.

    하지만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사람은 딱 질색이다.

    “그런 자리 안 해주셔도 된다고 말씀해주세요.”

    “아...그게...”

    장선미가 말끝을 흐렸다.

    “잠깐 밖에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학과 일인데 말 못할 게 뭐 있어요. 여기서 하세요.”

    “제가 좀 곤란해서요, 선배님.”

    “혜경 샘, 그냥 다녀오세요.”

    금홍이가 말했다.

    역시 금홍이는 착하다.

    나는 말 잘 듣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므로 장선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장선미는 나를 비상계단에 데려갔다.

    누가 보면 밀회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십니까?”

    “그게...이미 교수님들께서는 식당에 가 계세요.”

    “뭐라고요?”

    “당연히 올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못 간다고 하세요.”

    뭐 이런 예의 없는 인간들이 다 있어?

    학생은 오란다고 하면 오고 가란다고 하면 가야 하나?

    막 비상계단을 나가려 하는데 장선미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게 선배님, 선배님을 못 모시고 오면 제가 너무 곤란해져서요...”

    장선미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내 팔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끝내 장선미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가 불쌍하거나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조교의 난감한 처지, 그 하나가 공감 갔기 때문이다.

    교수들이 모인 곳은 학교 후문 근처 고급 일식집이었다.

    종업원이 나를 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안에서는 내 이름을 들먹이며 수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노크를 하려는 종업원을 말렸다.

    “잠깐, 안내는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들어갈게요.”

    종업원을 보내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시켜도 돼요?

    -대학원생이 돈이 얼마나 있다고...그냥 오늘은 같이 내요.

    여자의 목소리다. 시 교수와 평론 교수겠지.

    -괜찮아. 원래 등단하면 교수들한테 식사대접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이현강의 목소리.

    -맞아. 지가 먼저 우리를 모시지는 못할망정. 그 새끼 아주 괘씸해.

    이건 방송문학담당 송호천 교수의 목소리.

    그는 문창과 최고참 교수이자 학과장이었다.

    ...알 만하다.

    등단을 한 학생은 교수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게 관례.

    하지만 그건 학생의 선택일 뿐, 의무는 아니었다.

    이 자리를 주도한 건 이현강이겠지.

    엊그제 상금 오백만 원이 들어온 걸 귀신같이 알고.

    그리고 이건 돈 때문만은 아닐 거였다.

    이런 식으로라도 제 권력을 확인받으려는 심술.

    똑똑.

    노크를 하고 여닫이문을 열었다.

    다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얼굴들이 불콰했다.

    “어어. 왔구만.”

    “어서 와. 여기 앉아.”

    방송문학 송 교수가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갑자기 부르셔서 놀랐습니다.”

    “뭐가 갑자기야. 사무 조교면 24시간 대기 타고 있어야지. 안 그래?”

    송 교수가 껄껄대며 내 술잔에 잔을 채웠다.

    “자, 우리 혜경 아니, 이상 작가를 위하여 건배!”

    송 교수는 이미 거나하게 취한 듯 소란을 떨었다.

    대충 건배를 하고 술잔을 비우니 향긋한 정종이 식도를 부르럽게 타고 내려갔다.

    술도 참 비싼 것도 시켰구나.

    “사람이 왔으니 안주를 하나 더 하지.”

    “어머, 회가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요.”

    메뉴판을 집어 드는 이현강을, 시 교수가 말렸다.

    “오늘의 주인공에게 먹던 걸 줄 수 있나. 게다가 대단하신 이상 선생이 왔는데 말이야.”

    이현강이 은근히 빈정거렸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시키고 싶으시면 시키시죠.”

    “하긴, 문학판을 바꿀 인재 아닌가? 시상식장에서 그렇게 말했잖아.”

    송 교수가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알림벨을 눌러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자연산 줄돔 특대로 하나만.”

    이현강이 고른 메뉴를 15만원짜리였다.

    한 눈에 봐도 술이며 안주며...백만원은 족히 넘겠다.

    그들은 한참 부어라 마셔라 신이 났다.

