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통쾌한 복수 (137/143)

Chapter 04 통쾌한 복수

          1          

 "꺄아악! 누, 누구?"

 화들짝 놀란 채린은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절반쯤 썩어 문드러진 언데드 몬스터가 아닐까 걱정했지만, 상대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겨우 찾았네."

 채린의 어깨를 잡은 것은 유한이었다.

 반가워하던 그는 채린의 표정이 여전히 언짢은 것을 보곤 곧바로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화 아직 덜 풀렸지? 미안해, 그래도 나 꼭 너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화난거 아니야, 사실은‥‥‥."

 채린은 좀 전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해 주었다.

 '앗싸!'

 유한은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안 그래도 채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예전 일을 말해주려던 참이었는데, 놈이 고맙게 멍석을 깔아 주었기 때문이다.

 채린의 하소연이 끝나자. 유한은 그녀가 아직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뇌리에 트라우마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생쥐 스프 사건부터.

 "‥‥‥ 내가 학교를 그만둔 것도 다 정현일 그 자식 때문이었어. 패거리를 부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와서 날 괴롭히고 놀렸지. 저번에 내가 널 오해한 것도 저놈이 합성한 사진을 보내 날 화나게 만들어서 그래."

 유한의 설명에 모든 전후를 알게 된 채린은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난 그것도 모르고‥‥‥."

 "아냐, 성급했던 내가 잘못이지. 더구나 너한테 아무것도 이야기 안 해 줬으니까."

 잠깐 동안이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깨진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유한은 자신에게 기대 오는 채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살포시 끌어안았다. 싫지 않은 눈빛을 보이던 채린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는 듯 물었다.

 "맞다! 너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학원에 등록한 거야?"

 학림 아카데미에는 수강료를 낸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학원의 결계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들어올 수 없었다.

 "훗, 비밀이야."

 유한이 어깨를 으쓱하자 채린이 일부러 토라진 척하며 물었다.

 "또 비밀로 할 거야?"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채린과 오해가 생겨 싸우지 않았는가.

 "사실은‥‥‥ 해킹했어."

 "뭐? 해킹은 불법이잖아!"

 채린이 깝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유한은 다급히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주변에 사람이 보이진 않았지만. 또 모르지 않은가. 

 그는 채린의 귓가에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모르는 척 해. 난 널 이 학원에서 빼내려고 들어온 것이니까."

 "이 학원에서 날 빼내겠다고?"

 "내가 아까 학림고에 대해서 다 이야기해 줬잖아. 너 그런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 밑에서 배우고 싶어?"

 "그야 싫지만‥‥‥."

 '비싼 돈을 들여 수강 등록을 했는데 관둔다고 하면 아빠가 펄쩍 뛰겠지.'

 그 점이 걱정이 되었지만, 채린은 곧 떨쳐 냈다.

 유한의 말래로 비열하고 비리투성이인 자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들이 성적을 대폭 올려 준다고 하지만 그것도 사기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아무리 수업을 듣고 공부를 했어도 성적이 오른다는 느낌은 안 들었으니까.

 "내가 너랑 다니려고 좋은 학원 하나 봐뒀어. 학원비도 내가 낼 테니까 여긴 그만둬, 시아야."

 "알았어. 하지만 가기 전에 할 일이 있어."

 그녀가 말한 할 일이 무엇인지 눈치 챈 유한이 물었다.

 "그놈을 손 봐주자는 거겠지?"

 여기서 놈이란 정현일을 말한다.

 채린은주먹을 확 움켜쥐었다. 눈앞에 정현일이 있다면 그대로 날려 버릴 듯한 기세.

 "지금까지 날 농락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그것도 이자까지 쳐서. 그런데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채린은 유한의 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게임플레이 시스템을 이용. 아니 악용하는 데는 그가 전문가이기에.

 유한은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하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되겠다"

 "어떻게?"

 "그러니까말이야‥‥‥."

 유한은 채린에게 정현일 일당을 골탕 먹일 아이디어를 말했고. 이야기를 다 들은 채린도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애꿎은 애들이 피해를 입으면 곤란하잖아."

 "흠. 그건‥‥‥."

 유한은 금방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그러나 채린이 제동을 걸었다.

