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3 학원에 잠입하다
1
여느 때와 같은 여름날 아침.
교문 앞에서 학생들이 등교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이태호 선생은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녀석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자식 또 왔네."
얼쩡거리고 있는 녀석은 바로 유한이었다. 채린을 직접 만나 사과하기로 한 유한은 해가 뜨자마자 강서고 교문 앞으로 달려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거기 너. 이리 좀 와 봐."
이태호가 자신을 부르다, 유한은 주춤거리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저 수상한 놈 아닌데요."
"그래, 안다. 너 지그지? 지그 제철소 회장인."
"맞습니다. 강유한이라고 합니다."
유한도 이태호를 게임에서 몇 번 본 일이 있었고, 채린과 강서고 학생들에게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그가 이 학교의 학생 주임이자 채린의 담임임을 알고 있었다.
"너 채린이 때문에 온 거지?"
유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태호는 손에 든 굵직한 사랑의 매로 유한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인마, 연애질은 게임 속에서 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아? 요새 채린이 공부한다고 바뻐, 일, 이 학년 내내 성적도 나빳던 녀석이 대학은 중상위권에 같 거라고 업마나 열심인지."
"그래요?"
"그래. 에들한테 듣기론 남자 친구가 장학금 마련해 줘서 그렇다는데‥‥‥ 너 대체 걔한테 뭘 해 준 거냐?"
유한이 채린의 대학 장학금을 마련해 준 것은 맞았다.
예전에 국내 굴지의 기업인 미래 모터스가 광고 협찬을 하자고 찾아왔올 때, 그는 자신과 채린, 동생들의 대학 등록금을 요청했었다. 미래 모터스는 장학금이란 명목으로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그 이야기는 채린에게 하지 않았는데.'
아비지와 송코에게만 살짝 이야기했을 뿐이다. 아마 송코가 채린에게 말해 준 모양.
'아! 그래서 채린이가 요즘 게임 속에서도 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거구나.'
유한의 성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유한과 같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그것도 모르고 유한은 채린이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다고 섭섭해 했고. 정현일의 꾐에 빠진 줄 알고 오해했다.
혹시 학림 아카데미에 다니게 된 것도 송태수가 보낸 것이 아니라 채린이 졸라서 간 건 아닐까. 다른 걸 떠나서 성적은 기가 막히게 올려 준다고 소문이 난 곳이니까.
"아무튼 연애질은 밤에 게임에 접속해서 해라. 나는 연애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해도 안 늦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한다. 왜냐하면 그거 다 헛소리거든. 내가 너만 할 때 그 말 믿고 공부만 했다가 황금 같은 청소년기를 허망하게‥‥‥."
이태호의 설교를 유한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그러다 낯익은 목소리를 포착했다. 고개를 들린 유한의 눈에 또래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채린의 모습이 보였다.
유한은 곧장 그녀 앞으로 달려갔다.
채린은 잠깐 놀라는 듯하다가 이내 쌀쌀맞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니?"
"채린아, 저번에 그 일은 내가 오해해서 그런 거야. 너 하고 있던 녀석이 정현일이란 놈인데. 나하고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 그 자식이 보복한잡시고 날 이용해서 날 열받게 만들려고 했어. 난 네가 그놈 농간에 놀아나서 정말 그 자식이랑 사귀는 줄 알고‥‥‥."
유한은 복잡한 사정을 되도록 간략하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 지겹게 느껴졌던지, 채린은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오해해서 미안하다. 네 말 안 듣겠다고 한 것도 잘못 했어. 그러니까 우리 옛날처럼 사이좋게 지내자."
"그래?"
채린이 밝게 미소를 지었다.
쌀쌀맞던 그녀의 얼굴에 맴도는 미소를 보고 유한은 환하게 웃었다. 채린이 이제야 자신의 사과를 받아 준다고 생각했다.
"나도 널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근데‥‥‥."
"커헉!"
유한의 환한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사과하던 채린이 야멸차게 움켜쥔 주먹을 그의 복부에 꽂아 넣었기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유한은 막을 틈이 없었다.
