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3화 (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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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2)

    다시 사는 천재 작가 2

    혜경이 남긴 유작의 제목은 <세속적 사랑의 노래>.

    줄거리는 이렇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남자가 사업에 실패한다.

    여자는 처절할 정도로 자기 합리화를 하며 남자를 떠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여자의 입장에서 구구절절 서술하고 있다.

    혜경이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알 것 같다.

    문학에게 버림받은 기분 때문이겠지.

    식상해 보이지 않으려고 남자가 아닌 여자의 입장에서 서술했지만...

    탈락이다.

    이런 건 세속적인 게 아니다.

    현실적인 거지. 전혀 새롭지도 않고.

    세속적인 여자라면...우리 금홍이 정도는 돼야지.

    나는 금홍이를 떠올리며 도입부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혜경의 육체에 체화된 작업들은 나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었다.

    이를테면 타자를 치거나, 스마트폰을 만지거나 하는 것들.

    50분 동안 A4용지 1장의 분량을 수정했다.

    수강생 인원을 고려해서 넉넉히 20장을 출력했다.

    지훈이와 함께 수업에 가는 길이었다.

    “혜경아~!”

    교내 카페테리아에서 반갑지 않은 얼굴이 나타났다.

    오희라.

    38살 유부녀. 박사 수료 후 5년째 수업 청강 중.

    그리고 무엇보다...문창과 공식 스피커.

    묻지도 않은 김한의 소식을 매번 날라 준 것도 그녀다.

    그럴 때마다 혜경은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숨기지 못했고, 그녀는 그 모습을 다른 이들과 안주거리로 씹으며 즐겼다.

    “윽.”

    지훈이가 오희라를 보고 싫은 티를 냈다.

    “전 먼저 강의실로 갈게요, 형. 미안해요.”

    지훈이는 오희라 같은 수동적 공격형 인간을 못 견딘다.

    물론 나도 저 여잘 보니 역겨움이 올라온다.

    “혜경아~ 빨리 이리 와 봐~”

    나는 설렁설렁 그들에게로 갔다.

    오희라가 거느리고 다니는 여학생들은 다 내 후배들이다.

    하지만 한 번도 내게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다.

    “무슨 일이세요?”

    “우리 네 소설 얘기하고 있었어. 주인공 심리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네가 고생한 게 눈에 보이더라.”

    “풉...”

    후배들이 내 표정을 슬쩍 살피며 웃는다.

    오희라에게 못된 것만 배워서는.

    “그런데요?”

    “그거 네 이야기야?”

    “학부 1학년 같은 질문을 하시네요. 선배.”

    “네가 아직 여자경험이 적은 것 같아서 좀 알려주려고 그러지. 소설 보니까 딱 느껴지더라. 우리 혜경이가 여자를 잘 모르는구나~ 하는 거?”

    우리 혜경이는 무슨.

    그리고 저거 성희롱 아닌가? 2020년대엔 그런 것 같던데.

    1930년대도 아니고...

    촌스럽고 무례하기 짝이 없다.

    “큭큭...”

    “희라 언니 너무 웃겨요.”

    이젠 아예 대놓고 웃고 난리가 났다.

    “여자한테 차인 경험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사귄 적이..아니다, 소설 얘기야. 소설이 워낙 현실감이...뭐랄까, 누나는 이해가 잘 안 가서-.””

    “우리 과에서 저만큼 여자한테 확실하게 차여 본 사람은 없을 걸요?”

    “...어?”

    “저 여자 때문에 전 재산도 날려봤는데요. 그리고 차였어요.”

    내 대답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다.

    “시간 다 돼서 먼저 갈게요. 다음엔 사람 부를 땐 커피라도 한 잔 사세요. 나잇값 하셔야죠.”

    “나, 나잇값?”

    나는 오희라가 꽥꽥거리기 전에 얼른 대학원 건물로 들어와 버렸다.

    오희라에게 한 말, 거짓말은 아니다.

    금홍이에게 다방 <제비>를 차려주면서 전 재산을 털었으니.

    그 <제비>가 망한 것보다,

    금홍이가 날 버렸다는 사실이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

    문창과 강의실 구조는 독특하다.

    평범한 책상 대신 커다란 원탁이 준비되어 있다.

    모두의 얼굴을 보고 토론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지훈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희라 선배가 기분 나쁜 말 했죠? 죄송해요. 제가 진짜 그 선배 화법을 못 견뎌서.”

    지훈인 차라리 욕을 들었지 비꼬는 건 용납 못 한다.