 "리지스에게 협조 요청을 한다고? 어떻게? 걔는 학원에도 못 들어오고. 우린 지금 개한테 쪽지도 못 보내."

 학원 필드는 외부의 쪽지나 귓속말을 차단함은 물론,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쪽지도 막고 있었다.

 "걱정 마, 바츠로 접속해서 리지스에게 쪽지를 보내면 돼."

 "맞다! 그럼 되겠네."

 번거롭지만, 그렇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잠깐 바츠로 접속했다 돌아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이쑈어, 알겠지?"

 "그래, 빨리 갔다 와."

 채린의 눈앞에서 유한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정현일 골탕 먹이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2          

 크크크크!

 히히히히히!

 코너를 돌자마자 몽달귀신과 손각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몬스터들이었다.

 "파이어 불라스트 (Fire Blast)!"

 전사들이 앞에서 놈들을 막자. 정현일은 보유한 마법 스킬 중 하나를 사용하여 몬스터들을 죄다 태워 버렸다.

 베히모스와 달리, 지금 그가 다루는 캐릭터 일현은 마법사였다.

 "대단한데, 현일아."

 "크크크. 이 정도는 껌이지."

 일진들의 아부에 정현일은 마음껏 으스댔다.

 마법사 일현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몬스터를 몰아서 죽여 댄 덕분에 그의 레벨은 벌써 120대에 올라 있었다.

 "학원 던전은 경험치를 많이 줘서 좋다니까."

 "아이템도 두둑이 주고‥‥‥ 히히히."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과 돈을 챙긴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전진하던 그들은 안전지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유저들을 발견했다. 뭔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지, 흥분한 그들의 이야기가 정현일 일당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교문 밖에서 지그제 무구를 팔고 있다고?"

 "그래. 학림 아카데미 학원생들에게만 오십 퍼센트 파격 세일이래. 지그와 동업자인 리지스가 직접 롸서 좌판을 열었어."

 "야. 거기 에르젠 합금 무구도 있냐?"

 "종류별로 죄다 갖고 왔대. 빨리 가자. 안 그럼 딴 애들이 다 사갈거야."

 그들은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던전 밖으로 나갔다.

 정현일 일행은 이후로도 그런 이유로 던전을 나가는 파티를 여럿 보았다.

 안 그래고 넓은 지하에 그나마 있는 유저들까지 모조리 나가자 고요하고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거 어쩐지 우리만 남은 것 같은데?"

 "우리도 무구 사러 가 볼까?"

 누군가가 구미가 당기는지 그렇게 말하자. 정현일이 버럭 화를 냈다.

 "니들은 자존심도 없냐! 그 진따 새끼가 만든 무구를 걸치고 다니게?"

 "아니. 그래도 아이템에 죄가 있는 건 아니잖아."

 "닥쳐! 그 새끼 무구 사는 놈은 당장 피떡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그리 알아."

 그렇게 을러대자 누구도 사러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현일은 한다면 하는 녀석이다. 더구나 녀석 뒤에는 흑곰파라는 무서운 조폭들이 있지 않은가.

 모두들 아쉬움을 접고 정현일의 뒤를 따랐다.

 정현일은 너무 윽박만 질러 대서는 안 된다 생각했는지, 녀석들을 다독여 댔다.

 "경쟁자가 모두 사라진 지금이 레벨을 왕창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이걸 놓쳐선 안돼."

 정현일은 파티원들을 이끌고 가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그 녀석이 동업자를 이용해 학원 교문 앞에서 좌판을 연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돈을 벌거나 고객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던 정현일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고함을 질렀다.

 "앗, 저 녀석은!"

 "왜? 중간 보스라도 나타났어?"

 동료들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보다 더한 놈이야. 지그를 본 거 같아."

 "지그?"

 "그래. 우리 길드를 분해시킨 대장장이 지그 놈 말이야."

 이 파티서 지그에게 원한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모두 철십자 길드의 간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놈 때문에 잘나가던 길드가 해체되었고. 전쟁 중에 죽어서 아이템을 잃고 경험치도 많이 날렸다. 더구나 그놈의 정체는 과거 자신들의 밥이었던 강유한이었다.

 "진짜 지그야? 잘못 본 거 아냐?"

 "진짜라니까!"

