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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5화 (5/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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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4

    “훌쩍...”

    ...달다.

    눈이 퉁퉁 부은 채 멜론을 입에 넣었다.

    멜론은 1930년대에도 고급 과일이더니,

    90년이 지난 지금도 꽤 비싸다.

    “죽을 때까지 이것만 먹고 싶다.”

    돈을 많이 벌 것이다.

    물론 나의 글로 말이다.

    언젠가는 냉장고를 멜론으로 꽉꽉 채울 것이다.

    멜론을 우물거리며 소설을 이어 썼다.

    <세속적 사랑의 노래>.

    여주인공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끝까지 끌고 갔다.

    이기심과 사랑의 공존.

    이것이 이 소설의 존재목적임을 잊지 않으며.

    줄거리는 전혀 바꾸지 않았다.

    그건 원작자인 김혜경에 대한 예의였다.

    우웅-우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밤 10시에 맞춰 둔 알람이다.

    나는 바로 컴퓨터를 껐다.

    더 쓰고 싶고, 더 쓸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10시 취침, 6시 기상. 아침 운동과 적절한 영양소 섭취.

    이것은 나를 위해 지키는 약속이었다.

    나는 전생에 폐결핵에 걸린 후에도 방탕한 생활을 했다.

    술...담배...밤샘...

    철이 없었다.

    죽고 나서야 그것을 미치게 후회했다.

    그러나 이번 생엔 달랐다.

    나는 이 몸을 항상 최고의 상태로 유지할 테니까.

    ***

    이현강의 교수실.

    “김혜경이 소설 아직도 못 받았어?”

    이현강이 물었다.

    조교용 책상에 앉아 읽던 김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사흘밖에 안 지났는데요.”

    “Y일보 신춘도 사흘 남은 거 아냐?”

    이현강이 신경질 섞인 말투로 되물었다.

    “그...그렇죠.”

    조급하기론 김한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김혜경의 소설에 볼 일이 있었다.

    “이따 혜경이랑 얘기해보겠습니다.”

    “완성본 아니어도 좋으니 초고 나오는 대로 가져오라고 해.”

    “네. 교수님.”

    “그런데 너 아직도 가라사대 계간지에 소설 안 주고 있다며?”

    이현강이 보고 있던 책을 덮어버리곤 따져 물었다.

    할 말이 많은지 담배까지 빼어 물었다.

    계간지란 계절마다 한 권씩 발행하는 문학잡지를 뜻했다.

    그 중에서도 국내 최대 규모 출판사인 가라사대의 계간지는 작가들에게 ‘꿈의 지면’이었다.

    가라사대에 작품을 싣는다는 건 ‘떴다’는 반증이기에.

    그리고 이현강은 가라사대의 최고 편집위원이었다.

    “내가 너한테 지면 주려고 얼마나 힘을 쓴 줄 알아?”

    “...압니다.”

    “작가들 습성이 워낙 게으르다고 하지만 이현강이 제자는 그러면 안 되지.”

    “,,,송구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현강은 30년차의 베테랑 소설가였다.

    또한, 마감일에 한 번도 늦어본 적 없는 작가로도 유명했다.

    ‘...이게 다 김혜경 때문이야. 김혜경이 그 지랄만 안 했으면 <난장>을 내려 했는데...’

    이상이 혹독한 비평을 했던 소설 <난장>.

    그것은 원래 가라사대 계간지에 발표할 작품이었다.

    사실 김한은 소재 고갈과 스타일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지온 작가의 스타일을 <난장>에 교묘하게 가지고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김혜경 따위가 눈치 챌 정도면 평론가들에겐 한 눈에 보일 거야. 절대 이대론 못 내.’

    김한은 평론가들을 유난히 무서워했다.

    욕을 먹고 싶지 않았고 인정만 받고 싶었다.

    그렇게 이름값을 높여 교수가 되는 게 그의 최종목표였다.

    ‘...<난장>을 고치려 해봤지만 잘 안 돼. 하필... 요즘 평론가들 반응도 안 좋은데...’

    “김한.”

    “네, 교수님.”

    “넌 네가 잘 나가는 것 같겠지만...너 간당간당 해. 지금 문단에 너 만한 빛 좋은 개살구가 없어.”

    “...주의하겠습니다.”