"그때 나 무척 실망했어. 너랑 일현이, 아니 정현일인지 하는 애와 무슨 악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날 못 믿는 것 같아서 정말 싫었어. 나는 날 겨우 요만큼밖에 못 믿은 애랑 사귀고 있었구나 싶던 거 있지."
"채, 채린아."
유한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한동안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아 줘."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한 채린은 쌩하니 학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채린의 말에 유한은 석화 마법에라도 걸린 듯 단단히 굳어 버렸다. 그 이상 상태는 채린이 교문을 통과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태호는 안됐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유한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운해서 저러는 거다, 며칠 지나면 화가 풀릴 테니까 너무 걱정 마라.'
"선생님!"
채린의 마음을 완전히 푸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유한은 진짜 선생님 같은 분의 말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2
유한이 채린을 다시 만난 그날 저녁
오랜만에 대장장이 지그가 아르페디아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헉! 이건 뭐냐?'
접속과 동시에 무섭게 밀려드는 어둠의 기운에 깝짝 놀란 유한은 검읕 뽑으며 돌아섰다. 어둠의 기운을 흘리는 주인공이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지이이~ 그으으!"
"아, 안녕 리지스."
유한에게 화가 난 소녀는 채린뿐만 아니었다.
그간 제철소 업무까지 몽땅 떠말아 했던 리지스는 자신을 고생시킨 원흉이 나타나자 악귀같이 달려들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기로서니, 날 이렇게 골탕을 먹여?"
"미안하다. 리지스. 사과하는 뜻으로 백만 골드 줄게."
"백만 골드?"
유한의 한마디에 리지스는 언제 화를 냈느냐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어몸둠의 원령에서 관대한 천사로 바뀌는 그녀의 모습에 유한은 할 말을 잃었다.
"어머, 꼭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뭐 준다면 고맙게 받을게."
'이 녀석은단순해서 좋군.'
채린이도 이렇게 마음을 풀어 주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그거랑은 상황이 달랐고, 동업자 수준인 리지스를 연인인 채린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농땡이 치고 싶으면 얼마든지 쳐도 좋아. 대신 농땡이 칠 때마다 백만골드씩 주기다."
백만 골드라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철공소를 하나 세울 수 있는 액수었으니까. 그리나 이제 아르페디아 갑부 소리를 듣는 유한에게는 껌 값일 뿐이다.
"알았어. 근데 나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리지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한은 곧장 질문을 던졌다.
"요 며칠 사이에 시아가 제철소에 온 적 있어?"
"없어, 쪽지를 보내니까 한동안 학림 아카데미에 머물면서 공부할 거라던데. 그리고‥‥‥."
"그리고 뭐?"
바람 피운 거냐고 물으니까 엄청 화를 내더라. 대체 무슨일이 있었던거야? 나도 자세히 좀 알자."
"그냥 내가 경솔했기 때문에 작은 다툼이 있었어.'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닌지라 유한은 대충얼버무렸다.
그는 리지스를 만난 김에 한 가지 더 물어보기로 했다.
"너 혹시 아이템 현 거래 해 본적 있어?"
"아이템 현 거래? 나더 그거 해서 돈 벌려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돈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다른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들과 같이 아르페디아 온라인도 아이템 현 거래가 존재한다.
대체로 게임을 편하게 하겠다는 사람들이 현금으로 게임 머니나 아이템을 사들이곤 했다.
현재 레어 급 아이템은 종류에 따라 몇 십에서 몇 백 만 원, 유니크 중 어떤 것은 천 만 원대에 거래되곤 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인기와 시장 점유율이 그런 가격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게임 머니도 환율이 있어. 거기다 현 거래만 전문적으로 하는 유저나 길드들도 있고.."
"그런 놈들은 나도 본 적이 있지.
지난번에 레뮤다 대륙에 갈 적에 만났던 아르마달 길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돈은 왜 필요한 건데?"