 정현일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코너에서 낯익은 얼굴이 슬쩍 나왔다가 사라졌다.

 "지그다!"

 "대장장이 지그야!"

 이번에는 꽤 많은 녀석들이 유한의 모습을 봤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세라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놈이 여기 있는지는 그리 증요하지 않았다. 그저 놈을 잡아 화풀이를 하고 싶을 뿐.

 "잡아!"

 "잡아서 죽여 버렷!"

 복수에 눈이 멀어 버린 정현일과 그 일당은 전력을 다해 코너를 돌았다. 그런데,

 우르르릉!

 발에 뭔가 걸린다 싶더니. 양쪽의 벽이 꺼지고 이내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커다란 바위와 돌이 일행을 덮쳤다.

 "으악. 이게 뭐야!"

 "왜 멀쩡한 천장이‥‥‥!"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정현일 일당은 기겁해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재수 없는 세 사람이 바위에 깔려 비명횡사 하고 말았다.

 -아놔, 죽었다.

 -단테르의 검을 떨궜어 ㅠ.ㅠ

 "걱정마. 나한테 부활의 성수가 있어."

 살아있는 녀석들은 바위들을 치우고 죽은 동료들을 되살려 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천장이 무너진거야?

 월하의 공동묘지는 유령이나 언데드가 출몰하는 던전이지, 함정이나 기관 장치로 유저들을 곤란하게 만드는곳은 아니다.

 지금까지 그들 파티가 수십 번이나 이곳을 들락거렸지만. 그런 것이 추가되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그들이 궁금해 할 때 다시 앞에서 사라졌던 유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 머저리들. 거기서 뭐 하냐?"

 "지그다! 잡아!"

 다시 한 번 추격이 시작되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놈의 모습에 정현일 일당은 분통이 터졌다. 

 "너 이 새끼 오늘 죽었어!"

 "흥. 일단 잡고 나서 그런 소릴 하시지."

 "크아아악!"

 발악하며 유한을 쫓아가던 정현일이 갑자기 아래로 쑥 사라졌다. 함정이 있었던 것이다

 "엇, 현일아!"

 함정 밑에는 보기에도 날카로워 보이는 창검들이 잔뜩 박혀 있었다. 간신히 뒤에서 잡아 주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현일은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을 것이다.

 "휴, 위험했어."

 "그러게. 누가 여기다 함정을 파 놓은 거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들은 다시 유한을 쫒아 앞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코너을 돌 때마다 함정이 있었고. 정현일 일당은 조금씩 피해를 입으며 포션과 부활의 성수를 소모해야했다.

 "아무래도 지그 이놈이 수작을 부린 것 같다."

 함정이 있는 던전이 아니다. 그런데 자꾸 함정이 나오니 그렇게 의심할 만했다.

 "뿌드득! 이 새끼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일단 지금 게임에서 조져 놓고. 그다음은‥‥‥."

 정현일 일당은 이를 갈며 조심해서 앞으로 나갔다. 다시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렇게 몇 개의 함정을 피해 비교적 넓은 공간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수백 마리의 유령, 언데드 몬스터들이 뒤엉켜 있다 그들을 향해고개를 돌렸다.

 크르르?

 키키?

 정현일 일행을 인지한 몹들이 일시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헉! 뭐가 이렇게 많아!"

 그들은 왜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몹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싸움에 임해야 했다.

 공간이 넓다고 하지만 통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을 뿐, 수백 마리 몬스터를 상대로 싸우기엔 여의치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았기에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전멸당하기 싫었던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싸웠다. 

 "파이어 볼!"

 "휠 슬래시!"

 "마나 블레이드!"

 한참을 싸운 끝에 결국 몸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나마 정현일의 파티원들이 레벨 200이 넘는 고수들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피해는 만만찮았다. 갖고 있던 포션과 부활의 성수를 모두 소모했고. 파티 원들 중 반이 죽음을 당했다. 살아남은 것은 정현일을 포함한 다섯 명뿐.

 나중에 부활 포인트에서 합류하면 된다지만. 깎인 경험치와 날려버린 아이템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흘렀다.

 "왜 저 몬스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던 거지?"

 "그러게. 곳곳에 흩어져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유저들이 사냥하기 쉽게 차례대로 등장해야 할 놈들이 한곳에 다 모여 있었다. 이건  분명 비정상적인 상황.