    나도 좋은 술은 거절하지 않았고, 배도 채웠다.

    눈치 볼 게 뭐가 있는가.

    “그나저나, 소설가가 청탁 없이 어떻게 먹고 살려고 그래?”

    송 교수가 회를 씹어 먹으며 말했다.

    “혜경이 홈페이지 같은 거 열었다고 들었는데. 맞니?”

    평론 교수가 물었다.

    “홈페이지?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판을 바꾼다 어쩐다 하더니 하려는 게 고작 그거였어? 난 또 출판사라도 차리는 줄 알았지. 그렇게 해서 판이 참도 바뀌겠구만.”

    송 교수가 피식 비웃었다.

    “인터넷과 모바일 이상으로 혁신적인 건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단언컨대 송 교수는 스마트폰도 제대로 쓸 줄 모를 거다.

    그러니 인터넷의 힘이 우습겠지.

    딱 그거다. 고이다 못해 썩은 물.

    “기존 출판사도 웹진이 없는 건 아냐. 하지만 실적이 그닥이라.”

    평론 교수가 말했다.

    그럴 수밖에.

    문학잡지를 인터넷에 옮겨놓는 형식이니.

    문제는 가치다.

    공짜 글에 가치를 쉽게 느낄 수 있을 리가.

    대중은 문학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하게 하는가?

    돈을 쓰게 함으로써 그것에 가치를 느끼게 해야 한다.

    가치를 느끼면 사랑은 그 다음.

    사랑하는 집단이 생기면? 그것은 곧 문화가 된다.

    “저도 많은 고민 중에 있습니다.”

    나는 일단 둘러댔다.

    평론 교수나 시 교수나, 내게 별다른 악의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남은 두 늙은이 앞에서 내 패를 까발릴 순 없지.

    “그러고 보니-너, 드라마 극본을 쓴다지?”

    이현강이 말했다.

    어떻게 안 걸까?

    교학팀 사무실에서 쓰던 걸, 누군가가 보고 일러바친 건가?

    “네. 맞습니다.”

    이현강은 거기까지 하고 입을 싹 다물었다.

    송 교수가 미끼를 덥석 물 듯 내게 물었다.

    “드라마? 네가 드라마를 뭘 안다고?”

    “교수님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수업일 뿐이고. 전공생이 되어서 실무를 해본 것도 아니면서. 이거 드라마를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니야?”

    “청탁을 안 받겠다고 한 이유가 그거야? 드라마를 믿고? 상금 때문에?”

    이현강이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긴. 이거 무슨 드라마를 돈줄로 보나? 너 대체 뭐하는 놈이야?”

    송 교수가 발끈했다.

    “그래도 흥미로운 걸 썼다고 하던데요. 제 제자들이 어쩌다 본 모양입니다. 제목이...<무너지는 날>이던가요.”

    ...제목까지 알고 있다니.

    학교에 이현강의 눈이 얼마나 많은 걸까.

    나는 말없이 회를 씹어 먹었다.

    “아참, 송 교수님 이번에 엠플릭스 드라마 공모 심사 들어가시죠?”

    “큼...그렇지.”

    ...이래서 날 불렀구나.

    어떻게든 날 굴복시켜보려는 개수작.

    “뭐, 심사는 공정해야 하니 여기서 들은 건 잊겠네.”

    아니. 송 교수는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니다.

    그는 이현강 못지않게 학생들 돈을 뜯어가기로 유명하다.

    “잘난 이상 선생이 알아서 하겠지요.”

    이현강이 즐거운 듯 말하며 술을 들이켰다.

    ‘알아서’

    알아서 이 자리를 계산해라.

    알아서 송 교수에게 돈을 갖다 바쳐라.

    그렇지 않으면 내 작품은 떨어뜨리겠다-이거지.

    교수가 학생을 휘어잡는 방법엔 몇 가지가 있다.

    제대로 된 교수라면 카리스마나 실력으로 승부한다.

    그게 부족하다면 권위로 누르기.