유한이 가진 아이템 몇 가지만 팔아도 적지 않은 돈을 만들 수 있었다.
"으응, 그게‥‥‥."
"알겠다! 너도 시아 따라서 학림 아카데미에 가려는 거지? 바람날까 봐 옆에서 지키려고."
"그거 아니거든!"
유한은 펄쩍 뛰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리지스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했다.
"아니라고? 분명히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죽어도 학림 아카데미에는 안 갈 거거든? 학림 재단 놈들에게 돈을 갖다 줄 바에는 그냥 동네 초딩들한테 뿌리겠다!"
생쥐 스프를 주는 집단에게는 10원짜리 하나라도 주기 싫은 유한이었다. 그래서 채린이도 얼른 빼내서 다른 학원에 다니도록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학원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미래 모터스 관계자의 방문 이후로도 '게임=공부 방해'라는 부모님의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유한이 게임 내 학원에 대해 말해 봤지만. 회의적으로 여길 뿐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공부 안 하고 게임만 더 하려는 게 아니나며 역정을 내셨다.
자연히 게임 내 학원에 등록하기위한 자금은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자금은 스스로 마련헤애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인 바로 현 거래였다.
"일단 내가 가진 아이템들 중 일부를 처분했으면 하는데, 리지스 네가 거래 시세 좀 알려 줘."
"그럴 게 아니라 직접 처분해 줄 테니까 나한테 맡겨, 수수료는‥‥‥‥ 지그 넌 동업자라 공짜로 해 줄게."
"그래? 고마워."
유한은 리지스에계 현 거래를 믿고 말기기로 했다. 계산에 밝은 그녀라면 잘 처분해 줄 테니까.
'일단 학원비 문제는 그렇게 해결하기로 하고‥‥‥.'
미리 봐 둔 학원도 있겠다, 이제 남은 것은 채린을 학림 아카데미에서 빼 오는 것뿐이다.
문제는 채린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인데, 현재 채린이 단단히 토라진 상태임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 한다. 자칫 귀찮게 구는 둣한 느낌을 주면 역효과가 나기에.
'일단 대화보다는‥‥‥.'
쪽지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학림고나 정현일에 대해선 말해야 할 것이 많고, 그것을 정확하게 정리하자면 귓속말보다 쪽지가 유리할 것 같았다.
더구나 볼쑥불쑥 눈앞에 떠오르는 귓속말보다 쪽지는 상대를 덜 귀찮게 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 내 한 맺힌 과거를 채린이에게 모두 이야기해 주는 거야.!"
유한은 자신이 갖고 있는 필력을 모두 동원하여 정성스레 쪽지를 작성했다. 학림고와 정현일의 만행을 유효적적하게 부풀리고, 그 뒤로 독불장군 바츠로 방황하게 된 사연을 자세하게 적어 나갔다.
'됐다. 이만하면 채린이를 설득할 수 있겠지.'
프그램된 게임 이벤트에도 울고 웃던 채린이다. 그만큼 감정이 풍부하다는 말이고, 그런 그녀라면 이 쪽지를 보고 자신이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럼 화를 풀 거고,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겠지'
유한은 희망올 품고 다 적은 쪽지를 채린에게로 보냈다.
그런데 엉뚱한 안내 문구가 유한의 눈앞에 떠올랐다.
<시아 님께 쪽지를 발송할 수 없습니다. 학원 필드는 면학 분위기 조성울 위해 외부에서 전달되는 쪽지와 귀솔말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건 뭔 개소리야!"
유한은 펄쩍 뛰었다. 기껏 정성 들여 적은 쪽지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니.
"왜 쪽지가 안 된다는 거야? 그럼 리지스가 보낸 건 뭔데!"
유한은 몰랐지만, 앞서 리지스가 보낸 쪽지가 채린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런 사정을 모르는 유한은 자신이 농락당하고 있다 생각했고.
"제기랄, 드림맥스 이 자식들 제멋대로 굴고 있어!"
단단히 화가 난 그는 로그아웃을 하고 캡슐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장 손석진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3
바츠 해킹 사건의 주범인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개발자 손석진은 요즘 한창 바빳다.