 "지그 이 녀석이 몹 몰이를 한 게 아닐까?"

 "설마! 그런데 그 녀석은 어디로 갔어?"

 분명 그의 뒤를 쫒아온 일행이었다.그렇다면 놈도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유한을 찾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망치질 소리가 들렸다. 대장간에서 쇠라도 부들기는 것처럼 망치질 소리의 박자는 일정했다.

 "강유한 그 자식이로군!"

 지금 이곳에서 망치질을 할 사람은 놈밖에 없었다.

 "조심해! 함정일지도 몰라!"

 정현일 일당은 당장 달려가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올 참고 조심조심 망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기왔다.

          3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막다른 통로에서 유한이 태평하게 쇠를 두들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장간 설비가 마련된 짐마차까지 소환해 놓고 아주 대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강유한 이 새끼!"

 "헉! 큰일 났네. 아직 함정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유한은 절대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정현일은 유한에게 달려드려는 둥료들을 말린 뒤 여유만만한 그에게 말을 건냈다.

 "너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냐?

 "뭐 어쩌다 보니까."

 "바른대로 불어, 이 새끼야!"

 정현일이 윽박지르자. 유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은 대학 좀 가고 싶어서 돈 내고 들어왔다. 왜? 아니꼽냐?"

 하지만 정현일은 유한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분명 학림 아카데미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 홈페이지에서 수강신청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수강생의 정보를 드림맥스에 전송하기 전에 학생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는데, 거기서 유한이 통과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뭔가 얍삽한 수나 알려지지 않은 버그를 악용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 진따 놈을 어떻게 요절내느냐 하는 것이다.

 "니 여친 때문이냐? 학원에 들어와서 나한테 이러는 이유 말이야."

 "그래, 인마. 자식이 추접하게 그런 식으러 보복하냐?"

 니가 그러고도 사내새끼나? 밑에 달린 방울 떼 버려, 병신아."

 진짜 떼 내라는 듯 유한은 방금 완성한 단검을 정현일의 발치에 던졌다.

 그 도발적인 행태에 정현일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여기서 약이 오른 모습을 보이면 유한이 더 기고만장해 할 테니까.

 "강유한. 너 지금 실수한게 뭔지 아냐?"

 "글쎄, 함정을 완성하지 못한 것?"

 "멍청한 놈, 이왕 오려면 바츠로 와야지. 깝(깜→깝. by. 곰)도 안 되는 지그로 접속해 와?

 최소한 블랙인지 뭔지 하는 강철 골렘은 끌고 왔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재 유한은 완전한 혼자다. 지그 정도는 둘만 나서도 제압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건 내 실수일지 몰라. 하지만 뇌제의 홀을 쓴다면 어떨까?"

 뇌제의 홀.

 5분 동안 벼락을 뿌리는 전신으로 만들어 주는 최강의 유니크 아이템.

 원래 정현일이 가지려 했던 것인데 유한의 손에 들어갔다.

 "뇌제로 변신하기 전에 조져!"

 정현일의 명령에 동료들은 검을 뽑고 대쉬와 갑은 돌격형 스킬을 가동하며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무섭게 달려들었지만. 유한은 허리에 차고 있는 뇌제의 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헉!"

 "커억!"

 돌격하던 녀석들이 짧은 비명을 토하며 유한의 앞에서 쓰러졌다. 갑자기 목이 날아가고 몸이 동강 나 죽은 그들은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정현일은 크게 당황했다. 순식간에 동료들을 죽여 버리다니. 놈은 대체 어떤 스킬을 쓴 것인가?

 당황하는 그의 귓가에 유한의 친절한 설명이 들려왔다.

 "내가 철공소 짓고 나서 블랙 아이언을 수도 없이 만들었다. 블랙 아이언에 들어가는 부품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가는 강철 와이어가 있지. 작은 부품을 움직이게 하거나 여럿을 꼬아서 근육 기능을 하게 만드는 거야."

 '그래서?'

 정현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여기다 살짝만 손질을 하면 꽤 위험한 무기가 되더라고. 어떤 멍청한 놈들이 불나방같이 달려들면 효과가 좋을 것 같고."