    문제는 문창과엔 그런 인간들이 천지에 널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훈이도 나 외엔 이렇다 할 친구가 없는 거겠지.

    학생들이 다 들어차고, 마지막으로 이현강 교수와 조교 김한이 들어왔다.

    오희라를 비롯한 학생들이 커피와 다과를 꺼내 교수의 자리에 갖다 바쳤다.

    이현강은 당연한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김혜경.”

    그리고 대뜸 날 불렀다.

    “넌 조교가 되선 지각을 하나?”

    신경질적인 말투.

    말 안 듣는 멍청한 노예에게나 할 법한.

    그새 김한이 아침 주차장 일을 이러쿵저러쿵 일러바친 모양이다.

    “저 정시출근 했는데요. 교학팀 출근 시간 9시에 맞춰서 55분까지 도착했습니다.”

    물론 당신의 잘난 애제자 때문에 5분 지각했지만.

    이현강이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수강생들은 모두 ‘저 미친놈’이란 표정으로 날 봤고.

    상관 할 바 아니다.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또, 교수 눈치를 보자고 대학원에 온 건 아니지 않은가.

    “소설은 한심하게 써놓고 말은 그럴싸하군.”

    이 교수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오희라의 소설과 내 소설을 들춰봤다.

    “오희라 것부터 해. 그나마 나은 것부터 해야지.”

    오희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나마 낫다’는 평판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사람들을 휘두르지 못해 안달이 난 주제에 문학적 포부는 간장종지만하군.

    오희라가 쓴 소설 <산책>.

    공교롭게도 혜경의 작품과 설정이 비슷했다.

    가난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놓아준다.

    여자는 거리를 떠돌며 사랑에 대해 생각하다가 남자에게 돌아온다.

    한 마디로 고루한 신파.

    “합평을 시작하지.”

    발언권을 주는 건 교수의 재량이다.

    몇 사람으로 끝날 수 있고, 모두에게 발언권이 돌아갈 수도 있다.

    이현강은 먼저 오희라의 무리들을 차례로 지목했다.

    “저는 너무 좋게 읽었어요. 20대 여자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섬세하게 짚어낸 것 같아요. 보들레르의 산책자가 떠오르는 걸 보니, 희라 언니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보들레르 얘기는 저도 동의해요. 여성 인물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하는 게 어색할 수도 있는데 그게 사랑의 서사와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봉합된 것 같아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걸 앞에서 다 말씀하셔서...저도 다 동의합니다. 언니의 문체가 특히 원숙해진 것 같아요.”

    오희라는 뿌듯한 미소로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듣고 있었다.

    보들레르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맞은편에 앉은 김한도 웃음을 꾹 참고 있다.

    합평의 물꼬가 이렇게 트이면 뒷사람은 제대로 비평을 하기 힘들다.

    그럼 작가의 글뿐만이 아니라 이전 사람들의 의견에도 반박을 해야 하니까.

    이현강은 오희라의 합평을 이렇게 의미 없는 칭찬으로 넘길 셈이다.

    조교를 하다보면 일반 학생들은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희라는 돈이 많다. 남편이 명문대 국문과 교수라나.

    그래서 매학기 우리 과에 돈을 기부하고, 교수들과 사적인 만남도 갖는다.

    이현강의 입장에서 어차피 등단도 못한 학생, 기나 살려주고 돈줄로 쓰겠다는 거다.

    “송지훈. 넌 어떻게 생각해?”

    “어...저는...재밌게 읽었어요. 섬세하다는 말에 동감하고요. 다만 이 극적인 생각의 흐름이...음...진짜 여자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다.

    어눌하게 말해서 그렇지, 지훈이가 제대로 읽었다.

    그런데 별안간 오희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호호호! 너무 귀엽네요. 지훈이가 아직 결혼을 할 만큼 진정한 사랑을 안 해봐서 그런가 봐요. 여자의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한 데요.”

    “아무래도 그렇죠.”

    “맞아요. 남자들은 알기 힘들죠.”

    오희라와 그 무리들은 그렇게 지훈이의 입을 막아버렸다. 지훈이는 주먹을 꽉 쥘 뿐이었다.

    “김혜경, 네가 마지막으로 말해봐.”

    럭키.

    굳이 나서서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시켜준다면야 할 말은 가득하다.

    “감정에 취해 있네요. 주인공도 작가도.”

    오희라가 눈을 동그랗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혜경이가 아직 여자의 감정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말인 것 같은데,”

    “끝까지 들어주세요. 오희라 선배님.”