이미 서비스되고 있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새로운 이벤트와 컨텐츠를 업데이트시키는 일도 하지만. 드림맥스의 신작 게임 개발에도 적극 창여하고 있었다.
그가 한창 신작 게임의 배경과 스토리를 구상하고 있을 때, 유한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유한 군. 잘 지내고 있습니까?"
"잘 못 지내고 있습니다! 드림맥스 게임 시스템 진짜 대단하네요! 사람을 차별할 줄도 알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자세히 말해 보세요."
"그러니까‥‥‥."
유한은 쪽지의 학원 필드 전달 불가와 관련해서 리지스의 쪽지가 채린에게 전달되고 자신의 쪽지는 차단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사정을 들은 손석진은 손수 게임 데이터베이스를 살펴서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조사해 보았다. 유한의 말에 혹시 오류가 난 게 아닌가 우려했는데. 알고 보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유한 군. 시스템에 오류가 있어서도 아니고 저희가 유한 군이 미워서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마십쇼! 아니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리지스 양의 쪽지가 시아 양에게 전달되었을 시간에 시아 양이 마침 학원 필드 밖에 있었습니다. 유한 군이 쪽지를 보냈다 거부된 시간에는 시아 양이 학원 필드 안에 있었고요."
"그, 그런‥‥‥."
정확한 설명을 들으니. 할 말이 없어진 유한이었다.
"아무 이상 없으니 안심하고 게임을 즐기세요. 그럼 이만."
손석진은 거기서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런데 유한의 다급한 외침이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개발자님,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 달라니요?"
"얼마 전 제가 실수하는 바람에 시아가 뼈쳐버렸거든요. 그래사 쪽지를 보내려는데 안 들어가져서‥‥‥ 제 쪽지만 어떻게 시아에게전달되게 해 줄 순 없습니까?
유한의 부탁에 손석진은 어렵다는 투로 말했다.
"글쎄요. 그건 곤란합니다만."
"곤란할 게 뭐 있어요? 개발자님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신이 잖아요, 창조주잖아요. 그 정도는 가볍게 주물러 처리하실 수 있지않습니까?"
"뭐 못할 것은 없지만. 저번 일로 꽤 혼이 나서 말입니다."
바츠를 되살린 뒤로 손석진은 드림맥스외 감시를 받고 있었다. 또 뭔가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가 해서 말이다.
지금도 그가 누군가와 전화를 하자. 부사장 정경욱이 달려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츠를 뭐하러 살렸냐고, 이 양반아!'
이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캐릭터가 돌아온 탓에 중요한 순간에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니!
"그냥 유한 군도 학림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여친 분에게 직접 말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미쳤습니까? 그런 도둑놈들에게 수강비를 주게요. 난 쪽지만 전달하면 된다고요."
하긴 그렇겠지.
유한이 과거 학림고에서 어떤 꼴을 당했는지 잘 아는 손석진은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좋습니다. 그런 이왕에 저지르는 김에 이렇게 합시다."
"뭘 어떻게요?"
손석진은 힐끔 정경욱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제가 조취를 취해 줄 테니, 유한 군이 학림 아카데미에 직접 들어가세요."
"저더러 그곳에 들어가라고요?"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지금 저희도 이곳을 예의 주시 중인데, 유한 군이 한번 둘러보고 저에게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해 주면 좋겠군요."
손석진의 말에 유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직접 학림 아카데미에 들어간다? 나쁘지는 않았다. 채린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 정현일이 그녀에게 껄떡대는 걸 막을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학림 아카데미에 가기 싫었던 건 예전에 퇴학당한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도둑놈들이 터무니없이 비싼 수강비를 요구한 탓이 컸다.
'그림맥스에서도 주시 중이라면, 이놈들이 게임 내에서도 뭔가 구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가?'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기 마련.
현실에서 학림 재단의 부정을 생각한가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좋습니다. 개발자님을 믿고 한번 들어가 보지요."