 갈리가 만들어 준 와이어 건틀렛 덕분에 유한은 와이어를 전투에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유한은 인벤토리에 있던 블랙의 예비 부품 중. 가는 강철 와이어를 꺼내 거기다 아교를 바르고 사기그릇을 깬 가루를 묻힌다. 그리고 양쪽 벽에 팽팽하게 걸어 두었다.

 결과는 아주 대만족이었다.

 "이 자식이!"

 유한의 득의양양한 표정에 울컥 화가 난 정현일은 손에 든 스태프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법으로 유한을 공격할 생각이었지만. 유한이 왼팔에 찬 와이어 건들렛을 쏘아 보낸 것이 더 빨랐다. 와이어의 끝에 달린 강철 추는 주문을 외치려는 정현일의 턱을 후려갈겼다.

 "컥!"

 "정현일, 너 지금 실수한 게 뭔지 아냐?"

 유한은 몸을 숙여 벽에 걸어 놓은 와이어를 지나 앞으로 나왔다. 조금 전 유한에게 던진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정현일은 수치와 분노로 부르르 떨었다.

 "날 잡고 싶거들랑 베히모스로 덤벼야지 깝(깜→깝.by 곰)도 안 되는 부캐로 덤비면 쓰나."

 "이 망할 새끼가!"

 악을 쓰는 정현일의 눈앞으로 펜릴 소드가 갑자기 확대되었다. 정현일이 마법 스킬을 쓰기 전에 유한이 달려와 그의 목에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급소를 맞았습니다. 크리티컬 데미지를 받았습니다.]

 '헉!'

 캐릭터 일현의 레벨은 지그보다도 낮고. 마법사라는 직업은 근접 능력이 대장장이보다도 취약했다. 거기다 허를 찌른 유한의 공격을 정현일이 막아 낼수 있을 리 만무했다.

 급소에 치명상을 입은 정현일의 HP 바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한이 검을 옆으로 확 뽑아 버리자. 그나마 간당간당 남아 있던 HP포인트도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정현일은 유한의 손에 쓰러졌다.

 유한은 사망 판정을 받은 정현일 일당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이마를 두들겼다.

"아. 이런! 하나 말해 주는 걸 잊었네."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들려주면 더 좋을 것 같았는데. 깜빡하고 말았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유한은 히죽 웃으며 서둘러 이동할 준비를 했다.

 <사망하셨습니다. 다시 게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유한에게 죽은 정현일은 서둘러 재접속했다.

 방심하다 당하긴 했지만. 이제부터 지금까지 당한 것옵 몇 배로 갚아 줄 것이다.

 "기다려라, 강유한이 새‥‥‥ 허어억!"

 던전의 부활 포인트에 모습을 드러낸 정현일은 무섭정 떨어지는 HP를 보고 깝짝 놀랐다.

 [ -화상을 입었습니다. 서둘러 치료하십시오.]

 [ -불길이 너무 뜨겁습니다. 어서 밖으로 탈출하십시오.]

 정현일은 경고 메시지에 서둘러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부활 포인트 인근이 온통 불바다였다.

 바닥에 가득 쌓여 있는 장작들과 이상한 둥근 광석. 그리고 끈적한 검은 액체에선 예사롭지 않은 불꽃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시뻘건 불꽃들에 닿을 때마다, HP가 쭉쭉 떨어졌다.

 "콜록! 콜록! 강유한 이 개자식!"

 "으악! 또 죽겠다!"

 "빌어먹을, 포션도 없는데!"

 부활 포인트에는 정현일 말고 그의 동료들도 있었다 유한에게 죽고 부활 포인트에서 새로 시작한 그들을 맞은 것은 거센 불꽃의 벽이었다. 시커먼 연기와 불꽃은 그 들을 부활 포인트 안에 가둬 두고 살아나면 죽이기를 반복하였다.

 불꽃은 그들이 떨어트린 아이템까지 불태워 없애고, 죽음은 그들이 열심히 쌓아 놓은 경험치를 앗아 갔다.

 '재기랄! 어찐지 먼저 죽은 녀석들이 안 오더라 했더니만!'

 처음엔 미로 같은 던전에서 헤메거나 몬스터와 싸운다고 생각했는데, 강유한의 수작 때문이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이 이 불꽃은 유한이 준비해 둔 것이 맞았다.