    많은 교수들이 교수라는 이름으로 대학원생들을 착취하는 게 바로 이 경우다.

    그리고 마지막, 바로 돈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학생을 가난하게 만들기.

    돈이 없는 학생은 더 절박해지고, 교수에게 매달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현강은 바닥에 있는 교수다.

    학생의 상금 오분의 일을 이렇게 허비하게 만들려 하다니.

    “부족한 작품, 심사 보시려면 힘드시겠군요.”

    나는 송 교수에게 말했다.

    “그럼 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써야 할 글이 있어서요.”

    “카운터는 나가는 길에 있네.”

    이현강이 말했다.

    노골적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이현강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붙잡지도 않았다.

    나는 룸을 나섰다.

    그리고 카운터로 가서 카드를 빼냈다.

    “얼마인가요?”

    “네...아이쿠. 많이 나오셨네요. 116만 5천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

    잠시 후 나는 카드를 지갑에 넣으며 횟집을 나섰다.

    ***

    열 시경.

    술이 거나하게 취한 송 교수와 나머지 세 교수들이 룸에서 나왔다.

    “아이고~ 이 교수 덕에 이런 데에서 포식을 해보네?”

    “뭘요.”

    이현강도 얼굴에 벌게져선 웃었다.

    시 교수와 평론 교수도 술기운에 들떠 보였다.

    그렇게 그들이 카운터를 지나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저기, 손님. 계산 아직 안 하셨습니다.”

    “계산? 그거 아까 김혜경이 했잖아.”

    송 교수가 어눌하게 말했다.

    이현강의 얼굴이 찌푸러졌다.

    “아까 그 분은 10만원만 계산하고 가셨고, 106만 5천원 남았습니다.”

    종업원이 민망한 티를 애써 숨기며 말했다.

    그럼에도 송 교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런 개새끼가...!”

    “교, 교수님. 같이 내요.”

    “맞아요. 얼른 내고 나가요.”

    시 교수와 평론 교수가 재빨리 지갑을 꺼냈다.

    송 교수가 한번 행패를 부리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됐습니다. 제가 내죠.”

    이현강이 막아섰다.

    이 자리를 마련한 만큼, 위신을 챙겨야 했다.

    아니, 위신은 이미 크게 깎였다.

    그나마 계산이라도 하는 게 자존심을 지킬 유일한 길이었다.

    이현강은 그렇게 106만 5천원을 결제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송 교수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두 교수와 인사했다.

    그녀들은 민망한 얼굴로 어서 자리를 떴다.

    “후우...”

    이현강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해보자 이거지, 김혜경.”

    ***

    밤 산책을 했다.

    아까 정종을 먹어 몸이 달아오른 것도 있었고,

    새로운 작품 구상을 위해서였다.

    <세속적 사랑의 노래>는 김혜경과 나의 합작품이었다.

    <무너지는 날> 역시 그렇고.

    이번에는...나 이상만을 위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나의 생각, 나의 감정을 담은 글.

    동시에 감각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글.

    그렇게 학교 운동장을 걷고 있을 때였다.

    우웅-우웅-

    진동이 울렸다.

    이현강인가?

    아까 일로 열받긴 했겠지.

    내가 딱 나 먹은 만큼만 계산하고 나왔으니.

    하지만 예상 외로 번호는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나, 조인창이네.

    조인창 교수?

    나는 걸음을 멈췄다.

    “교수님. 안녕하십니다.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상이라.

    “연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 글을 뽑아주셔서...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서요.”

    -인사? 날 보고 싶단 뜻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내 집으로 오게.

    “네?! 댁으로요?”

    놀랄 일이었다.

    조인창 교수와의 통화만 할 수 있어도 성공이라 생각했는데 집 초대라니.

    조인창 교수는 힘없는 목소리로, 천천히 자신의 연희동 집 주소를 읊었다.

    전화를 끊고 긴장감에 삼키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조인창 교수...조인창...”

    아무래도 이름이 익숙하단 말이지.

    그것은 오래 전에 잊고 있던 기억이 불쑥 찾아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조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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