손석진의 심성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던 유한은 쾌히 그의 재의를 받아들였다.
"가서 조심하십시오. 유한 군이 들어온 것을 보고 이상 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당연히 그런 놈들이 있겠지.'
유한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걱정마세요.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손석진이 유한과 통화를 끝내자. 옆에서 듣고 있먼 정경욱이 물었다.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려고?"
"꿍꿍이가 아니라 우리가 진행하는 조사를 보강하자는 검니다."
드림맥스도 얼마 전부터 학림 아카데미를 감시하고 있었다. 학림 아카데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이 흘러나왔기 때문.
뭔가 문제가 있다면 회사에서 먼저 밝혀내 시정하는 것 이 모양새가 좋았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게임 데이터로 들어오는 정보로는 비리를 밝혀내기가 부족했고. 학림 아카데미의 학원장 제르달. 즉 정 교감은 예전에 티쳐스 때 당해본 적이 있어 그런지 상당히 조심하고 있었다.
"저번에 정 부사장님이 제안하섰죠. 우리 쪽 정보원을 학원생으로 넣어 보자고요."
"그야 그랬지만‥‥‥."
"유한 군은 예전에 학림고의 비리를 밝혀낸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퇴학을 당했고요. 학림고에 대해 우리보다 잘 알고 있는 유한 군이 좋은 정보를 가지고 올지도 모릅니다."
"자네도 확신할 순 없는 거로군"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을 드림맥스 자체에서 처리하지 못하면 향후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평판이 나빠질지도 모른다.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 봐야 했다.
"알았어. 자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조심해야 돼. 잘못하면 저자들에게 역공을 당할 수 있으니까"
"주의하겠습니다."
손석진은 게임 데이터배이스를 열어 유한의 개릭터 지그의 정보를 조금 수정했다. 학림 아카데미 학생으로 등록시키고. 인벤토리에 학원 교복도 넣어 두었다.
원래 이런 동록 작업은 학원에서 수강을 이수한 유적의 정보를 보내 주면 하는 일이었지만. 유한은 그 과정 없이 무단으로 처리되었다.
"이제 유한 군이 정보튤 구해 오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을 하면서 말인가?"
"예, 우리가 할 일을 하면서요."
그렇게 말하면 손석진은 중단했던 신작 게임의 구상을 계속했다.
4
손석진의 도움으로 학림 아카데미 학생이 된 유한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마노스 제국으로 이동했다.
학림 아카데미는 마노스 제국의 황도에 있었다. 학원 앞에 당도한 유한은 화려하게 치장된 교문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규모에서 차이가 있지만, 현실의 학림고 교문도 이렇게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나름 있어 보이려 노력한 듯한데 유한의 눈에는 암만 봐도 천박하게 보였다.
"딱 지네들 수준에 맞게 노는군."
유한이 학원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있다. 교문을 지키고 서 있던 경비 NPC가 유한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거기 당신!"
'엥? 뭐야? 손석진 씨가 분명 손을 썼을 텐데.'
당황하고 있는 유한에게 다가온 경비 NPC들은 그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말을 늘어놓았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교복을 입어야 할 게 아닙니까!"
"학원 내에선 던전을 제외하고 교복 이외의 차림이 허가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였던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유한은 착용하고 있던 불새의 코트를 벗고 인벤토리에 있던 학림 아카데미의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됐수?"
"그럼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부디 교칙을 준수해 주십시오."
"학생은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하는 법입니다."
학생 주임 같은 소리를 하는 경비 NPC들이었다.
그렇게 교문을 통과해 학원 안으로 들어간 유한은 채린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제길 아주 뻥튀기를 해 놨군.'
학림 아카데미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과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정원들만 해도 웬만한 대학교를 능가할 정도.
'그렇다고 무턱대고 둘러볼 수도 없는 노룻이고‥‥‥."
그러다 정현일 일당이나 학림고 선생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자신을 도와준 손석진이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래서 유한은 최대한 자신의 정체가 드리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학원 안을 살펴보고 조사했다.