 정현일 일당을 유인하기 전 유한과 채린은 유저들을 다 보내고 부활 포인트에 다량의 장작과 초열탄을 쌓아 놓았다. 거기다 유한은 레뮤다 대륙 여행 이후로 쓸데가 있을까 싶어 갖고 있던 역청까지 뿌려 놓았다.

 그렇게준비를 해 둔 다음. 유한에게서 정현일 일당을 유인한다는 귓속말올 받은 채린은 부활 포인트와 그 주변에 불을 지르고 물러났다.

 그리고 벌어진 결과가 이거였다.

 "시발! 뭔 놈의 불이 아직도 안 꺼지나?"

 "현일아, 실드 마법만 쓰지 말고 아이스 계열 마법 점 써봐!"

 "아놔, 미치겠네! 이번에 죽으면 세 번째야!"

 그들은 불이 꺼지길 기다렸지만, 쉽게 꺼지지 않았다.

 철을 녹일 정도로 고열을 일으키는 초열탄과 물을 뿌려도 꺼지지 않는(않은→않는 by. 곰) 역청의 조합은 치가 떨릴 정도였다.

 "제길, 나 이번에 죽으면 접속 안 해!"

 "흑흑, 강유한 이 나쁜 시키."

 경험치와 아이템만 잃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동료들이 하나둘 로그아웃했다.

 정현일과 몇몇 녀석들은 끈질기게 버텼다 불꽃이 조금 누그러드는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유한이 나타났다.

 "어이, 춥지 않냐?"

 그러면서 친절히 초열탄과 장작을 던져 주는 유한이었다. 정현일과 그의 동료들은 진짜 미칠 것 같았다.

 "야, 이 새끼야. 그만 좀 해!"

 "뭐? 더 달라고? 알았어."

 유한은 울부짓는 그들을 위해 불꽃을 더 뜨겁게 피워 올렸다.

 '정현일 너 때문에 채린이랑 사이가 깨질 뻔했어. 내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이 스트레스 받은 줄 알아? 절대 못 봐준다. 이 자식아!" 

 결국 견디다 못한 정현일은 캐릭터 일현의 접속을 끊었다.

 그러나 그는 유한에 대한 북수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개자식! 그래. 네 말대로 베히모스로 덤벼 주마.'

 정현일은 한동안 묵혀 둔 본캐 베히모스로 접속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캐릭터 대기실 한쪽에 있던 우체통에서 쪽지가 왔다는 소리가 울렸다.

 '뭐지?"

 정현일은 일단 쪽지를 열어 보았다.

유한 놈이 놀려 대려 보낸 게 아닌가 했는데. 뜻밖에도 채린에게서 온 것이었다.

 일현아, 나 시아인데. 요새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심란해. 네 얼굴 보고 싶어서 그런데 1시간 뒤에 반포 나들목 공원으로 올래? 너에게 꼭 할 말이 있어.

 '오호라!'

 유한 때문에 내내 일그러져 있던 정현일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걸렸다.

 채린의 쪽지를 보자니.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 넘어온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게임에서 자신을 엿 먹인 강유한에게 통한의 일격을 먹여 줄 찬스다.

 '추잡하다고? 웃기지 마라. 강유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최종 승자는 암컷을 차지하는 수컷이라고.'

 조만간에 강유한의 발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듯,

 괜히 기분이 좋아진 정현일은 게임에서 겪었던 굴욕스런 일읕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채린을 만날 준비를 하러 나갔다. 채린이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만나려는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

          4          

 정현일이 반포 나들목 공원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밤10시를 넘어 있었다. 늦은 밤에 불러낸 채린에 한 치의 불만도 없었다.

 '후후, 이런 밤이 오히려 더 좋지.'

 이렇게 늦고 조용한 밤 시간이야말로 분위기를 잡고 감정을 고조시키기에 더 좋다. 벌써 여러 여자애하고 상대 해 본 정현일이었기에 그렇게 만들 충분한 자신감이 있었다.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도련님."

 개인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인 대철이 물었지만 정현일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아요. 계집에 만나러 가는데 뭔 일이 있겠어요?"

 "그래도 지난번 같은 불미스런 일이 생기면‥‥‥."