    “새로운 모습 못 보여주고 계속 기교자랑만 하면 나도 이제 너 커버 못 해줘. 알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김한은 불안했다.

    이현강은 워낙 냉정하고 혹독한 사람이었다.

    한 끗 잘못해서 버림받은 제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역시, 그 수밖에 없어.’

    김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교학팀 사무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

    사무조교 생활이 한결 편해졌다.

    개인조교들은 더는 잡일을 떠맡기지 않아서였다.

    ‘김혜경이 달라졌다.’

    ‘김혜경이 엄청난 글을 써냈다.’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이런 소문이 도는 모양이었다.

    고작 그런 소문에 사람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다니.

    다들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지난 며칠 간 소설에 집중할 수 있었다.

    타닥..탁..타닥...

    ...탁.

    마지막 엔터를 눌렀다.

    다 썼다.

    두 번의 퇴고까지, 완벽하게 끝냈다.

    “으으..! 다 했다.”

    찌뿌둥한 몸을 쫙 피고 기지개를 켰다.

    “다 썼어?”

    뭐야? 언제 왔지?

    김한이 문창과 팻말 앞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내 노트북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며.

    “다 썼으면 얼른 줘. 교수님이 기다리셔.”

    맡겨놨어?

    빚 받으러 온 놈처럼 왜 이래?

    문득 아까 지훈이 점심을 먹으며 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요새 한 선배에 대한 평론가들 여론 은근 안 좋은 거 알아요? 스타일 진부하다고 한 마디씩 돌려 까던데요? 뭐, 뒤에 이 교수님 계시니 괜찮겠지만요.

    ...뭔가 찝찝하다.

    김한의 저 조급한 표정과 불안한 눈빛이.

    “알았어. 일단 출력 좀 하고.”

    일단 소설을 출력하고 노트북을 꺼버렸다.

    “나한테 줘. 내가 가져다드릴게.”

    “그래.”

    김한에게 출력본을 주려다가, 그만뒀다.

    “아. 수정할 게 있어.”

    “뭐? 출력도 다 해놓고 뭔 소리야. 얼마나?”

    “두 글자정도?”

    “펜으로 고쳐 그럼.”

    “교수님께 그렇게 드렸다가 욕먹으면 네가 책임질래?”

    이현강은 완벽주의자에 권위주의자였다.

    어설프거나 지저분한 원고는 용납하지 않았다.

    김한의 얼굴이 구겨진다.

    “아오...빨리 해 그럼. 왜 이렇게 굼떠?”

    “집에 가서 할 거야. 근무 시간 끝나서.”

    “뭔 소리야! 금방이잖아. 여기서 해!”

    김한이 히스테리 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사무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유임 사무원도 고개를 빼들었다.

    “김혜경 선생님, 얼른 퇴근하세요.”

    역시.

    유임 선생님이 슬쩍 내 편을 들었다.

    혜경을 오래 봐 온 그녀도 김한을 싫어한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노트북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김한이 슬쩍 날 따라온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뭔가 정말 이상한데?

    “김혜경. 너 소설 백업도 안 해? 날리면 어쩌려고.”

    내 백업을 네가 왜 신경 써?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노트북 멀쩡해서 안 해도 돼.”

    물론 백업은 한다.

    그것도 매일.

    김한이 대답 대신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어디까지 따라 올 생각이야?”

    “너희 집까지. 집에 프린터 있지? 바로 뽑아서 나 줘.”

    “뭐?”

    “나 교수님 개인 조교야. 네가 소설 제 때 안 주면 깨지는 건 나라고. 그러니까 내가 신경 써서 받아내야지.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손 놓고 기다려?”

    “...그래? 그래, 그럼 따라와.”

    ***

    김한은 정말로 내 자취집까지 따라왔다.

    나는 외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노트북가방을 탁자에 올려두었다.

    내 집은 부엌 겸 거실에 방 하나가 딸려 있다.

    김한은 멋대로 방을 둘러보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남자 방에서 웬 단내가 이렇게 나?”

    “멜론 냄새야.”

    “멜론?”

    넌 알 거 없다.

    그때 김한이 갑자기 물었다.

    “맞다. 너 교수님 연구계획서 양식 가지고 있지?”

    “아니. 검색해서 다운받아야 해.”

    “하는 김에 그것도 좀 받아서 출력해주면 안 될까?”