    “...어?”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글이 새로운 스타일이 아닌 건 확실하고, 이 노골성에서 어떤 미학적인 즐거움을 찾을,”

    수 없죠.

    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오희라 특유의 화법이 생각났다.

    듣기 싫은 소리 다 해놓고 자기는 그럴 의도 없었다는 듯 쏙 빠져나가는 화법.

    “...의도가 없으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오희라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딴 소설에 보들레르라니.

    나보고 어떻게 참으라는 건가.

    “덧붙여 보들레르가 말한 산책자는 익숙한 거리에서 낯선 감각을 찾아내는 사람을 말하죠. 특히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거죠. 이 소설처럼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게 아니라요. 선배가 원래 감정 과잉에 취미가 있으셨구나...싶기도 하네요.”

    “그렇게 탁상공론으로 소설을 보다니요.”

    김한이 갑자기 나섰다.

    강의실이 술렁였다.

    합평 수업에서 타인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높은 확률로 감정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김한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글에 공감하는 독자들도 분명 있습니다. 분명 여성작가만이 쓸 수 있는 섬세함이 있기 때문이죠. 감정선도 일관되고요. 아무래도 발언하신 분의 공감능력을 재고해보셔야겠는데요. 아, 물론 마지막 말은 농담입니다.”

    오희라를 감싸는 척 날 공격하는 김한.

    ‘공감능력’이란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의견을 이어갔다.

    “섬세함은 남녀의 차이가 아니라 작가의 차이입니다. 또한 섬세와 과민함은 다르죠. 제가 보기엔 이 소설은 과민합니다. 감정선이 일관된다고 했죠? 그건 과민하게 일관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성인여성이라기보다는...풋내나는 십대 소녀 같아요.”

    “저 의견은 납득이 안 되는데요, 교수님.”

    납득이 안 되면 나한테 따져야지 왜 교수를 불러?

    오희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할 말을 계속했다.

    “이 여자 캐릭터가 그렇게 설정되었잖아요. 가난한 애인이 자신을 놓아준다고 했을 때, 마음은 복합적이어야죠. 이렇게 무작정 시름에 빠질 게 아니라. 돈을 버는 성인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이 여자는 태어나서 돈 한 푼 벌어보지 않고 사랑받기만을 원하는 철부지 같아요.”

    이를테면 부잣집에서 태어나 시집 잘 간 게 평생의 성취인 오희라처럼.

    “자, 그만 하지.”

    결국 이현강이 말을 끊었다.

    할 말이 더 많았는데 안타깝다.

    “오희라는 적절한 감정선을 연마하면 다음에 더 좋은 작품을 쓰겠군. 주제의식은 나쁘지 않아.”

    역시 하나마나 한 평.

    오희라의 발전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저런 말은 안 할 텐데.

    “오 분만 쉬었다가 이어서 김혜경 걸 하지.”

    이현강이 담배를 피러 나가자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렸다.

    한 마디 할 줄 알았던 오희라와 김한이 나를 노려보더니  강의실을 나갔다.

    어디 가서 내 욕이나 하며 다음 합평을 기다리겠지.

    지훈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형 아까 오 선배 말투 따라한 거죠? 저 웃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어. 저런 건 지가 당해봐야 안 하지.”

    석사 여학생들 몇 명이 슬쩍 다가왔다.

    그리고 누가 들을 세라 소곤소곤 말했다.

    “속이 다 시원했어요. 혜경 선배.”

    “맞아요. 저희는 하고 싶어도 못 했던 말인데. 용기 내주셔서 감사해요.”

    “어? 어어...고맙다.”

    문창과에 의외로 멀쩡한 사람들이 많았구나.

    순간 이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혜경이 이런 말을 며칠만 더 빨리 들었어도, 자살하진 않았을 거라고.

    “형, 담배나 피러 가죠.”

    “나 담배 끊었어.”

    “갑자기? 형 하루에 반 갑은 태우잖아요.”

    “그러다 폐병 걸려.”

    “...네?”

    “너도 폐병 조심해라. 난 절대 안 펴.”

    어떻게 얻은 새 몸인데, 담배 따위로 상하게 할 소냐.

    쉬는 시간이 끝났다.

    희미한 담배냄새가 강의실에 가득했다.

    이현강이 말했다.

    “그럼 김혜경 소설을 합평해보지. 누구부터 할까.”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손을 든 사람은 아니나 다를까.

    김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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