 대철은 패밀리 레스토랑 앞에서 정현일이 유한에게 맞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 일 때문에 그는 정현일의 할머니 홍영순에게 두 시간 넘게 잔소리를 들었다.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면 네 모가지가 날아갈 거란 경고와 함께.

 덕분에 그의 태도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아. 괜찮다니까요. 날 반편이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그렇게 정현일은 대천을 놔두고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채린은 주차장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두커니 하늘의 별을 보고서 있던 그녀는 정현일이 다가오자 돌아서서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왔니. 일현아."

 '뭐야.이 계집에 복장이 왜 이래?'

 민소매 티에 헐렁한 건빵바지를 입은 채린의 패션은 심야 데이트(?)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차라리 그낭 교복 차림이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정현일은 그런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상냥하게 웃으며 채린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니, 시아야. 이 늦은 밤에 날 보자고 하고."

 "그게 저번에 유한이랑 싸우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놈과 찢어져야 할 것 같다 이거지?

 정현일은 채린의 말을 그리 예상하고 뒤에 해 줄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힘내라든지, 그런 녀석은 잊어라, 이젠 내가 곁에 있어 줄게 등등.

 그러나 정현일은 준비해 놓은 말을 떠벌릴 수가 없었다. 채린에게서 너무 예상 밖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널 두들겨 패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더라."

 "뭐?"

 정현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채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짜-- 악!

 고요한 공원 안에 경쾌하고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현일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도 그랬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왜, 왜 그래? 시아야."

 그러나 채린은 물음에 답하는 대신 따귀를 또 한 대 쳤다. 이번엔 뺨이 아니라 귓방망이를 얻어맞은 정현일은 휘청거리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일어나. 그리고 가식적인 면상은 이제 쓸모없으니까 내다버려."

 채린은 일부러 정현일이 충격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냥 이대로 끝내 버리기에는 분이 플리지 않았다.

 정현일은 어지러움이 가시자 서둘러 채린에게 말을 건넸다.

 "시아야 강유한 그 녀석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화 모르지만, 그놈이 말하는 건 전부거짓말‥‥‥."

 "강유한을 담당했던 선생한테서 이메일 주소를 알아냈지. 그 주소로 사진을 보내니까 둘이 알아서 싸우다가 갈라지더라고."

 채린은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들었던 말의 일부를 고스란히 정현일에게 되돌려 주었다. 말투와 높낮이까지 흉내낸 그녀의 말에 현일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건 네가 했던 말이었어. 다른 말도 들었는데 도로 들려줄까?

 정현일은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어찌 된 건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채린을 꼬시려는 자신의 계획이 들통 났다는 것을 말이다.

 채린의 말대로 더 이상 가식적인 면상을 쓰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원래 자신의 인상으로 돌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거 한 대 먹었네.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 년 한테."

 싸늘하던 채린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래, 그런 년한테 먼지나게 맞아야 할 거다. 난 날 농락한 녀석은 절대 용서 안 하거든."

 "웃기는 년이네. 내가 맞아 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정현일은 슬그머니 뒤춤에서 삼단봉을 꺼내 들고 채린에게 휘둘렀다. 그러나 미리 그가 뭔가 끄집어내 휘두를 것을 예상한 채린은 그 공격을 슬쩍 피해 버렸다.

 정현일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 채린에게 달려들며 삼단봉을 휘둘렀다.

 "덤벼 봐. 쌍! 먼지 나게 팬다더니 왜 피하기만 해?"

 "무기를 사용하다니‥‥‥ 비겁한 자식!"

 "하하하. 할 말은 그것밖에 없냐?"

 본전이 드러난 정현일은 계획을 크게 수정하기로 했다.

 자신에게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린의 모습을 유한에게 보여 주기로.

 그러나 이성으 잃은 녀석은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채린이 흑곰파 두목이 두려워했던 인간 병기 송태수의 딸이라는 것.

 '이때다!'

 계속 삼단봉을 휘둘러 대던 정현일의 공격이 잠깐 느려졌다.

 채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정현일의 손을 발차기로 후려쳐 삼단봉을 떨어뜨려 버리곤. 곹장 달려들어 지옥의 귀싸대기를 날려 주었다.

 짝 소리를 들은 순간 정현일의 눈앞에 블꽃이 일었다.

 '뭐 이런!'