    김한이 피시 컴퓨터에 연결된 프린터를 가리켰다.

    “난 밖에서 기다릴게.”

    “...알았어. 그럼 잠깐만 기다려.”

    김한은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출력도,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시계의 초침이 한 바퀴 반을 돌았을 때였다.

    똑똑.

    아니나 다를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야, 김혜경. 소설 안 줘도 되겠다.”

    “무슨 소리야. 달라고 안달을 내더니.”

    “교수님한테 문자가 와서.”

    “문자?”

    “네 소설, 아이디어는 좋은데 구성이 너무 단조롭대.”

    “아직 보지도 않으셨잖아.”

    “교수님이 괜히 교수님이냐? 딱 보면 알지.”

    “...그래서?”

    “그래서 그 아이디어를 다른 방식으로 구성해 오라시네. 다음 달까지.”

    “다음 달? 신춘은?”

    “내지 말라셔. 어설픈 상태로 내서 심사위원들한테 아이디어 뺏기지 말라고. 그 사람들도 다 작가들이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

    “교수님이 네가 마음에 드셨나봐. 말 잘 듣고 줄 꽉 잡아라.”

    김한이 내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난 말 다 전했다. 갈게.”

    “야.”

    “어?”

    “연구 계획서 뽑아달라며.”

    “...내가 학교 가서 뽑을게. 신경 쓰지 마.”

    그는 성가시다는 듯 그대로 나가버렸다.

    “...줄 꽉 잡으라고?”

    나는 노트북에 살짝 손을 올려봤다.

    따뜻하다.

    구겨놓은 외투 사이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녹화중임을 알리는 붉은 버튼이 선명했다.

    녹화 파일 저장.

    다시 재생.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고작 3분짜리 영상이었다.

    내가 방에 들어갔다가 나온 건 1분 30초가량.

    그 1분 30초 동안 일어난 일이, 선명하게 잘 찍혀 있었다.

    ***

    김한은 교수실로 돌아왔다.

    어찌나 빨리 걸어왔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막 퇴근을 하려던 이현강이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혜경이 녀석 좀 설득하느라요.”

    “김혜경?”

    이현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 소설이 도무지 안 써진다고 해서...제가 어떻게든 해보라고 설득했거든요. 그런데 안 되겠대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혀서, 누가 소설 얘기만 해도 자살충동이 느껴진다나요.”

    “수업시간에 그렇게 건방을 떨어놓고?”

    “걔 원래 조울증 있거든요. 약 먹은 지도 오래 됐고요.”

    “그래도 써오라고 해.”

    “네?”

    “약 먹고 쓰면 되잖아. 어떻게든 써오라 해.”

    “...말은 해보겠습니다.”

    “그래. 간다.”

    “살펴 가십시오!”

    김한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문이 여닫히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시발. 이게 뭔 짓이야, 진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급하게 피워댔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절전되어있던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 떠 있는 건 가라사대 출판사에서 보낸 메일이었다.

    -...하여, 내일까지 원고를 안 주시면 김한 작가님께 드린 청탁을 취소하고 저희 내부 편집자의 원고로 지면을 채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모쪼록 빨리 원고를...-

    “준다고, 이 새끼들아. 감히 작가한데...”

    김한이 담배를 꼬나문 채 핸드폰 사진첩을 열었다.

    새 사진은 모두 9장.

    그것은 <세속적 사랑의 노래>의 원고를 찍은 것이었다.

    ***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인수대학교 교내 우체국으로 갔다.

    “서류봉투 주세요.”

    “백 원입니다.”

    짤랑-

    우체국 플라스틱 저금통에 백 원을 넣고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간이 책상으로 가서 봉투에 학교 주소와 Y신문사 주소를 크게 적었다.

    <세속적 사랑의 노래> 원고를 봉투에 넣고,

    마지막으로 준비해 온 백지를 꺼냈다.

    신춘문예에는 두 가지를 내야 한다.

    하나는 원고, 하나는 신상내역.

    나는 내 신상내역을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주소와 연락처, 메일주소 그리고...

    이름.

    Y신문사는 다행이 필명으로 투고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이렇게 썼다.

    이름(필명) : 이상

    1938년에서 2020년...82년 만이다.

    ‘이상’이라는 이름은 제 주인을 되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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