건물 안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교정에서 잡담을 나누거나 운동장에서 노는 학생들도 있었다.
떠드는 말을 들어 보니, 모든 학생이 같은 시간에 수업을 듣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져 있거나. 대학교 강의처럼 수업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 할 수 있는듯.
'그런데 다들 주변에는 무신경하네.'
처음 걱정했던 거와 달리 학생들은 유한이 옆을 지나가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긴, 밖에서와 달리 학원 내의 유저들은 모두 교복으로 차림새가 통일되어 있었기에. 머리 위의 이름을 유심히 살펴 보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더구나 학원이라는 특수 공간은 친구나 성생임 외에는 신경 쓰지 않게 만들었으니.
"심하게 티를 내거나 아는 놈과 마주치지 않는 이상 들키지 않겠는걸,'
그리 판단한 유한은 용기를 가지고.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붙들고 말을 건네 보았다.
"저기, 시아라는 여학생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시아? 잘 모르겠는데요?"
몇 번이나 허탕을 쳤지만, 결국 채린을 아는 애와 만났다.
"아, 시아요? 좀 전에 수업 마치고 월하의 공동묘지에 간다고 하던데?"
"월하의 공동묘지요?"
유한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학림 아카데미에 있논 3개의 던전 중의 하나다. 바로 저기 보이는 학원 뒷산에 있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한 유한은 후다닥 아카데미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학림 카데미는 3개의 던전과 2개의 사냥터를 가지고 있었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이 즐길 목적이라지만. 어떻게 보면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유료 던전인 셈.
그래서인지 이 던전과 사냥터에서는 몹이 주는 보상이 일반 던전보다 좋았고, 바깥에선 구할 수 없는 독특한 아이템들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수능 대비 문제집과 같은 학업과 관련된 아이템도 획득할 수 있다고.
"학원 뒤에 묘지라‥‥‥ 그러고 보니 학림고에도 비슷한 게 있었지."
이사장의 부모라던가. 아무튼 꽤 호화로운 무덤이 학교 뒤에 있었다. 때때로 학생들을 동원해 풀올 뽑도록 시키기도 했다.
"여기가 입구인가?"
뒷산 서면에는 월하의 공동묘지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다. 유한이 묘지 안으로 들어가자. 싸늘하고 삭막한 풍경과 정체불명의 귀곡성이 그를 반겼다.
월하의 공동묘지는 넓고 을씨년스러웠다. 생각보다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곳에서 채린을 어떻게 찾을지 걱정되었다.
'하아, 결국 다 뒤져야 하나?'
곤란함에 머리를 긁적이던 유한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귓속말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학원 필드는 외부의 쪽지와 귓속말을 차단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부의 것까지 차단한다는 말은 없었다.
"그래. 밑져도 본전이니 한번 해 보자."
한편, 월하의 공동묘지 안으로 해온 채린은 약간 겁먹은 얼굴로 묘지를 해매고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월하의 공동묘지는 무덤이 있는 지상과 각종 언데드 몬스터들이 배회하는 지하 납골당이 있는데 채올은 그만 지하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지하는 지상보다 훨씬 무서운데다 미로처럼 복잡했기 때문이다.
원래 어둡고 무서운 것은 질색이었던 그녀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간단했다. 월하의 공동묘지 보스 '천년호(千年狐)'를 쓰러트리면, '수능 족집게 예상 문제집' 얻을 수 있다고 학원 친구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수능 족집게 예상 문제집은 학림고에서 지난 수년간의 수능 기출 문제들을 정리하고, 서울대 입학생들의 수험 노트를 추가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밖에선 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오직 게임 내에서만 얻을 수 있는 레어 아이템.
안 그래도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아 애태우고 있던 그녀는 당장 그 문제집을 획득하기 위해 월하의 공동묘지로 왔다.
하지만 그 결과 이렇게 어디가 어딘지 모를 지하를 헤매게 되었으니. 지상에는 그나마 애들이 많았는대, 지하에선 인적이 드물었다.