 싸움 좀 한다는 양아치들도 채린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하뭍며 잔머리를 굴리고 간계를 꾸미는 정현일이 정면 승부로 그녀를 이길 리 없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정현일은 자존심이 상해 고함을 질렀다.

 "이년이‥‥‥."

 짝!

 "정말 죽여버릴 테‥‥‥."

 짝짝!

 성질이 매를 벌고 말았다.

 한 번 맞을 때마다 골이 울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정현일은 이러다 맞아 죽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사람을 농락하니 재밌니? 당하는 사람 기분은 생각해 봤니. 이 쓰레기 같은 자식아!"

 "그, 그만‥‥‥."

 계속해서 따귀를 얻어맞은 정현일의 얼굴이 공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의 멱살을 움켜잡은 채린은 이 정도로 녀석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 먼지 하나도 안 일었어!"

 채린은 재차 따귀률 날리려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정현일의 따귀로 날아가지 못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대현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하지 못하겠나!"

 불안감에 정현일을 찾아온 대철은 곧장 따라오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정현일이 투덜거리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묵사발이 나진 않았을 테니까.

 "이봐요, 아저씨. 남의 여친 손은 왜 잡습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대철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히죽 유한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위험을 느낀 그는 재빨리 방어로 전환하려 했지만. 유한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로 파고드는 것이 더 빨랐다.

 "컥!"

 대철이 크게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지금 유한이 공격한 부위는 늑골의 11,12번째 뼈가 있는 부분으로 늑골들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다.

 유한은 대철의 실력이 자신보다 월둥히 높다는 걸 알기에, 기습적으로 급소를 강타했다.

 선방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대철은 더 이상 유한보다 우위에 설 수 없었다. 그는 정현일이 채린에 이어 유한에게까지 두들겨 맞으면 정말 죽고 말거라 생각했다.

 "그만해! 도련님께 더 손대면 경찰을 부르겠다!"

 "아놔, 또 경찰 부른데."

 유한은 채린이 실컷 분풀이를 한 다음엔 자신이 넘겨받으려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철이 휴대폰까지 뽑아 들고 협박하자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어떡할까? 손대지 말라는데."

 유한의 물음에 채린이 어쩐 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잘 생각했다. 내가 전화 한 통만 하면‥‥‥."

 말을 하다 말고 대철은 입을 쩍 벌렸다. 채린과 유한이 돌아서는 척하다가 기습적으로 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꾸에엑--!"

 "작별 인사 대신이다!"

 미리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발차기는 연습을 한 것처럼 호흡이 딱 맞았다.

 아름답고 시원한 커플 발차기를 맞은 정현일은 뒤로 벌렁 날아가 공원 쓰래기통에 거꾸로 처박혔다 쓰러졌다.

 "이것들이 진짜!"

 눈이 뒤집힌 대철에게 유한과 채린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원하신 대로 손은 안 댔습니다>"

 "발만 썼어요. 정말이에요."

 누가 발을 쓴 걸 몰라서 하는 말인가.

 대철이 정말 전화번호를 누르려 하자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럼 쓰레기 분리수거 잘하세요."

 '뭐 저런 녀석들이 다 있지?'

 기가 막혀 입만 벌리고 있던 대철은 정현일의 신음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황급히 달려가 정현일이 뒤집어쓴 쓰레기통을 던져 버리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도련님! 괜찮습니까? 야, 현일아!"

 다급한 마음에 대철은 정현일의 이름을 불러 댔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현일은 흠칫 놀라 주변을 살펴 보았다.

 "그, 그 계집애는?"

 "벌써 갔습니다."

 대철의 말을 들은 정현일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얼얼하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세상이 뒤집혀 보였다. 아니. 정말 세상이 뒤집혀 버린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을 부축하는 대철에게 말했다.

 "이번 일‥‥‥ 비밀로 해 주세요."

 "무슨 말입니까? 이걸 어떻게 비밀로 합니까?"

 홍영순이 정현일의 이 꼴을 본다면 발악을 하고 캐물을 것이다.

 "비밀로 해요! 무조건 비밀로 하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정현일은 질질 울고 있었다.

 이가 갈렸지만. 계집애한테 맞았다고 광고하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은 수치스런 사건이 밖으로 알려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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