"히잉, 이럴 줄 알았으면 파티를 짜서 오는건데."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울상을 지으며 전진하던 그녀는 갑자기 뭔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것을 느꼈다.
ㅡ어떤 놈이 내 무덩을 밟는 거냐!
"꺅! 무덤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머리와 손을 보고 채린은 비명을 질렀다. 지하에 내려와서 몇 차례 겪어 봤지만 당최 적웅이 되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채린은 자신의 다리를 불잡은 무덤귀의 머리를 들고 있던 랜턴으로 후려쳤다.
-컥!
무덤귀가 손을 놓자 채린은 곧장 성월의 활로 바꿔 잡고 화살을 난사했다,
"휴우, 간 떨어질 뻔했네."
무덤귀를 처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그녀, 그 틈을 노렸다는 듯이 허공을 맴돌던 퍼런 불덩이들이 달려들었다.
-훔치자! 인간의 물건을 훔치자!
-돈 내놔라, 돈!
"꺄악! 이것들이!"
채린을 공격한 것은 '도둑깨비' 라는 몬스터로, 강하진 않지만 유저가 빈틈을 보일 때 아이템을 훔쳐 가는 고약한 놈들이었다.
달려든 도독깨비들을 밀쳐 낸 채린은 곧장 성월의 활을 쏘아 도둑깨비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도둑처럼 잽싼 녀석들은 이내 던전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중요한 아이템이 없어지면 안 되는데‥‥‥."
다행히 고가의 아이템은 털리지 않았다. 도둑깨비들이 훔쳐 간 것은 소량의 골드와 인벤토리에 있던 여분의 랜턴이었다.
"이런, 랜턴이 없잖아?"
랜턴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채린은 울상을 지었다. 하필이면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보게 해주는 이글 아이를 가져오지 않은 이때에 랜번을 모두 털리다니.
몬스터보다 어듬을 더 무서워하는 그녀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 이제 어떻게 나가지?"
채린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였다.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 줄 귓속말이 날아왔다.
-시아야, 나 너한테 할말이 있어. 지금 월하의 공동묘지 던전인데 어디 있는 거야?
유한이었다.
어떻게 학림 아카데미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비록 그에게 난 화가 덜 풀렸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 어둠 속에서 언제 흉측한 언데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채린은 즉시 유한에게 귀속말을 보냈다.
- 나 지금 지하의 미로야. 빨리 와 줘, 지그야.
-알았어. 당장 달려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그곳에서 기다려.
'히잉, 지그가 빨리 와야 할 텐데.'
어둠 속에서 채린이 손꼽아 유한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저벅이며 무언가가 다가왔다.
'히익! 귀, 귀신이다!'
벽에 비친 그림자에 깜짝 놀란 채린은 서둘러 근처 기둥 뒤에 숨었다. 그녀의 레벨이면 던전의 왠만한 몹들은 다 잡고도 남음이 있었는데, 이렇게 숨기부터 하니.
그러나 이번에 나타난 것은 몬스터가 아니라 유저.
그것도 여러 명. 그중에 선두에서 랜턴을 들고 있는 소년은 낯이 익었다.
그는 바로 일현. 아니 정현일이었다.
"아!"
채린은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가려다 멈칫했다 랜턴의 불빛에 비친 정현일의 얼굴이 그녀가 알던 상냥한 일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드름과 야비함으로 가특찬 얼굴. 채린은 예전에 그런 얼굴을 한 유저를 본 적이 있었다.
'베히모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도로 기둥 뒤로 숨었다.
정현일과 그의 일행은 그녀가 근처에 있는 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 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계속 키득거렸다.
"그 계집애가 잘 안 넘어온다고?"
뒤에 있던 녀석의 물음에 정현일은 짜증이 난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강유한을 담당했던 선생한테서 이메일 주소를 알아냈지. 그 주소로 사진을 보내니까 둘이 알아서 싸우다가 갈라지더라고, 거기까진 성공했는데. 이게 잘 넘어오지 않네."
"그래? 그럼 앞으로 어쩔 건데?"
"제까짓 게 별수 있어? 계집애 들은 다 거기서 거기야. 시간이랴 좀 걸리겠지만, 내가 들이대는데 지가 안 넘어가고 배기겠냐?"
기둥 뒤에서 듣고 있던 채린은 기가 막혀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점잖고 상냥하던 일현의 목소리가 저리도 음흉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완전히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
'설마 나 재한테 속은 거야?'
그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정현일과 그의 패거리들은 계속 떠들어 댔다.
"근데 그 계집에 꽤 예쁘다면서?"
"얼굴도 얼굴이지만 몸매가 끝내 줘. 이제껏 만난 애들 중에 최고더라고. 강유한 그 새끼가 어디서 그런 애를 꼬셨는지."
"게임하다가 알게 된 거 아냐? 그 자식이 지그라면서? 예전엔 바츠였고."
지그와 바츠의 명성으로 유혹한 건 아니냐는 뜻.
"강유한 그 진따 새끼가 바츠였다니 상상이 안 간다."
"그 자식 옛날하곤 다르더라. 방심하다 한 대 맞았는데. 어금니 다 나가는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며 정현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를 생각하자 유한에게 맞은 부위가 욱신거리는 듯했기에
"사실 현일아 너한테 이야기 안 했는데 그놈 싸움 잘 하는 거 맞아."
과거 김필중과 함께 유한을 상대했다가 흠뻑 두들겨 맞았던 일진 중의 하나가 입을 열었다.
"뭐야? 넌 알고 있었어?"
"쪽팔려서 이야기 못 했는데 김한중이 작년에 입원한 것도 놈의 짓이야"
다른 일진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그 진따 자식이 어떻게 그렇게 변했지?"
"이계 진입해서 드래곤 하트라도 삼켰나?"
학림고 임진들은 갑자기 강해진 유한을 화제 삼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강유한 그 자식에 대해 조사 좀 했거든. 알고 봤더니 극기도를 배운 것 갔더라. 저번에 흑곰 아저씨 부하들이 그 녀석 뒤를 밟은 적이 있었는데. 그놈이 극기도 관장이랑 수련생들 하고 만나더래"
"헐. 극기도라면 수련하기 무척 빡세다던대."
"우리 형도 사흘 정도 수련하다 골병들까 봐 포기했어."
강유한이 극기도를 배웠다니.
양아치들은 만만한 오리 새끼가 백조, 아니 독수리가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새끼 독하게 맘먹었나 보네. 그거 다 현일이 너한테 복수하려고 하는 거 아닐까?"
"복수? 뭐 게임에선 어쩌다 보니 그 새끼한테 엿 먹었긴 하지만 현실에서 마지막에 이기는 건 나야."
"하긴 그 자식 여친을 네가 뺐으면 복장이 터지겠다."
"크크크. 니들이 강유한이 풀이 죽어 돌아선 모습을 봤어야 하는 건데."
숨어서 엿듣고 있던 채린은 자신도 모르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왜 유한이 그렇게 흥분했던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거니 생각은 했지만, 정현일이 저런 악질일 줄은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더 미치고 발광하게 만들어야지. 저번엔 스크린샷 합성한 걸 보냈지만. 다음엔 현실에서 키스하는 걸로 보내 줄 생각이다. 그런 다음 점점 진한 사진으로다가‥‥‥ 흐흐흐."
"와! 그러다 그 자식 인생까지 로그아웃하는 거 아냐?"
"하든지 말든지. 자자, 그만 쉬고 이만 가자고."
채린은 벌떡 일어났다.
정현일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현일에 대해서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녀는 유한이 자신을 못 믿어 준다며 화를 냈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그때 흥분한 유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어 주지도 못했다.
유한을 만나면 사과를 해야 할 것 갑았다.
'그 전에 저 자식 면상을 한 대 갈겨 놔야겠어.'
주먹을 붙끈 줜 채린은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 정헌일을 쫒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채린의 어깨를 불잡았기 때문이다.